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5화 (245/328)

퀴테리아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재촉했다.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난 보나벤투라는 넋이 나간 모습으로 휘청휘청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문밖에서 기회만 엿보던 야손이 거대한 몸집을 구겨 문틈을 파고들었다.

“…예하.”

머리가 천장에 닿을 듯 크고 우람한 사내가 시뻘건 노여움으로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퀴테리아는 느긋하게 고개를 꺾어 벌게진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야손.”

“소, 송구하오나 밖에서 다 들었습니다. 그 버러지 같은 작자에게 기회를 주시겠다고요…?”

이를 악물며 분노를 씹어 삼키던 야손이 참다못해 노성을 내질렀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성직자에게 금지된 죄를 모조리 저지른 자입니다! 하룻밤 불장난으로 사생아를 낳았다는 첩보를 듣고 발가벗겨 광장에 걸어 둔 주교만도 스물이 넘는데, 어찌 저런 악독한 자는 용서하신단 말씀입니까!”

“…….”

“무슨 변명이라도 해 보십시오!”

목에 피가 맺히도록 내지르는 소리였다. 잠시 찡그리고 귓가를 매만지던 퀴테리아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중요한 때입니다. 당분간은 모르는 척하십시오.”

“예하!”

“보나벤투라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 청백회에게 비수로 돌아올 것을 어찌 이리도 모릅니까.”

“성직자로서의 본분보다 청백회가 중요하단 말씀입니까, 지금?!”

야손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싸늘한 무표정을 고수하던 퀴테리아가 그제야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띠었다.

“…내가 언제 그리 말했습니까?”

길길이 날뛰던 야손이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퀴테리아는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돌아가 앉았다.

“잠시나마 보나벤투라의 입을 봉하기 위하여 거짓 약속을 내건 것입니다. 그런 자를 용서하다니. 나를 그렇게 보았다면 실망입니다, 야손 수도사.”

“예…?”

야손이 맹하게 눈을 끔벅였다. 아래턱을 쓸어내리던 퀴테리아가 신중하게 입술을 열었다.

“곧 재판 날짜가 잡힐 겁니다.”

“…….”

“증인들이 성도의 문턱을 넘으면, 근위대와 함께 공격하여 증인들을 확보하십시오. 보나벤투라도 동행할 겁니다.”

“그자도요?”

“당연하죠. 증인들을 죽이는 건 그의 몫인데.”

야손이 움찔했다. 망설이는 기색이 얼굴에 모조리 드러났다.

“하지만 예하… 그 두 사람은….”

“압니다. 가련한 피해자들이지요.”

“…….”

“그러니 보나벤투라의 몫이라는 것 아닙니까.”

에피파나 수도사와 그 아들이 측은한 피해자임과는 별개로, 청백회의 입장에서 그들은 무조건 사라져야 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입을 통해 보나벤투라의 죄가 입증되는 순간, 그와 선을 그었든 긋지 않았든 청백회는 극심한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 보나벤투라 추기경께 살인죄가 하나 더 추가되겠군요.”

퀴테리아가 맑게 웃었다.

“납치, 감금에 강간… 거기에 살인까지. 그만하면 야손, 그대의 손으로 처단하는 죄인 중에선 가장 무게가 높을 것입니다.”

두 눈을 끔벅거리던 야손의 얼굴에 그제야 화색이 돌았다. 그는 순식간에 활짝 웃는 얼굴이 되어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맡겨만 주십시오! 그 쓰레기 같은 작자는 반드시 제 손으로 처리하겠습니다!”

퀴테리아는 흡족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들어올 때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가는 야손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그녀는 문이 닫히기 무섭게 표정을 싹 지웠다.

그녀의 손가락이 톡, 톡, 규칙적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마지막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교황은 최대한 시험 날짜를 미루고자 하겠지만, 엘피도 공작과 여론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었다. 어차피 성화를 지피는 것으로 마지막 시험 종목은 거의 확정된 상황이었다. 두 번째 시험처럼 시일을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구태여 날짜를 미루어야 한다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문제는 비올라가 여전히 불을 피우지 못한다는 것.

불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 사도가 아니라는 증명은 될 수 없으나, 만에 하나 상대가 불을 피우기라도 한다면 상황은 몹시 어려워진다.

청백회란 거대 단체를 책임지는 그녀의 입장으로선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대비해야만 했다. 군사를 일으키면 결국에 파멸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리하여 바스토뉴의 용병단과 추가 계약을 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대비는 대비일 뿐,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

가만히 책상을 두드리던 퀴테리아가 서랍에서 작은 상자를 끄집어냈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열쇠를 꺼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낡은 양피지 여러 장이 곱게 접혀 있었다.

최선은 마지막 시험이 열리지 않는 것.

즉, 마지막 시험이 열리기 전에 적의 세력을 무너트리는 것.

어느 날 비올라가 불을 피울지도 모른다는 헛된 망상에서 일찌감치 벗어난 퀴테리아는 오래전부터 엘피도 공작의 세력을 일거에 소탕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왔다. 실마리는 이미 주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곳을 파헤쳐 금맥을 찾기만 하면 되었다.

