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5화 (205/328)

“퀴테리아 추기경,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교회에는 뱀에 대한 기록이 전무합니다. 까마득한 오래전부터 천사와 사도의 적이었다 하니, 그 강대함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요.”

모두들 아연실색한 가운데, 퀴테리아가 예후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엘피도 공작 전하. 4년 전에 뱀을 죽이신 것이 확실합니까?”

“퀴테리아! 그만하십시오! 그 이상의 억측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글리체리아가 비명처럼 소리를 내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니 퀴테리아는 요지부동이었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마귀에게 빼앗겼던 성검을 지니고 돌아오신 점, 어느 순간부터 마귀의 출몰이 사라졌다는 점을 들어 전하께서 뱀을 죽이셨다는 것이 거의 기정사실화되었지요. 전하께서 그러한 사실에 반박하신 적은 없으나, 당신께서 뱀을 죽이셨다고 인정하신 적 또한 없습니다.”

“그래서요! 설마하니 살아 돌아오신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뱀이라는 억측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어찌하여 억측입니까? 죽은 사람이 갑자기 살아 돌아왔다는 것을 액면 그대로 믿기보단, 죽었다던 뱀이 실은 죽지 않아 거짓된 사도로 분하여 나타났다는 것이 한결 믿음직스럽지 않나요?”

“맙소사, 퀴테리아!”

“죽였습니다.”

느릿한 저음이 논쟁의 핵심을 꿰뚫었다. 모두의 이목이 예후르에게로 쏠렸다.

“4년 전, 내 손으로 직접 뱀을 죽였습니다.”

읊조리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 한 자락 걸려 있지 않았다. 온기가 사라진 눈빛에는 고온에 벼린 칼날 같은 노여움이 깃들어 있었다.

자연스레 원탁에는 공허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원탁에 둘러앉은 모두가 열 살은 더 먹은 것 같은 얼굴로 하염없이 한숨만을 몰아쉬었다. 난생처음 원탁에 앉아 잠자코 돌아가는 꼴을 지켜보던 안드레아만이 의아할 뿐이었다.

“이게… 이렇게 말이 길어질 일인가?”

얼굴을 감싸 쥐며 고뇌하던 추기경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안드레아는 안 그래도 무서운 인상을 한층 더 무섭게 구기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요는 이거잖아. 한쪽은 페기의 정체부터 밝히자는 거고, 다른 한쪽은 페기랑 알비야 공작인지 뭔지랑 같이 시험에 부쳐서 누가 진정한 사도인지 가려내자는 거고.”

“…….”

“그럼 간단하네. 원탁은 무조건 다수결이라며. 안 그래도 요상한 냄새가 진동해서 짜증 나 죽겠는데, 시간 낭비할 것 없이 투표하자고요, 이만.”

솔란지아가 고개를 틀어 냉소적인 헛웃음을 지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람베르토는 다시 눈을 감았으며, 보나벤투라는 씨근덕거리는 숨을 간신히 참았다.

영 미지근한 반응에 안드레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원탁에 올려 두었던 발로 쿵쿵, 원탁을 두드렸다.

“내 말이 맘에 안 들면 얘기를 하시든가!”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들으십니까?”

결국에 분을 참지 못한 보나벤투라가 드르륵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섰다. 한 발 떨어져서 상황을 관망하던 클레멘스가 보나벤투라의 두 눈에 일렁이는 기묘한 열기를 발견하곤 작게 탄식했다.

“아이고, 이것 참. 보나벤투라가 또 일을 치게 생겼군.”

“말로 못 알아들으면 뭐, 내가 댁 방귀 뀌는 소리로 알아들을까?”

아니나 다를까, 안드레아가 낄낄거리는 소리에 보나벤투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게 사도가 되어 하실 말씀입니까! 어찌 원탁에서도 이리 무례하고 천박할 수가…!”

“아, 거, 되게 시끄럽네. 내가 무례한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긴 한데, 내가 천박한 거면 아저씨는 뭐가 되나? 응? 앞장서서 페기를 죽이자고 했던 게 너지?”

