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4화 (204/328)

일명 ‘진실의 창’.

천 년 전 야누비타 1세의 전설을 상징하는 창문이 점차 밝아 오고 있었다. 암암한 세상에 먼동이 터 오듯 찬란하게.

석상처럼 굳어 하염없이 창문을 올려다보던 막시모가 눈부시게 찔러 오는 빛을 이기지 못하고 황급히 양팔로 눈가를 가렸다. 깎아지를수록 세기를 더해 가던 빛이 어느덧 황홀한 폭포가 되어 중앙 단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시끄럽게 울리던 노성이 일시에 가셨다.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싸우던 사람들이 하나둘 단상을 주시했다. 찬연하게 쇄도하는 빛의 기둥은 오직 한 사람만을 비추고 있었다.

카니나의 페기.

새하얀 빛 속에서 지워질 듯 희미해진 그녀는 흡사 불길 속에 스러져 가는 순교자처럼 보였다. 일견 거룩해 보이기까지 하는 광경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황망히 눈을 비비던 사람들조차 맥없이 손을 떨구는 수밖에 없었다.

한없이 아연한 적막.

쏟아지는 빛을 삼킨 페기의 그림자가 무섭게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단상으로 이어지는 통로의 덮개, 층층이 쌓인 성직자들의 자리, 색유리를 끼워 맞춘 스테인드글라스…. 줄기를 뻗는 나무처럼 무성하게 자라나는 그림자가 순식간에 사람들의 고개 위로 치밀었다. 그림자를 피해 화들짝 물러난 성직자들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공포심이 어려 왔다.

벽을 타고 오르던 그림자는 돔에 꼭대기에 이르러 멈추었다.

산발적으로 터져 나오던 술렁임이 움푹 꺼졌다. 불안감이 도사린 정적 속에서 그림자가 움츠렸던 날개를 천천히 펼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비명 같은 탄성이 터졌다. 그림자의 날개가 돔을 온통 뒤덮을 것처럼 뻗어 나가고 있었다. 자연스레 별궁으로 들이치던 볕이 잦아들고, 그림자의 날갯짓이 어둑하게 내려앉았다. 넋 놓고 돔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얼굴 위로 날개의 웅장한 자취가 잿빛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림자가 날개를 완전히 펼쳤다.

숨죽인 정적이 깔렸다.

사람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날개를 펼친 그림자를 목도했다. 한 쌍의 거대한 날개가 돔을 감싸 안고 있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경이로운 신성이 좌중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저 우러러보는 것만으로도 전신을 관통하는 아찔한 전율이 끓어올랐다.

“아… 아아…!”

사방에서 목메어 우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으로 털썩 주저앉고, 이마로 땅을 찧으며 비감을 삼켰다.

먼 옛날, 야누비타 1세께서 추종자의 정체를 간파하셨던 빛이 오늘날 되살아난 사도의 권능을 꿰뚫어 보셨으니.

4년 전, 불신함으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던 사람들은 북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통곡했다.

“아아… 사도이시여…!”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가 거대한 돔 아래서 진동했다. 입을 틀어막고 눈을 내리감은 자들이 끔찍한 죄악감의 파도에 쓸려 나갔다. 엎드려 우는 사람들의 얼굴에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이 선연했다.

그때, 덜커덩하는 소리가 급하게 들려왔다.

권좌에서 미끄러진 레오폴트가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거미줄처럼 실핏줄이 도드라진 눈에 벌건 핏기가 감돌았다. 경련하는 손을 들어 간신히 단상으로 내뻗던 그가 돌연 맥없이 고꾸라졌다.

“성하!”

고드릭 수도사와 근위대원들이 기겁하여 달려왔다. 그러나 레오폴트는 이미 혼절한 뒤였다. 기사에게 업혀 나가는 그의 몸이 얇은 종잇장처럼 흔들렸다.

