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7화 (227/328)

“맙소사. 차라리 보나벤투라 추기경이 낫겠습니다.”

이시도르가 안색이 창백해져선 한탄했다. 클레멘스도 히죽거리며 동감하는데, 글리체리아가 여전히 침울하게 가라앉은 모습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르코뿐만이 아니에요.”

웃음소리가 멎었다.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연달아 얼굴만 쓸어내리던 글리체리아가 힘겹게 입술을 뗐다.

“만약에 보나벤투라 추기경이 한 수도사를 수십 년째 감금하여 강간하고 있다면 어떻습니까?”

멍하니 그녀를 응시하던 이시도르가 갑자기 사레들린 것처럼 격한 기침을 토해 냈다. 반응이 날카롭기는 클레멘스도 마찬가지였다.

“글리체리아,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보나벤투라가, 뭐요?”

글리체리아가 괴로운 듯이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페기는 황급히 따듯한 차를 따라 그녀에게로 내밀었다. 예후르도 눈치껏 말을 보탰다.

“침착하게 가라앉히고 마저 말씀하십시오, 글리체리아 추기경.”

곱슬거리는 그녀의 적갈색 머리칼이 파르르 떨려 왔다. 그렇게 한참이나 감정을 삭이던 글리체리아는 삽시간에 초췌해진 얼굴을 들어 간신히 차 한 모금을 넘겼다.

“오래전에 알고 지내던 수도사 한 명이 있었습니다. 같은 수도원에서 동고동락하며 친자매처럼 지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졌더군요. 뒤늦게 그녀의 방을 뒤져 보니 사내의 물건이 나와 순결의 의무를 저버리고 도망간 것이라고 결론이 났습니다.”

“…….”

“그렇게, 잊고 살았는데….”

글리체리아가 습한 숨을 들이켰다.

“며칠 전… 그러니까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첫 번째 시험을 치르시던 그날에 저택으로 돌아와 보니 집사가 누군가를 내쫓고 있었습니다. 꼭 빈민굴을 구르다 나온 사람처럼 더러운 행색의 여인이었지요. 씻기고 먹을 것을 쥐여 주고 내보내라 했는데, 갑자기 여인이 그러더군요. 피비를 기억하시냐고.”

“…….”

“피비…. 솔직히 잊고 지냈던 이름입니다. 그래서 그게 누구냐고 물으려는데 입술이 떨어지질 않더군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그 수도사의 이름이 피비였지, 하고.”

말끝에 울먹이는 소리가 묻어났다. 이시도르가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혹시 이모님을 찾아온 그 여인이 피비라는 수녀였나요?”

“아니, 아니다. 그 여인은 피비의 몸종이었지. 원래는 보나벤투라가 붙여 둔 하녀이자 감시역이었는데, 피비의 끔찍한 삶을 보다 못한 몸종이 자처하여 도움을 청하러 나온 것입니다. 보나벤투라 사택의 사용인들이 모두 카타리나 공작 전하와 알비야 공작의 대결을 구경 나갔던 그날에 아주 잠깐이요.”

글리체리아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엘피도 공작 전하. 보나벤투라는 20여 년 전 한 수도사를 납치하여 아들을 배게 하였으며, 그 이후로도 강간과 폭행을 일삼았던 악인입니다. 퀴테리아 추기경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방조하였고요.”

“…퀴테리아 추기경이?”

예후르의 눈썹이 움찔했다. 글리체리아는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종의 말로는 몇 년 전 사나운 인상의 사내가 찾아와 이것저것 캐물은 적이 있답니다. 사내는 이미 피비의 존재와 보나벤투라의 악행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더군요. 그때는 그 사내가 누군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야손이었답니다. 퀴테리아의 오른팔인 그 야손이요.”

“야손 그 작자가 하는 일을 퀴테리아 추기경이 모를 리 없습니다.”

이시도르가 드물게 사나운 목소리로 동조했다. 클레멘스도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어루만졌다.

“퀴테리아의 방조죄를 입증하긴 어려울 겁니다. 야손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청백회에 커다란 타격을 줄 수는 있겠지요.”

예후르가 느른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그 누구보다 원리 원칙을 중시하던 보나벤투라 추기경에게 실은 장성한 아들이 있었고, 심지어 그 어미 되는 여인은 서원한 수도사였다. 보나벤투라는 오래전 그녀를 납치 감금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악한 짓을 저질렀는데, 심지어는 퀴테리아 추기경마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소문이 돈다.”

“…….”

“이거면 충분합니다.”

죄를 입증할 수 있는 보나벤투라는 법적으로 고발한다. 반면에 입증이 어려운 퀴테리아는 소문으로 무너트린다.

아나클레토나 콘체사 추기경처럼 본디 더러운 소문을 달고 다니던 이들에겐 별다른 타격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나, 청렴결백을 으뜸으로 치던 퀴테리아에겐 무엇보다도 강력한 일격이 될 것이었다.

“성도의 민심은 완전히 퀴테리아를 떠날 것이며, 그녀가 줄곧 외쳤던 개혁의 기치도 빛이 바래겠지요. 그때 우리가 나서면 됩니다.”

청백회 또한 교회를 곪아 들게 하는 병폐의 일부분이었다.

거짓된 개혁을 주장하는 청백회를 몰아내자.

“어찌 되었든 지금의 교회에 개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청백회가 선점했던 개혁의 기치마저 우리가 뺏어 든다면, 이제 청백회가 믿을 건 불을 피우지 못하는 알비야 공작뿐일 겁니다.”

