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에 죽은 뱀이 3년 전에 허물을 벗었다.
시민들은 제각기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한 표정으로 멀거니 단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싸늘한 적막만이 감도는 광장에는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퀴테리아는 그제야 단상의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압니다. 우리에겐 뱀을 죽인 영웅이 계시지요. 하지만 뱀은 죽지 않았으니, 죽이지도 않은 뱀을 죽였다며 영웅 행세를 하신 그분을 이제는 무어라 불러 드려야 할까요. 사기꾼? 협잡꾼? 아니면 거짓말쟁이?”
걸음이 멈추었다.
퀴테리아는 시민들을 돌아보았다.
“아니요.”
“…….”
“나는 그분을 교회를 병들게 한 악의 근원이라 칭하겠습니다.”
목이 졸린 것처럼 시민들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 갔다.
흐린 하늘을 잠시 올려다본 퀴테리아가 지그시 두 눈을 감으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이 자리를 빌려 나는 엘피도 공작, 수사의 예후르를 감히 뱀을 숭배한 배교자로 고발했음을 알립니다.”
“전하, 지금 밖에…!”
난데없이 막시모가 접견실로 난입했다. 자못 심각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페기와 예후르는 빠르게 시선을 주고받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클레멘스와 안드레아도 의아한 기색으로 그들을 뒤쫓았다.
저택 바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저, 저리 가지 못해!”
불청객의 등장을 알아차린 용들이 하나둘 내려앉은 언덕은 견딜 수 없는 폭풍에 휩싸여 있었다. 백색 갑옷을 갖춰 입은 근위대원들이 있는 힘껏 용들을 경계했으나, 그조차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 보일 뿐이었다.
“에, 엘피도 공작 전하! 당장 이 용들을 물리십시오! 전언을 들으셔야 합니다!”
흉흉하게 주둥이를 내미는 용을 향해 검을 뽑아 든 근위대원이 다급하게 외쳤다. 팔짱을 끼고 무료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예후르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코리.”
그러자 근위대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던 백룡이 마지못해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근위대원들은 검을 붙든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며 조심스럽게 예후르에게로 다가왔다.
“엘피도 공작 전하.”
허리를 숙여 예를 취하는 근위대원들 사이로 검은 수도복을 입은 수도사가 걸어 나왔다. 고개를 꼿꼿하게 세운 그의 눈에서 형언할 수 없는 광기가 흘러나왔다. 페기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병자처럼 창백한 얼굴로 물끄러미 예후르를 응시하던 수도사가 문득 가느다란 미소를 지어 올렸다.
“종교 재판소 소속 지오니토 이단 심문관입니다.”
설마.
페기는 화들짝 예후르를 돌아보았다. 예후르의 얼굴에서도 어느덧 표정이 싹 지워져 있었다.
“퀴테리아 추기경 예하께서 엘피도 공작 전하를 배교자로 고발하신 바, 증거의 합당성과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긴급 재판을 열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근위대원들이 예후르를 에워쌌다.
“부디 저항 없이 따라와 주시길.”
근위대원이 예후르의 몸에 손을 대려는 순간, 날개를 파들거리며 숨죽이고 있던 백룡 코른헤르트가 무시무시한 노성을 내질렀다. 예후르를 에워싸고 있던 근위대원들이 경악하여 용을 돌아보았다. 코른헤르트는 당장이라도 그들에게 달려들 것처럼 흉흉하게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그때, 예후르의 눈길이 용에게로 미끄러졌다.
차고 엄정한 시선이었다.
코른헤르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분노하여 콧김을 씩씩 내뿜던 다른 용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안드레아마저 당혹하여 입술만 벙긋대는 가운데, 예후르는 몸을 틀어 가만히 페기를 응시했다. 페기가 울음을 참으며 한 발짝 그에게 다가섰다.
“…예후르.”
페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슬며시 그의 옷깃을 쥐는 손이 덜덜 떨려 왔다. 예후르는 페기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내가 경고했던 것들 기억하지?”
페기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되도록 전서구는 이용하지 말라는 거.”
“그리고.”
“우리를… 지켜보는 비둘기가 있으니 조심할 것.”
예후르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앞머리를 장난스레 튕겼다.
“괜찮을 거야.”
“…….”
“너무 걱정하지 말고.”
페기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예후르는 저항 없이 근위대원들에게 양팔을 내어 주었다. 못내 꺼림칙한 기색으로 그의 양팔을 붙든 근위대원들이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코른헤르트가 구슬피 울었다.
보다 못한 안드레아가 페기의 팔을 잡고 거칠게 돌려세웠다.
“야, 지금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배교자라니?”
페기는 안드레아의 손길에 맥없이 흔들렸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클레멘스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마가 공작 전하.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도 충격을 받으신 듯하니 일단은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를….”
“안으로 들어가긴! 저 새끼 저대로 끌려가도록 내버려 두잔 소리예요, 지금?”
“아니, 그게 아니라….”
안드레아와 클레멘스가 옥신각신 다투는 사이, 페기는 안드레아의 손길을 뿌리치고 저택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숨이 차도록 계단을 뛰어올라 다다른 곳은 저택의 가장 꼭대기 방이었다.
