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0화 (220/328)

“전하, 말리셔야 합니다!”

보다 못한 클레멘스가 다급하게 외친 순간이었다.

거친 발 구름과 함께 용이 날렵하게 페기에게로 달려들었다.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경기장을 무너트릴 것처럼 진동했다. 하늘도 가를 듯한 날카로운 발톱이 허공을 할퀴며 솟구치고, 맥없이 허물어진 그녀를 한입에 삼켜 버릴 것처럼 용의 아가리가 흉측하게 찢어진다.

그 찰나에 페기가 눈물 젖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멈춰.”

그녀의 코앞으로 닥쳐왔던 용의 아가리가 불현듯 정지했다. 수만 명의 귀청을 찢던 울음소리가 일시에 가시고, 용의 모든 움직임이 그쳤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던 온몸의 잔근육마저 덜컥 멈춘 채.

페기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급하게 몰아쉬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들썩이는 여윈 어깨 아래로 채 흐르지 못한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녀는 정처 없이 떨리는 손을 들어 엉망이 된 얼굴을 쓸고 닦았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몸이 가녀리다 못해 위태로웠다.

마침내 바로 선 페기가 용에게로 간신히 시선을 주었다.

용은 마치 석고를 뒤집어쓴 것처럼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턱뼈를 으스러트릴 듯이 벌어진 입이 경련하는 것처럼 떨려 오고, 힘이 잔뜩 들어간 온몸에서 고통을 수반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울부짖음을 멈춘 목은 아예 틀어막힌 것처럼 숨소리조차 없었다.

페기는 고개를 조금 더 들어 번들거리는 용의 눈알을 마주했다.

갓 알을 깨고 나온 어린 용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낯선 세상, 익숙지 않은 시야가 무서워 아직 채 자라지도 못한 근육을 혹사했던 것이다. 겁먹어 빙글빙글 돌아가는 초점이 가여워진 페기는 손을 들어 용의 비늘을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용이 흠칫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숨 쉬렴.”

기다렸다는 듯 용이 다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페기는 용의 호흡이 정상적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고개 숙이고.”

용의 고개가 쑥 내려갔다.

“나를 경배해.”

반쯤 펼쳐졌던 날개가 접혔다. 용의 네 발이 굽혀지며 움직임을 제한하던 쇠사슬이 철커덩 땅으로 떨어지고, 흉측한 이빨을 내보이던 아가리가 겸손하게 다물렸다. 마지막으로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오자, 살기등등하던 눈알이 모습을 감추었다.

장내에는 경악에 찬 침묵만이 흘렀다.

지금 인간의 발치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저것이 진정 용인가.

하늘도 꿰뚫는다던 날카로운 발톱은 어디 갔나. 단단한 쇠붙이도 단숨에 아작 낸다는 이빨은 어찌 무용지물이 되었나. 지금껏 보고 들은 것이 맞다면, 여자는 단지 말 몇 마디로 저 무시무시한 용을 복종시킨 것이다.

“맙소사….”

곳곳에서 아연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한낱 인간 따위가 어찌 저런 기적을 행할 수 있을까. 사도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부활하신 사도께서 만천하에 자신의 권능을 증명하셨음이니.

홀린 것처럼 경기장을 굽어보던 사람들이 차츰 끔찍한 전율에 몸서리치기 시작했다. 한때 그녀에게 돌을 던졌다는 죄악감, 불과 조금 전까지도 의혹을 거두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그럼에도 기적을 맞이한다는 고양감….

더는 그녀의 정체를 의심함으로써 자신들의 과오를 지울 수가 없었다. 카니나의 페기는 스스로를 입증해 냈다. 용을 복종시켜 과거 자신에게 돌을 던졌던 성도의 시민들을 무릎 꿇린 것이다.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을 뚫고 박수 소리가 무겁게 번져 나갔다. 너 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들지 못하는 가운데, 4년 전을 모르는 아이들만이 마냥 행복하게 손을 흔들었다. 페기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제게로 쏟아지는 참회의 갈채를 들었다.

한때 악에 받쳐 저주를 퍼붓던 사람들이 제게 굴복하는 광경은 참으로 묘했다. 그러나 더욱 묘한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더는 저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대도 없다고 여겼건만, 이상하게도 나약한 가슴이 조금씩 벅차오르고 있었다.

페기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하루도 그녀를 떠나지 않았던 저주의 목소리가 비로소 사라지고 있었다. 이젠 숱하게 찾아오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름다운 꽃들이 함박눈처럼 떨어지고, 갈채는 그치질 않았다.

페기는 마침내 제자리로 돌아온 것을 실감했다.

페기의 성공으로 성 프리울리 경기장은 거의 광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죽음에서 돌아온 사도가 자신의 권능까지 증명하였으니, 이는 전례 없이 위대한 기적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역사상 교회가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는 시점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오직 청백회만은 야심한 밤처럼 음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주위는 온통 축제인데 그들만은 장례를 치르는 듯했다.

다시 서쪽 문으로 들어가는 페기를 향해 마지막까지 눈물 어린 환호를 보내던 사람들은 뒤늦게야 첫 번째 시험이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동시대에 한 천사의 사도는 단 한 명. 카니나의 페기가 진짜 사도라면, 위스누아의 비올라는 거짓 사도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청백회를 힐끔대는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히듯 곳곳에 배치된 근위대원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는 사람들을 제지하고 다녔다. 소심한 반항도 근위대가 집어 드는 날카로운 창살에 금방 맥이 꺾였다. 장내가 떠나갈 것처럼 소란스럽던 사위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경기장이 어느 정도 차분한 분위기를 되찾자, 군악대가 다시금 나팔을 길게 불었다.

