소설리스트

201화 (201/328)

페기는 심통을 부리는 차라가 귀여워 조금 웃고 말았다. 차라가 다시 화르르 타오르려는데,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부술 듯이 문을 밀고 들어온 하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지, 지금 밖에 치안대가 와 있어요!”

“뭐?”

표정을 굳힌 페기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살짝 젖혔다. 대문 쪽에 곤란한 표정의 하인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사나운 고성이 윙윙거리며 들려오기도 했다.

“무슨 일이라니?”

“그, 그게 치안대가 체포하던 죄인이 이 근방으로 달아났다고 해요. 지금 당장 저택을 수색해야겠다고….”

페기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녀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확실하진 않은데 치안대 사이에 청백회 사람이 섞여 있는 것 같아요. 소니아가 며칠 전에 야채 가게에서 행패 부리던 청백회와 똑같은 사람을 보았대요.”

창틀을 쥔 페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함정이었다.

“백작님은?”

“아직 출타 중이세요.”

“그럼 너는 백작님께 최대한 빨리 이 소식을 전하도록 하렴.”

“아, 아가씨는요?”

하녀가 불안하게 물었다. 저쪽에 청백회까지 끼어 있는 마당에 백작 없이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나는 알아서 몸을 숨기마. 백작님께도 그리 전하렴.”

“알겠습니다. 꼭 조심하셔야 해요.”

하녀가 꾸벅 인사하곤 나갔다. 페기는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한 차라를 데리고 백작의 서재로 들어갔다.

“페, 페기?”

그녀는 왼쪽에서 세 번째 책장 앞에 서서 기억을 더듬었다. 아래에서 두 번째 칸, 오른쪽에서 일곱 번째 책.

계산에 맞는 책을 꺼내자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책장이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페기가 낑낑거리며 책장을 밀기 시작했다. 멀거니 보고만 있던 차라도 퍼뜩 정신을 차리곤 그녀를 도와 책장을 밀었다.

한동안 음침한 쇳소리만 내던 책장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페기와 차라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온몸으로 책장을 밀었다. 덜컹덜컹, 위태롭게 흔들리며 진동하던 책장이 마침내 끝까지 밀려났다.

“돼, 됐다….”

땀으로 범벅 된 차라가 주르르 미끄러졌다. 책장을 짚고 서서 헐떡이던 페기가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백작은 혼자서도 잘만 밀던데….”

“피아제 백작이?”

호리호리하고 팔랑팔랑한 백작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우뚱하던 차라는 문득 느껴지는 서늘한 바람에 옆을 돌아보았다. 책장이 밀려난 곳에 정사각형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건….”

페기는 구멍에 쳐진 거미줄을 대강 떼어 내곤 두 손, 두 발로 엎드린 자세를 취했다. 그러다 따라오는 기척이 없자 뒤를 돌아보았다.

“차라?”

“여, 여기 어디로 이어진 거야?”

“아마도… 미레 강변일걸?”

“아마도? 확실하지 않은 거지?”

“미레 강변이야.”

그녀의 확답에도 차라는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몸을 일으킨 페기가 아직 조용한 방문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차라. 청백회가 어떤 사람들인지는 너도 잘 알지?”

“…….”

“명색이 라발의 대사인 피아제 백작의 저택을 이렇게 막무가내로 침입하려 드는 무리야. 아무리 사도라 해도 여기서 잡히면 그리 좋은 대접은 못 받을걸.”

“으….”

차라가 앓는 소리를 내는데, 멀리서 어마어마한 굉음이 들려왔다. 뒤잇는 발소리들이 웅장하게 벽과 바닥을 울렸다. 차라의 안색이 순식간에 허예졌다.

“먼저 갈래?”

페기가 구멍을 눈짓하며 살짝 비켜섰다. 짧게 갈등한 차라가 눈 딱 감고 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를 따라 신속하게 구멍 안으로 기어든 페기가 책장 뒷면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힘껏 책장을 닫았다.

