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6화 (226/328)

상상만으로도 골치 아픈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예후르는 말없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태도에 다른 사람들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오직 페기만이 그의 모습에서 꺼림칙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난 클레멘스 추기경의 의견에 동의해.”

보다 못한 페기가 용기 내어 말문을 열었다.

“마지막 시험에서 내가 진정한 사도임을 입증해도 청백회는 한순간에 무너지지 않을 거야. 아마도 내가 간악한 술수를 사용했다는 식으로 사실을 왜곡하여 받아들이겠지. 결국에 충돌을 피할 수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청백회의 세력을 깎아 놓아야 해.”

절벽으로 몰린 사람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만약 그것이 청백회처럼 막무가내인 세력이라면 그 정도는 더할 것이었다. 더 이상 정상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도모할 수 없어진다면 무력으로 들고 일어날 가능성도 충분했다.

“퀴테리아 추기경은 근위대와 치안대를 손아귀에 넣고 있어. 게다가 청백회 단원들은 폭력을 사용하길 주저하질 않지. 우리에게도 경비대와 만일을 대비한 용 기병대가 있지만, 성도를 완전히 부술 각오가 없다면 사실상 용은 무용지물이야.”

“…….”

“근위대와 경비대. 너는 승리를 장담할 수 있겠어?”

페기는 심려하는 눈으로 예후르를 바라보았다. 그가 모를 리 없는 사실을 짚어 주면서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이 증폭되는 불안감을 감지했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때로는 버티기가 더욱 어려운 법.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클레멘스가 페기의 말을 두둔하고 나섰다. 예후르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페기, 네 의견이 그렇다면 따라야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나머지 사람들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완고해 보이던 그가 이토록 쉽게 꺾이다니.

하지만 페기만은 웃을 수가 없었다.

“결정은 네 몫이야, 페기.”

페기는 재차 그에게서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제야 마음이 통한다고 생각했던 그가 다시금 훌쩍 멀어진 기분이었다.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저희는 수동적으로 청백회의 공격을 방어하기 급급했지요. 제대로 공격을 가할 것이라면 이 기회에 노선을 확실히 정해 두어야 합니다. 단순히 청백회를 무너트리는 것만이 목표라면 반청백회 노선으로 충분하겠지만, 청백회를 무너트린 이후의 정국도 염두에 두어야 하니까요.”

“클레멘스 추기경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참에 전하께서 교황이 되셔서 새로이 일구어 나가실 교국이 어떤 모습일지 알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페기. 네 생각은 어떠니?”

이번에도.

페기는 저 질문을 자신에게 돌리는 예후르의 심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그리는 교국이 어떤 모습인지 그녀는 들은 바가 전혀 없었기에.

그녀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좌중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시도르나 글리체리아는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으나, 클레멘스는 달랐다. 그는 페기와 예후르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기류를 읽은 것처럼 스르르 눈을 굴렸다. 그러자 페기는 문득 몹시도 다급해졌다.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에요.”

일단 내뱉고 나자, 이목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페기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 성하께서 건재하세요. 성하께서 후계자로 직접 예후르를 지명하셨다면 모를까, 아직 후계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런 발언을 했다간 성하는 물론이고 성도의 시민들에게도 좋지 않은 인상만 줄 거예요. 다들 아시잖아요. 성도의 시민들이 교황 성하를 얼마나 경외하는지.”

그럴듯한 의견에 이시도르가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던 클레멘스가 넌지시 물어 왔다.

“그럼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선 저희가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고 보십니까?”

“…질문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요.”

페기는 좌중을 한 차례 돌아보았다.

“청백회의 명분으로 개혁이란 말이 가당키나 하다고 보나요?”

청백회의 전신은 한낱 수도사였던 퀴테리아가 시작한 청백 운동.

그때나 지금이나 퀴테리아가 주장하는 것은 교회의 썩은 폐단을 잘라 내고 새로이 개혁의 물결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변화를 거부하는 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지쳐 떠나갔던 젊은이들은 퀴테리아가 일으킨 바람에 이끌려 교회로 돌아왔고, 그들이 바로 작금 청백회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퀴테리아가 말하는 것이 진정 개혁이 맞던가.

“퀴테리아 추기경은 꾸준히 천계율과 경전을 따를 것을 주장하고 있어요. 정석적인 말이지만 문제는 그녀의 해석에 있죠. 천계율은 천 년 전의 사도 로살레다께서 집필하셨던 내용을 뼈대로 하며, 수많은 경전들 역시 수백 년도 더 전에 쓰인 것들이에요.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은 여러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의 토론을 통해 새로운 기준을 정립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퀴테리아 추기경은 그마저 완벽한 질서라며 무조건 따를 것을 종용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상업을 바라보는 청백회의 시선이 있을 것이다.

천계율에는 ‘배곯는 이웃에게 베풀라’는 말이 있고, 경전인 로살레다서에는 ‘욕심은 끝이 없어 사람을 타락시키므로 늘 마음속의 욕심이 자라지 않도록 경계하라’, ‘욕심 중에 최악의 욕심은 재물을 탐하는 마음이다. 많이 가질수록 많이 내려놓고, 얻은 것의 곱절을 내어 주라’는 구절이 있다.