다행히 가문에서 힘을 써 주어 증인과 증언은 확보했다. 남은 것은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적의 세력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비기.

그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퀴테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비둘기 한 마리가 부리로 유리창을 콕콕 두드리고 있었다.

퀴테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유리창을 열어 비둘기의 다리에 매달려 있던 작은 쪽지를 빼내었다.

쪽지를 펼쳐 들자, 무미건조하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찾았다.”

***

열 명의 추기경들이 원탁에 둘러앉았다.

누군가 운을 떼기 무섭게, 교황 레오폴트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 모두 두 번째 시험에서 놀라운 모습을 보여 주었소.”

다른 추기경들은 침묵을 지키며 슬그머니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았다.

“먼저 위스누아의 비올라는 부족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비리를 파헤쳐 해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행정관을 체포해 왔으며, 카니나의 페기는 역병이 도는 마을에 용감하게 입성하여 뭇 교회에 경종을 울리는 발언을 했소.”

“…….”

“내 판단으로는 도저히 우열을 가를 수 없는 바, 나는 두 사람 모두 두 번째 시험에서 합격해야 함을 주장하겠소.”

놀랍지도 않은 언사였다.

예후르와 클레멘스가 평온한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오직 안드레아만이 똥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못하며 간절하게 레오폴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레오폴트는 고집스럽게 정면만을 응시할 뿐 의견을 굽힐 기세가 아니었다.

기다렸다는 듯 퀴테리아가 나섰다.

“성하의 고견에 동의합니다. 두 분 모두 훌륭하게 과제를 수행하셨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솔란지아가 못내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말을 얹었다. 그러자 콘체사 추기경과 람베르토 추기경도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던 예후르가 팔짱을 낀 채 피식거리며 웃었다.

“교황 성하를 비롯해 다섯 분이 같은 입장이시니, 제 의견은 필요하지 않겠군요.”

“…엘피도 공작.”

레오폴트가 가면 너머로 예후르를 노려보며 은근하게 압박해 왔다. 예후르는 개의치 않아 하며 다른 추기경들을 돌아보았다.

“시간 끌 것 없이 마지막 시험 이야기나 해 보죠. 신성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데 있어 맨손으로 성화를 피워 내는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성직자들과 시민들도 그 점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고요.”

“무조건적으로 여론을 따라간다면 원탁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솔란지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예후르는 고개를 틀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미 선례가 있습니다.”

일순 좌중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교회 역사를 통틀어 신성의 진위 여부를 확인했던 것은 4년 전 성 예리엘 대성당의 성화가 꺼진 것이 발단이 되었던 카타리나 공작 사건이 유일했다. 그녀가 되살아난 이상, 그 사건은 영원토록 원탁의 치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때도 맨손으로 성화를 지피는 방식으로 신성의 진위를 가르려 했었지요. 하지만 결국에 그날의 일로 돌아가셨던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그 말씀은 카타리나 공작을 진정한 사도로 인정한다는 뜻입니까?”

예후르가 장난스럽게 묻는 소리에 솔란지아가 곧장 표정을 굳혔다. 예후르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날의 일을 문제 삼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번에도 신성을 증명하는 방식은 같아야 한다는 소립니다.”

“…….”

“혹시 압니까. 둘 중 하나가 맨손으로 불을 피워 낼지.”

불을 피우지 못한다고 사도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맨손으로 불을 피워 낸다면 그자는 무조건 사도였다.

솔란지아는 목 안으로 앓는 소리를 내며 힐끗 퀴테리아를 바라보았다. 예후르의 주장에는 더 이상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불을 피우지 못할 가능성도 충분하거니와, 언젠가는 확인해야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생각에 이른 듯 퀴테리아가 곧 입술을 뗐다.

“동의합니다. 맨손으로 불을 피우는 것이야말로 사도가 지닌 권능의 상징. 마지막 시험으로 가장 걸맞은 종목이 될 것입니다.”

레오폴트가 침울한 기색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예후르는 모른 척 입을 열었다.

“그럼 이만 투표하도록 하죠.”

“열흘 뒤라….”

안드레아는 회의장을 나오며 찌뿌둥한 몸을 기지개했다.

“생각보다 빠른데? 쟤네가 엄청 반대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음… 그러게나 말입니다.”

클레멘스가 턱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설핏 좁혔다.

“최대한 미루자 할 줄 알고, 다음 달 신년제에는 무조건 천사 예리엘의 진정한 사도가 촛불을 붙여야 한다는 반박까지 다 준비해 왔는데 말이지요.”

“확실히 이상하긴 합니다. 청백회의 입장에선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글리체리아도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끼어들었다. 당연히 반대할 줄 알고 내놓았던 열흘 뒤란 날짜에 퀴테리아가 선뜻 찬성하고 나설 줄은 추호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상을 구기며 목을 긁적이던 안드레아가 슬쩍 예후르에게 붙어 왔다.

“야. 비올라인가 뭔가, 걔 못하는 거 확실해?”

예후르는 말없이 시선만 주었다. 반사적으로 표정을 찌푸린 안드레아가 최대한 소리 죽여 을렀다.

“불 못 피우는 거 확실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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