쿵, 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사방이 어둠으로 가로막혔다. 둘은 부딪히고 뒤엉키기를 반복하다가 겨우 어둠 속을 더듬어 나아가기 시작했다. 얼결에 앞서게 된 차라가 우는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난 어둡고 좁은 곳이 제일 무서워. 이런 데는 꼭 유령이 있을 것만 같단 말이야….”

“내가 죽어 봤는데 유령 같은 건 없더라.”

“그것참… 믿음직한 말이네… 자, 잠깐! 방금 뭐, 뭐였어?”

“응?”

“뭐, 뭔가가 내 손등을 훑고 지나갔….”

그렇게 비명을 다섯 번쯤 지르고, 졸도할 뻔한 상황을 세 번쯤 넘겨서야 저 멀리서 빛 한 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차라는 울며불며 석굴을 기었다. 어찌나 빠르던지 페기는 따라잡지도 못할 속도였다.

“차라, 조심해!”

외치기 무섭게, 차라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빛 너머로 굴러떨어졌다. 페기는 굴의 입구를 가리던 수풀을 헤치며 황급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차라!”

“나, 나 여기 있어….”

안면을 잔디에 처박은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차라가 겨우 손만 들어 흔들었다. 한숨처럼 웃은 페기가 조심스레 굴에서 내려와 발을 디뎠다.

짧은 모험 끝에 도달한 곳은 미레 강변 근처의 이슥한 곳이었다.

그새 시커멓게 먼지 먹은 옷을 털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로 세수를 한 두 사람은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강변으로 나왔다. 페기는 우연찮게 맞닥뜨린 노파에게서 보석 단추를 주고 얇은 담요를 구입했는데, 조금 퀴퀴한 냄새가 나긴 해도 둘둘 감아 얼굴을 가리기는 좋았다.

노을 지는 강변에는 뛰노는 아이들과 산책하는 노부부만이 간간이 보였다. 조악한 솜씨로 만든 바람개비를 들고 뛰어가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페기가 불어오는 강바람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 위로 불그스름한 노을 조각이 박힌 물비늘이 반짝이고 있었다.

예기치 않게 목도한 광경은 잊은 줄만 알았던 오래전의 기억을 끌어 올렸다.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허리께까지 예쁘게 길렀던 어린 날. 바깥 무서운 줄도 모르고 가족들을 졸라 매일같이 나들이를 나왔던 이 강변.

흘러가는 강물은 그 옛날과 비교해 조금도 변한 것이 없건만, 정작 이곳에 선 그녀는 너무나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창녀의 딸이란 비난을 들으며 어느 노파의 손에 휘어잡혔던 머리채는 싹둑 잘려 나갔고, 영원히 함께일 줄 알았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세상의 다정함을 믿었던 일곱 살 어린애의 순수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찌할 수 없는 회한,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넘치도록 차올랐다. 그녀는 간신히 담요를 끌어 올려 시큰거리는 코끝을 가렸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나날은 저 강물의 물비늘처럼 늘 반짝이며 빛바랜 현실 속의 그녀를 희롱하고 있었다.

“저기….”

문득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단걸음에 모여든 아이들이 담요로 얼굴을 감싼 그녀를 보며 주춤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차라가 대신 나섰다.

“무슨 일이야?”

“친구가 저기 넘어져 있는데 많이 다쳐서…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페기는 난처해하는 차라의 팔을 붙잡고 속삭였다.

“다녀와. 난 여기 있을게.”

“뭐? 너도 그냥 같이 가.”

“저 애들 표정 좀 봐. 내가 같이 가면 울걸?”

그 말대로 아이들은 차라의 주변에만 둥글게 모여 있었다. 힐끔힐끔 그녀를 훔쳐보는 두 눈에 두려움이 넘실거리는 걸 보면, 그녀를 동화 속 마녀로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걱정하지 마. 이래 봬도 호신술은 익혀 뒀으니까.”

“네가? 호신술을? 언제?”

차라가 의심스럽게 그녀를 훑어보았다. 페기는 말없이 웃으며 번개처럼 차라의 팔을 뒤로 꺾었다. 그러곤 차라가 악 소리를 내기 무섭게 힘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봤지?”