청백회는 이 세 구절을 근거로 수년째 성도의 상인들을 핍박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평균 시가보다 웃돈을 조금 더 쳐서 받았다며 어떤 상인을 몽둥이로 후드려 팬 경우도 있었다. 자경단을 자처하여 시가지마다 눈을 부라리며 돌아다니는 청백회는 대부분 그런 자들이었다.

퀴테리아의 출신이 중계 무역으로 악명 높은 위스누아임을 상기하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청백회의 단원들은 퀴테리아가 오직 대의를 위해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들마저 저버렸다고 칭송하지만, 수많은 청백회 단원들을 먹여 살리는 그녀의 주머니가 어디서 채워지는 것인지 아는 사람들에겐 그저 희극의 한 장면일 뿐이었다.

“퀴테리아는 지나치게 원리주의적인 인물이에요.”

퀴테리아가 그리고 있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녀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은 미래가 아니었다.

“한낱 천 년 전의 글귀에 얽매여 세상을 짜 맞추려 하는 지도자는 이 교회에 필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어요. 그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집이고 기만입니다. 퀴테리아가 벌이려는 짓은 개혁이 아니라 과거로의 회귀예요.”

사람들은 모두 앞을 보는데 지도자만이 뒤를 가리키고 있다면, 그 얼마나 비극적인 일일까.

페기는 레오폴트가 목숨을 깎아 가며 간신히 재건한 교회가 개혁을 빙자한 협잡꾼들의 손에 놀아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는 그녀가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여로임과 동시에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교회를 구하기 위한 발버둥이기도 했다.

“카타리나 공작의 말이 옳습니다.”

예후르가 따뜻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제로 퀴테리아는 극단적인 우파입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처럼, 그녀의 극단적인 행보가 급진적인 개혁가로 비춰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좌우지간 교회의 병폐가 심한 것은 맞으니까요.”

나날이 벽이 높아지는 중앙 교회는 흡사 고인 물처럼 썩어 갔고, 큰 포부를 안고 서원했던 젊은 성직자들은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여 떠나갔다.

그때 개혁을 부르짖으며 나타난 것이 바로 퀴테리아였다.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퀴테리아는 아주 영특한 사람입니다. 개혁이란 명분을 가장 먼저 선점한 것만 보아도 그렇지요. 덕분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개혁가로 인식하고 있지 않습니까?”

청백회는 죄 없는 상인들을 괴롭히기도 하지만 원리주의적인 방향대로 타락한 성직자들을 광장에 매달아 족치기도 했다. 불법적인 행동인 것과는 별개로 시민들은 그 광경에서 커다란 쾌감을 느꼈다. 청백회가 시민들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지금껏 성도에 발붙이고 지낼 수 있던 것은 한편으로 시민들의 그러한 이중적인 심리 탓이 컸다.

클레멘스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두 분 전하의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만, 한번 머릿속에 각인된 것은 잘 바뀌지 않습니다. 물밑 작업에 들어간다 해도 두어 달로는 부족할 텐데요.”

“…방법이 있습니다.”

불현듯 쉰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지금껏 말 한마디 없이 자리만 지키던 글리체리아였다.

“깨끗할수록 오점이 눈에 띄기 마련이지요. 청백회가 개혁 집단이라는 세간의 인식이 문제라면, 그들의 가장 치명적인 오점을 까발리면 됩니다.”

“…….”

“…….”

“이모님?”

글리체리아가 다시 침통하게 입을 다물자, 이시도르가 의아하게 그녀를 불렀다. 어두운 낯빛으로 연거푸 한숨만 내쉬던 글리체리아가 무겁게 운을 뗐다.

“보나벤투라 추기경 말입니다.”

페기는 그저 의아하게 눈만 깜박였다. 반면에 나머지 세 사람은 글리체리아의 의중을 이해한 것처럼 서서히 인상을 썼다.

“혹시 오르코, 그 아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클레멘스.”

“물론… 그 아이의 진실이 밝혀진다면 보나벤투라 추기경에겐 꽤나 타격이 크겠습니다만….”

클레멘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얌전히 상황을 지켜보던 페기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오르코가 누군가요?”

“아, 보나벤투라의 사생아입니다.”

“예?”

페기의 눈이 동그래졌다. 클레멘스가 픽 하고 건조한 웃음소리를 냈다.

“슬프게도 흔한 일이지요. 성직자가 자식을 보는 건.”

“그건 알지만 설마 보나벤투라 추기경까지….”

“아시다시피 원리 원칙을 대단히 중시하는 사람이지만, 뒤로는 그런 짓을 저질렀더군요. 무어, 본인은 불쌍한 고아를 데려다 길렀다고 주장합니다만, 닮아도 정도껏 닮았어야 말이지요.”

신랄하게 조롱한 클레멘스가 지나가듯이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오르코를 마지막으로 본 지도 제법 오래되었군요.

“하지만 오르코 건으로 청백회 전체에 타격을 주기는 무리입니다. 이미 어지간한 성직자들은 대강 눈치채고 있는 사안이기도 하거니와, 성직자들이 암암리에 자식을 보는 건 솔직히 말해 너무나도 흔한 일이니까요. 보나벤투라 한 명쯤이야 탄핵시킬 수 있겠지만, 그러면 무쇠처럼 고집불통인 야손이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올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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