페기는 비틀거리며 간신히 창문을 열어젖혔다. 거센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머리칼을 어지럽히는 가운데, 언덕 아래로 멀어지는 예후르의 뒷모습이 성냥개비처럼 작게 보였다.
문밖을 서성이던 막시모가 못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따라 들어왔다.
“…전하.”
페기는 시큰거리는 눈을 애써 깜박였다. 건조한 바람이 아프도록 살갗을 마구 할퀴어 왔다. 그녀는 목구멍을 덥히는 불덩이 같은 숨을 짓누르며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장미 수도회로 가세요.”
“하지만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반드시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곁을 지키라 엄명하셨….”
“계획은 이미 틀어졌어요.”
페기가 반쯤 돌아섰다. 역광을 받는 그녀의 전신이 어둑한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았다.
“당신이 직접 가요.”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조금 질린 기색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막시모가 머뭇머뭇 고개를 숙여 복종의 뜻을 표했다.
멀어지는 그의 발소리를 들으며 페기는 다시금 창밖을 내다보았다. 예후르의 뒷모습은 이미 손톱보다도 작아져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이를 사리물었다. 이제 그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그녀 자신뿐이었다.
그러니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페기는 흐린 하늘을 꿋꿋이 올려다보았다.
떠나간 주인을 목 놓아 부르짖는 용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14
녹슬어 가던 종교 재판소의 문이 열렸다.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들어온 사람들이 제각기 불안과 호기심을 안고 자리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열렸던 종교 재판마저 햇수로 10년을 넘긴 시점이었다. 교황 레오폴트가 일반 시민들의 종교 재판을 금지한 뒤로 속절없이 쇠퇴의 길을 걷던 이단 심문관들은 요 몇 년간 청백회로 흡수되어 불법적인 자경단 행세를 해 왔는데, 그 영향력이 제법 지대했다. 자경단에 밀린 종교 재판소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나앉는 듯했다.
그런 와중에 잡힌 대어가 엘피도 공작이었다.
대어도 그런 대어가 없었다. 사람들은 혹여 종교 재판소가 엘피도 공작을 밟고 올라 예전의 위상을 되찾을까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근거 없는 비약도 아니었다. 엘피도 공작이 무너진다면 차후 교회의 실권을 잡을 세력은 퀴테리아 추기경을 비롯한 청백회. 광신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주장을 내세우는 그들이 종교 재판을 부활시킬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이치였다.
그러니 당면한 문제는 고발당한 엘피도 공작의 죄목이었다.
“떠도는 소문이 맞을까? 엘피도 공작이 뱀 숭배자라는….”
“입조심하게.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하지만 우리 아들이 광장에서 직접 뱀의 허물을 봤다는데?”
“그거야 모를 일이지!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어디 그럴 분이신가?”
여론은 분분했다. 뱀이 정말로 죽지 않았다면 마귀들은 왜 갑자기 한날한시에 사라진 것이냐는 의문, 천사 미할리나의 성상을 베어 넘겼을 때부터 그의 속셈이 의심스러웠다는 주장….
저마다 확신을 갖고 주절거리던 이들은 입구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근위대를 발견하곤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번쩍거리는 백색 갑옷을 갖춰 입은 근위대원들이 드높은 장창을 들고 재판장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웅성거림이 잦아든 틈으로 긴장감 어린 침묵이 조금씩 장내로 스며들었다.
곧이어 문이 열리며 세 명의 재판관들이 재판장으로 들어왔다.
검붉은 정복 위에 성성한 백발을 늘어트린 그들은 가장 보수적이기로 악명 높은 세르길리우스 수도회 소속의 주교들이었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꼿꼿하게 세운 허리와 조금도 바래지 않은 안광. 관중들은 세 노인의 기세에 겁을 먹고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재판관들이 자리를 찾아 앉기 무섭게, 이번에는 포승줄에 묶인 엘피도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켜보던 시민들이 저도 모르게 힉 소리를 냈다. 어두운 바탕에 금실로 어지러이 수를 놓은 값비싼 비단옷, 윤기 흐르는 모피 차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낡은 포승줄이 그의 양 손목을 옥죄고 있었다.
그럼에도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그의 자세는 꼿꼿했고, 기세는 다부졌다. 처음부터 의심스러웠다며 지껄이던 사람들조차 막상 그의 모습을 직면하곤 속절없이 고개만 떨구었다. 제왕과도 같은 그의 자태는 재판장에서조차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예후르가 자리에 앉자, 정중앙의 재판관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종교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아래 단에 앉아 있던 서기가 벌떡 일어섰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리고 시민 여러분. 오늘 갑자기 재판이 열리게 된 계기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으신 줄로 압니다. 이 자리를 빌려, 어제 오전 퀴테리아 추기경 예하께서 엘피도 공작 전하를 배교자로 고발하셨으며, 제출하신 증거의 내용과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긴급하게 재판을 열게 되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재판관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판관의 반응을 확인한 서기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퀴테리아 추기경 예하께서 고발하신 엘피도 공작 전하의 죄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
“교회를 배반하고 뱀을 숭배한 배교자.”
정적에 잠겨 있던 관객석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서기는 지체 없이 증인석에 앉아 있던 야손을 눈짓했다.
“지금부터 퀴테리아 추기경 예하께서 제출하신 증거의 내용을 듣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