페기가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기겁했던 차라가 꺾였던 팔을 매만지며 슬금슬금 뒷걸음질했다. 차라를 둘러싼 아이들도 열심히 뒷걸음질했다.

페기는 멀어지는 차라와 아이들에게 예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자 아이들 중 누군가 ‘마, 마녀!’ 하고 외치며 꽁지 빠지게 도망갔다. 달음박질하는 아이들을 따라 차라도 엉겁결에 달리기 시작했다.

안간힘을 다해 달리는 모습들이 귀여워 웃던 페기는 어느새 물밀듯 밀려오는 정적 속으로 잦아들었다. 노을이 불그스름하게 번져 오는 눈에 어리는 것은 수척하게 여윈 감정의 몰골이었다.

그녀는 강둑에 걸터앉아 멍하니 시간을 죽였다. 오래간만에 보는 해 질 녘의 미레 강변은 북방의 전쟁터에서 보았던 석양과도 유사했다. 늘 마음 한구석으로 그렸던 곳이 실은 특별하지 않다는 자각은 묘한 공허함을 불러일으켰다.

부표처럼 떠다니던 생각의 흐름은 불현듯 발치로 공이 굴러오면서 끊어졌다.

페기는 고개를 들었다. 하녀와 호위 기사들을 거느린 젊은 여자가 코끝으로 도도하게 공을 가리키고 있었다.

“주워 오지 않고 뭐 해요?”

페기는 얌전히 공을 주워 들고 다가갔다. 두 손으로 공을 내밀자, 여자가 코웃음을 쳤다.

“무릎 꿇고 공손히 바쳐야지.”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던 페기가 대신 하녀에게 공을 건넸다. 동시에 여자에게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누군지 몰라요?”

“…….”

“진짜 모르나 보네.”

페기는 둘러쓴 담요 속에서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정 모르는 귀한 아가씨와 말씨름을 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냥 순순히 바라는 대로 해 줄 걸 그랬다는 푸념을 하는데, 별안간 하얀 손이 눈앞으로 엄습했다.

부지불식간에 담요가 걷혔다.

“어머, 예쁜 얼굴을 왜 가리고 있었어요?”

담요를 들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여자가 갑자기 코를 틀어쥐더니 쓰레기를 내버리듯 하녀에게 담요를 던졌다. 페기는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생생하게 느꼈다.

“돌려….”

“그나저나 파피는 어디 간 거야? 이 멍청한 강아지! 공을 물어 오랬더니 또 엉뚱한 데로 빠졌나 봐!”

“돌려줘요, 담요.”

정신 사납게 주위를 둘러보던 여자가 멈칫하며 다시 페기에게 시선을 주었다. 고운 얼굴에 살짝 금이 가 있었다.

“돌려주세요, 라고 해야지.”

“…….”

“아니, 생각해 보니 그것도 너무 건방져. 무릎부터 꿇고 예의 바르게 부탁해야죠. 제발 돌려주십시오, 하고 빌면서.”

페기는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가늠할 수 없었다. 솟구치는 싫증이 도리어 전신을 차갑게 얼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껏 오만한 눈빛을 하던 여자가 갑자기 파안대소했다. 배를 부여잡고 하녀에게 기대어 한참이나 끅끅거리더니,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겨우 바로 섰다.

“장난이에요, 장난. 와, 표정 한번… 누구 하나 죽일 얼굴이었던 거 알아요?”

여자는 그러면서 주변을 휘 둘러보더니, 뒤에 선 하녀를 손끝으로 까딱까딱 불렀다. 그러고는 하녀가 어깨에 두르고 있던 얇은 스카프를 받아 페기에게 내밀었다.

“아까 그건 구린내가 너무 심하더라고요. 차라리 이걸 써요. 예쁜 얼굴에 그런 냄새 배면 얼마나 꼴불견이에요.”

페기는 얼결에 스카프를 받았다. 윤기 나는 검은 직모를 어깨 너머로 넘긴 여자가 조금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기분 나빴어도 당신이 참아요. 오늘 내가 아주 제대로 망신을 당했거든. 아직도 어이가 없어서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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