침묵하던 예후르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단을 내려가는 구둣발 소리가 단정하게 울렸다. 조각났던 좌중의 집중이 단숨에 그에게로 쏠렸다. 중앙 단상으로 오르는 그의 발걸음이 거침없었다.

그는 페기에게서 몇 발짝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섰다. 쥐 죽은 듯한 정적이 사위를 휘감았다. 여전히 빛 속에 버티어 선 페기는 찰나를 견뎌 나가는 기분으로 힘겹게 그를 마주 보았다. 참고 또 참았던 서러움이 깊은 속에서부터 끓어오르고 있었다.

문득 예후르가 흐드러지도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의 형제.”

“…….”

“돌아온 것을 축하해.”

레오폴트를 따라 나가던 비올라가 흉흉하게 구겨진 얼굴로 단상 쪽을 돌아보았다. 페기는 어지럽게 몰아치는 격정을 씹어 삼키며 기꺼이 예후르의 손을 맞잡았다.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졌다.

***

공의회는 중단되었다.

되살아난 사도를 부르짖던 시민들은 근위대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붙잡혀 별궁 밖으로 내팽개쳐졌고, 어떻게든 페기에게 손 한 번 닿고자 단상으로 뛰어 내려온 성직자들은 근위대의 벽에 가로막혔다. 자칫하다간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되리라 직감한 의장은 절차대로 본 안건을 원탁회의에 졸속 이관해 버렸다.

그렇게 긴급 원탁회의가 소집되었다.

황망히 회의장으로 모여든 원탁 추기경들은 하나같이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글리체리아는 눈물 자국 가득한 얼굴로 하염없이 기도만 올렸으며, 솔란지아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싸 쥔 채 숨만 고르고 있었다. 개구리처럼 튀어나온 눈을 바삐 굴리는 콘체사 추기경이나 거멓게 죽은 낯빛으로 연거푸 한숨만 내쉬는 람베르토 추기경,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도미시오 추기경도 평소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그러나 가장 충격받은 이라 할 것 같으면 역시 보나벤투라였다. 말다툼 끝에 어느 주교와 멱살잡이까지 갔던 그는 평소 단정하던 차림조차 엉망진창이었다. 터진 소매 솔기나 찢어진 망토 자락을 추스를 틈도 없이 정신이 반쯤 나간 모양새로 우두커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고소하게 지켜보던 클레멘스가 그래도 조금은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지, 넌지시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멍하니 고개를 든 보나벤투라가 얌전히 손수건을 받아 목덜미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클레멘스가 작게 탄식하며 그 반대편이라 열심히 손짓했지만, 보나벤투라는 멍하니 허공만 응시할 뿐이었다.

회의장의 문이 활짝 열렸다. 빠른 걸음으로 들어온 퀴테리아가 제자리를 찾아 앉으며 말했다.

“성하께선 아직 혼절해 계십니다. 언제 눈을 뜨실지 기약할 수 없다고 하니 일단 우리끼리라도 논의를 시작하도록 하죠.”

“아직 한 명이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예후르의 발언에 퀴테리아는 반사적으로 비올라의 빈자리를 보았다.

“해당 안건의 당사자이신 알비야 공작 전하께선 원탁회의에 참여하실 수 없습니다.”

“알비야 공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클레멘스를 제외한 원탁 추기경들의 얼굴에 해괴한 표정이 스쳤다. 그러나 누군가 미처 묻기도 전, 벼락처럼 문이 열렸다.

마른 바람을 몰아온 붉은 장발이 화려하게 휘날렸다. 낡은 망토가 바람 먹어 펄럭이고, 장화의 단단한 밑창이 대리석 바닥을 두드릴 때마다 사나운 소음이 울렸다. 우스꽝스럽게 입을 떡 벌린 추기경들을 스쳐 원탁의 세 번째 자리에 도착한 안드레아가 옆자리의 예후르를 확인하곤 표정을 구기며 털썩, 의자에 걸터앉았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추기경들 가운데 솔란지아가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서, 설마… 마가 공작 전하?”