안드레아의 입술이 사납게 찢어졌다. 원탁에 한쪽 무릎을 대고 일어난 그녀가 몸을 낮게 숙이며 위협적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이봐요, 아저씨. 마음 좀 곱게 먹읍시다. 네? 사람이 살면서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지, 뭐. 근데 타고나길 착하거나, 아님 못돼 먹은 걸 상쇄할 만큼의 머리가 있으면 겸손하게 자기 실수도 인정하고 그러는 거거든. 그런데 아저씨는 둘 다 아닌 것 같아서 좀 무섭잖아. 안 그래?”

“대체 뭐, 뭐가 무섭다는 겁니까!”

“뭐가 무섭긴….”

안드레아의 시퍼런 눈이 번뜩였다.

“내가 널 죽여 버릴까 봐 무섭지!”

짐승처럼 단숨에 원탁 위로 튀어 오른 안드레아가 보나벤투라의 멱살을 잡고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다른 추기경들이 깜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짧은 엎치락뒤치락 끝에 손쉽게 보나벤투라를 깔고 앉은 안드레아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주먹을 치켜올렸다.

퍽!

“야 이 새끼야, 내 마지막 소원이 너 뒤지게 패는 거였어! 알아?!”

“마, 마가 공작 전하!”

“이 씹새끼가 어디서 페기를 건드려! 걔가 너 때문에 이게 무슨 개고생이냐, 어?!”

“맙소사! 당장 근위대를 불러요! 어서!”

퍽퍽! 안드레아의 주먹이 사정없이 보나벤투라의 얼굴을 짓뭉갰다. 만류하려던 다른 추기경들조차 사방으로 튀는 피에 기겁하여 시끄럽게 소리만 빽빽 내질렀다. 상상을 초월한 광경에 그 퀴테리아마저 할 말을 잃었다.

놀란 새처럼 퍼드덕거리던 솔란지아가 황망히 예후르를 돌아보았다.

“전하! 저러다 보나벤투라 추기경 죽겠습니다!”

“나한테 그러지 마요. 쟤는 내 말도 안 통하니까.”

예후르가 고상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난장판이 된 회의실. 오직 클레멘스만이 천 년 전의 귀한 성물인 원탁을 염려하여, 원탁에 찍힌 안드레아의 발자국을 닦고 또 닦았다.

페기는 마샤와 함께 출입이 통제된 방 안에 머물러 있었다. 오히려 저보다 긴장한 마샤를 어르며 원탁회의의 결과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렸다.

“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알비야 공작 전하!”

근위대원의 만류까지 뿌리친 비올라가 저벅저벅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자못 흉흉한 기세에 마샤가 슬그머니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

비올라가 억눌린 목소리로 경고했다. 마샤가 오들오들 떨면서도 움직이지 않자, 일순 비올라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악!”

비올라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마샤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화들짝 놀란 페기가 달려나와 마샤를 감싸 안으려 했다.

“네까짓 게 감히!”

악착같이 마샤의 머리채를 움켜쥔 비올라가 있는 힘껏 마샤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산발이 되어 바닥을 나뒹군 마샤가 충격으로 손발을 덜덜 떨며 흐느꼈다. 비올라는 마샤에게 가려는 페기의 옷깃을 잡아 무작정 돌려세운 뒤, 그녀의 뺨부터 올려붙였다.

찰싹!

페기의 얼굴이 모로 돌아갔다. 비올라는 그에 그치지 않고, 반대쪽 뺨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순식간에 페기의 양 뺨이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네까짓 게 감히 날 우롱해?!”

비올라가 일그러진 얼굴로 악을 질렀다. 분을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손바닥을 올리는데, 이번에는 페기가 그녀의 손목을 턱 붙잡았다. 흠칫한 비올라가 손목을 빼내려 했지만 페기의 손아귀는 끄떡도 안 했다.

“너… 어제 그 여자 맞지.”

잡힌 손목을 신경질적으로 흔들며 비올라가 볼품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맞잖아. 어제 미레 강변. 기억 안 나?”