예후르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이시도르가 기민하게 말을 받았다.

“그만하면 청백회가 와해되진 않아도 이탈하는 세력이 제법 클 겁니다. 게다가 청백회가 마뜩잖지만 그들이 내건 개혁이란 명분에는 공감하던 사람들도 완전히 청백회에게서 등을 돌리겠지요. 저희는 그 세력을 모두 잡아먹어 덩치를 키울 테고요.”

“그 위태로운 시기에 마지막 시험이 열리겠군요.”

클레멘스가 페기를 돌아보았다. 페기는 저도 모르게 손을 꽉 움켜쥐었다.

작금의 퀴테리아의 위상은 사도이자 자매인 알비야 공작 비올라와 개혁을 주장하는 본인의 언변으로 쌓은 탑이었다. 말로 쌓은 탑은 말로 무너질 것이며, 마지막 일격은 페기가 만인이 보는 앞에서 맨손으로 불을 피워 올리면서 가해질 것이었다.

기력이 다한 사람처럼 이시도르가 소파에 너부러졌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참 좋을 텐데요.”

“일단은 오르코의 행방부터 찾아봐야겠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소냐 근방의 어떤 수도원에서….”

클레멘스가 진지하게 말을 늘어놓는 동안, 글리체리아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축해 주려는 이시도르의 손길도 마다한 채 그녀는 휘청휘청 테라스로 나갔다. 바람을 맞고 서는선 뒷모습이 어쩐지 죽어 가는 고목처럼 고단해 보였다.

페기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밟았다.

“글리체리아 추기경.”

테라스로 들어서며 말을 걸자, 멍하니 난간에 기대어 서 있던 글리체리아가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전하….”

“많이 힘들어 보이시길래 따라서 나와 봤어요.”

페기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글리체리아가 황급히 소매로 눈물 자국을 지웠다.

“송구합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끼쳐 드렸군요.”

“그런 말씀 마세요. 보나벤투라의 잘못이지, 그대의 잘못이 아닌 것을요.”

그러자 글리체리아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반쯤은 흰머리로 뒤덮인 적갈색 머리칼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페기는 문득 그녀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장장 4년 만임을 깨달았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과연 제게 보나벤투라를 단죄할 자격이 있는지.”

나지막이 읊조리는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 왔다. 지그시 입술을 감쳐문 글리체리아가 다시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저는 천사를 모시는 성직자로서 해서는 아니 될 짓을 저질렀습니다. 지금은 전하를 돕기 위해 이 자리에 있지만, 전하께서 제자리로 돌아가시는 날엔 반드시 저의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글리체리아 추기경.”

“저는 만고의 죄인입니다. 어떻게 진정한 사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런 끔찍한 죄를 범할 수가….”

글리체리아가 거의 통곡할 것처럼 등을 굽혔다. 페기는 그녀의 등에서 결국에 자신을 외면하고 돌아서던 4년 전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붙잡을 수 있었다.

“글리체리아. 나는 그대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지, 하지만….”

“그때는 상황이 그랬어요. 나를 의심하고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 잘 이해합니다.”

“그럼에도 저의 죄는 죄입니다. 전하를 사지로 밀어 넣고 어찌 용서를 바란단 말입니까.”

글리체리아가 눈물 젖은 얼굴로 매달려 왔다. 페기는 그녀의 양팔을 잡으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때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보다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욱 어렵습니다. 추기경께선 그 어려운 일을 해내신 거고요.”

앞장서서 그녀에게 죽음을 선언했던 보나벤투라는 그러지 못했다.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여 도리어 그녀를 악으로 규정하고 악착같이 그녀를 깎아내리려 했다.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날이 갈수록 극단적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샤를로망 프리울리께서 이르시길, 뉘우치는 자에게 빛이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만 스스로에게 선사한 어둠을 걷고 나오세요. 어찌 내리쬐는 빛을 외면하려고만 하십니까.”

페기는 진심을 담아 위로를 건넸다. 그녀가 자신을 갉아먹던 굴을 힘겹게 빠져나왔던 것처럼, 글리체리아도 더 이상 자학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멀거니 그녀를 올려다보던 글리체리아가 그제야 작게 탄식하며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창백하던 뺨 위로 마지막 참회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페기는 그녀의 굽은 등을 오래도록 토닥여 주었다.

***

날이 새로 밝았다.

평소와 다르게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성궁은 날이 선 바늘처럼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단단한 갑옷을 갖춰 입은 근위대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출입이 허가된 고위 성직자들의 무리만이 적막한 복도를 바쁘게 가로질렀다.

동서남북 성궁의 여러 입구로 들어온 성직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곳은 다름 아닌 성 나르세스 광장이었다.

호화롭게도 순백의 대리석을 깔아 만든 광장에는 여덟 대성당의 그림자가 겹쳐서 그려지고 있었다.

고위 성직자들은 그늘마다 삼삼오오 모여 중앙에 설치된 단 위를 힐끔거렸다. 나지막한 단상 위에는 교황 레오폴트가 앉아 있었고, 그 앞에 마련된 탁자에는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단상의 좌측을 지키던 근위대원이 길목을 막던 깃발을 들어 올렸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비올라가 단상 위로 올라와 상자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는 질끈 눈을 감고 손을 휘젓더니, 접힌 종이 하나를 뽑아 고드릭에게로 넘겼다.

고드릭이 종이를 펼쳤다.

“메아포소 지방으로 출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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