대답 대신 짙은 눈썹을 한 차례 들썩인 안드레아가 떡하니 두 다리를 원탁 위에 올렸다. 장화 밑창에 들러붙은 더러운 오물이 적나라하게 보이자, 퀴테리아가 점잖게 말을 건넸다.

“전하. 원탁에 예의를 갖추십시오. 천 년 전 뱀을 봉인하셨던 여덟 사도께서 친히 후세로 전하신 성물입니다.”

그러자 안드레아는 보란 듯이 헛기침을 터트리며, 장화 밑창이 퀴테리아 쪽을 향하도록 다리를 옮겨 교차시켰다. 한동안 얼빠져 있던 보나벤투라가 그 무례한 장면에 다시 눈을 부라렸다. 노성이 터지려는 찰나에 클레멘스가 솜씨 좋게 끼어들었다.

“자자, 거짓된 사도란 오명을 쓰고 돌아가셨던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놀랍게도 살아 돌아오셨고, 교회의 탕아라 불리시던 마가 공작 전하께서도 원탁에 드셨으니 이처럼 좋은 날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자축하는 의미로 기쁨의 박수와 함께 회의를 시작하도록 합시다.”

짝짝짝. 혼자만의 박수 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그러나 수치심이란 감정을 엄마 배 속에 남겨 두고 온 사람처럼 클레멘스는 몹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돌아오셨으니 소명의 천사 예리엘의 사도가 둘이 됩니다. 전례가 없는 일이지요. 아, 물론 전례가 없다 하여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습니다만, 일단은 두 분께서 모두 진정한 사도로서의 권능을 지니고 계신지 확인을 해야….”

“잠깐, 잠깐만요, 클레멘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확인을 하다니요?”

솔란지아가 원탁을 작게 두드리며 나섰다. 클레멘스가 의아하게 반문했다.

“그럼 확인을 안 합니까? 성 예리엘 대성당의 성화가 꺼졌을 때, 전례가 없는 일이라 하여 다들 카타리나 공작 전하를 시험에 부쳐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요?”

“지금은 그때와 다르지요!”

“어째서요?”

“사도의 권능을 상징하는 대성당의 성화가 버젓이 타오르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알비야 공작 전하께서 성흔을 받으시는 걸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설마 입 모아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단 겁니까?!”

“하지만 방금 전 별궁에서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 사도의 권능이 있음을 모두들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셨습니까?”

클레멘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림자를 가리켰다. 솔란지아는 앓는 소리를 냈다. 진실의 창이 의미하는 야누비타 1세의 일화를 그녀라고 모를 리 없었다.

“날개란 천사와 권능의 상징입니다. 천사께서 날개 달린 새의 몸에만 깃드신다 하여 성도에선 새 사냥까지 금지하고 있지요. 인간의 그림자가 인간이고 뱀의 그림자가 뱀인 것처럼, 사도의 그림자에 날개가 매달린 것 또한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리 단언하실 일만도 아닙니다.”

퀴테리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진실의 창, 날개를 편 그림자. 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

“망자의 부활.”

모두들 불편한 기색으로 시선을 피했다. 퀴테리아는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현실적으로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교회 역사상 가장 강력한 사도이자, 뱀을 봉인하셨던 천 년 전의 사도 야누비타 1세도 불가능하셨던 일입니다. 하물며 불도 제대로 피우지 못했던 사도가 부활이라니요.”

“…….”

“기적에도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망자의 부활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적이라면 더더욱 그렇지요. 인류사를 통틀어 전례 없던 일이 벌어졌다면 마땅히 그 사건의 진위부터 파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정체가 의심스럽기라도 하단 소리예요?”

글리체리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퀴테리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의심스럽습니다. 정확히는 그분이 진정 4년 전에 돌아가셨던 카타리나 공작 전하이신지도 의문스럽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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