“…….”

“뚫린 게 입이라면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고! 내가 누군지 알았지? 그런데도 감히 이딴 짓을 벌여?!”

비올라가 다시 악을 쓰려던 순간이었다. 페기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순순히 맞아 준 건 그래서였어. 내가 생각해도 오해의 소지가 있었으니까.”

“뭐, 오해?”

“하지만 마샤는 아니지.”

페기가 단단한 구두코로 비올라의 무릎을 걷어찼다. 비올라가 ‘악!’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미련 없이 그녀의 손목을 풀어 준 페기가 마샤에게로 다가갔다. 아직도 파들파들 떨고 있는 마샤를 얼러 고개를 들게 하자, 뺨을 긁은 세 갈래의 흉측한 손톱자국이 보였다.

페기는 손수건으로 조심스레 마샤의 뺨을 감싼 뒤, 그녀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마샤를 데리고 방을 나가려는데, 아픈 무릎을 부여잡고 꾸역꾸역 고통을 삼키던 비올라가 끈질기게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내가 진짜야!”

페기의 걸음이 멈추었다. 비올라는 증오스러운 눈으로 그녀의 뒷등을 노려보았다.

“죽었으면 그냥 끝까지 죽어 있었어야지, 뭐가 아쉽고 억울해서 이제야 살아난 건데! 네가 이런다고 뭐가 바뀔 것 같아? 네가 진짜가 될 수 있을 것 같냐고! 진짜는 나야! 내가 천사의 성흔을 받은 사도고, 내가 이 썩어 빠진 교회를 구원할 진짜라고!”

안간힘을 다해 쥐어짜 내는 목소리에 종래에는 쇳내까지 났다. 비올라는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틀어쥐었다. 억울함, 수치심, 치욕.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눈시울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때, 페기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비올라는 근처의 촛대로 손을 뻗는 페기의 뒷모습을 그저 의심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치맛자락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허벅지에 고정해 둔 단검을 몰래 움켜쥐었다.

그러나 페기의 빈손에서 불꽃이 올라온 순간, 정수리가 쪼개지는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비올라는 타오르는 불꽃을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 페기의 손끝에 매달려 있던 영롱한 불꽃이 양초의 심지로 옮겨 가고 있었다. 거두어지는 손에는 성냥이나 부싯돌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다.

흘끗 뒤돌아본 페기가 희롱하듯 눈웃음을 살짝 지었다.

그녀는 마샤를 데리고 유유히 방을 빠져나갔다. 모든 기력을 잃은 듯한 모습으로 비올라가 털썩, 맥없이 주저앉았다.

***

원탁회의는 이보다 더 최악일 수 없는 방식으로 막을 내렸다.

피떡이 된 보나벤투라는 실신하여 그대로 청백회 간부들에게 들려 나갔고, 퀴테리아가 굳은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솔란지아를 비롯한 추기경들은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듯한 모습으로 저벅저벅 회의장을 걸어 나갔다.

오직 안드레아만이 거뜬하게 몸을 푼 사냥꾼처럼 후련한 기색이었다. 그녀는 질린 얼굴로 설설 자신을 피하는 다른 추기경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어깨를 한 바퀴 크게 돌렸다. 뚝, 뚝, 들리는 뼈 소리가 못내 섬뜩했다.

“말로 안 통하는 새끼는 패야지. 거기다 대고 입이나 나불대고 있으니 일이 풀려?”

예후르는 한숨을 지으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도리어 안드레아가 얌전히 자리만 지키다 떠났다면, 그것이 더욱 경악스러운 일이었으리라.

안드레아의 발자국이 남은 원탁이 걱정스러운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던 클레멘스가 불현듯 문턱을 넘다 말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

눈에 잘 띄지 않는 모퉁이 너머에서 페기와 마샤가 은밀히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뺨의 붓기를 가리고자 조심스레 분칠을 더하던 페기가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예후르와 안드레아도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놀란 기색을 수습한 페기가 태연하게 다가갔다.

“이제 끝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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