부우우!

굳게 닫혔던 서쪽 문이 서서히 열렸다.

둔중한 쇳소리와 함께 문이 완전히 열리고도 경기장은 한참이나 고요했다. 나오는 사람이 없자 관객들은 인기척 없는 서쪽 문을 힐끔대며 저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기야 알비야 공작이라고 경기장이 떠나갈 듯 울렸던 환호성을 듣지 못했을 리 없다. 이제 그녀 앞에 놓인 것은 예견된 실패의 길이었다.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패자로 낙인찍히는 것이 어디 쉬울까.

좀처럼 비올라가 경기장으로 나오지 않자, 고위 성직자와 귀족들이 모인 특등석의 분위기는 자연스레 심각해졌다. 짐짓 근엄한 체하며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넌지시 퀴테리아를 훔쳐보는 시선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클레멘스가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을 흘렸다.

“누구라도 아래 내려가 봐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말을 기점으로 만인의 시선이 퀴테리아에게로 쏠렸다. 모두가 눈빛으로 그녀를 떠밀고 있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가만히 경기장만 내려다보던 퀴테리아가 그제야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경기장에 모인 수만 명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다.

그때, 서쪽 문에서 누군가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어?’ 하는 반문과 함께 관객들의 시선이 이리저리 분산되기 시작했다. 퀴테리아를 주시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갑자기 번져 오는 술렁거림에 한참을 의아해할 뿐이었다. 먼 관객석에서 보기에 경기장을 가로지르는 비올라는 가느다란 성냥개비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작은 존재감에 겨우 시선이 집중된 것은 그녀가 경기장 한복판에 이른 뒤였다.

멀리서 보기에도 비올라는 몹시 아슬아슬해 보였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나아가는 걸음걸이도 그렇거니와, 볕을 허옇게 머금은 안색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선선한 가을 날씨에 팔을 시원하게 드러낸 여름 옷차림마저 기이했다.

비올라는 자꾸만 바람결에 날리는 검은 머리칼을 어깨 너머로 넘기며 초조하게 동쪽 문을 응시했다. 계절에 걸맞지 않은 얇은 옷차림에 덜덜 떨고 있으면서도 그녀의 피부에선 지나치게 윤이 났다.

식은땀이라도 흘리나.

예후르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확실히 비올라는 어딘가 이상했다.

끼이익!

쇠창살 박힌 동쪽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등장했던 아까와 달리, 용은 채 열리지 않은 문틈으로 앞발부터 쑤셔 넣었다. 조금 전 용이 난동 부리는 장면을 목격했던 관객들의 반응은 다소 미지근했으나, 생전 용을 처음 보는 비올라는 그럴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리는 낯빛이 멀리서도 훤했다.

용은 나무줄기처럼 두꺼운 쇠창살을 엉망으로 만들며 기세등등하게 튀어나왔다. 기다란 목을 털며 몸을 유연하게 뒤트는 모습이 첫 등장처럼 흉포하진 않았으나, 페기 앞에서처럼 마냥 유순하지도 않았다. 공포에서 벗어난 용은 도리어 늠름해 보일 지경이었다.

여전히 날개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쇠사슬을 짜증스럽게 흔들던 용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비올라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이 빤히 그녀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장난감처럼 갖고 놀던 쇠사슬을 내팽개치곤 쿵쿵거리며 비올라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비올라는 석상처럼 미동 없이 서 있었다. 용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부터 머릿속이 하얘진 듯했다. 관객들은 숨죽이고 점차 가까워지는 용과 비올라를 지켜보았다. 써늘하게 흐르는 정적 사이로 꿀꺽 마른침 삼키는 소리만이 작게 울려 왔다.

마침내 지척으로 다가온 용이 목을 길게 빼내어 비올라의 코앞으로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비올라는 거의 혼절할 지경으로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용은 무엇이 그리도 궁금한지 자꾸만 코를 킁킁거리며 비올라의 주위를 맴돌았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라기보단, 신기한 물건을 발견한 아이 같은 행동이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킁킁거리던 용이 별안간 주둥이를 쩍 벌렸다. 관객석 곳곳에서 새된 비명 소리가 솟구쳤다. 그러나 용은 날 선 이빨을 들이대는 대신, 긴 혓바닥을 내어 비올라의 얼굴을 느릿하게 핥아 내렸다.

기막힌 광경이었다.

지레 겁먹어 눈을 가렸던 사람들조차 금세 어안이 벙벙해졌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야생 짐승들 중에 가장 길들이기 까다롭다는 용이 아닌가.

그런데 비올라의 얼굴을 핥고도 연신 고개만 갸웃거리던 용이 갑자기 켁켁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격한 기침이 터지고 만취한 사람처럼 발이 자꾸 엇갈렸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초점을 다잡지 못하고 연신 휘청거리던 용이 결국은 철퍼덕 쓰러지고 말았다.

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대로 기절한 용은 미동이 없고, 잔뜩 얼어붙어 있던 비올라는 힘이 풀린 다리를 어쩌지 못하고 볼품없이 주저앉았다. 용의 침이 끈적끈적하게 묻은 얼굴이 꼭 넋 나간 것처럼 시허옜다. 관객들은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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