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8화 (258/328)

“뭐…?”

중앙의 재판관이 파리한 안색으로 비틀거렸다. 좌측의 재판관은 증거를 고쳐 들며 냉정하게 속삭임을 이었다.

“퀴테리아 추기경 일파와 함께 쓸려 내려가고 싶지 않다면 조용히 입 다물고 계시오. 난 적어도 오늘 종교 재판소의 문이 닫히는 꼴만은 막아야겠으니.”

그러고는 증거의 낭독을 계속해 이어 갔다. 엘피도 공작의 행적 조작, 뱀의 허물 조작, 증거와 증인 조작….

잇따른 충격적인 폭로에 처음에는 격하게 반응하던 관중들조차 차츰 말수를 잃어 갔다. 낭독이 끝나 가는 장내에는 어느덧 싸늘한 침묵만이 맴돌고 있었다.

“…절차에 따라 이 증거들은 모두 필적 확인을 맡기겠습니다.”

재판관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전에, 퀴테리아 추기경 예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어째서 이 증거들을 제출하신 겁니까? 보아 하니 자백하시려는 의도는 아닌 듯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설령 잘못된 증거를 제출했다는 야손 수도사의 주장을 수용한다 해도, 이런 자료들을 굳이 지니고 계셨던 진의는 여전히 의심스럽군요.”

퀴테리아는 말없이 입술만 깨물었다. 보다 못한 야손이 분한 기색으로 끼어들었다.

“예하께서도 속으신 겁니다! 재판관님, 청백회에 간자가 숨어들었음이 확실합니다! 게롯타, 그년의 짓이 분명…!”

“그만하십시오, 야손.”

서늘한 경고로 야손을 막아 세운 퀴테리아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관중들을 찬찬히 돌아보며 입술을 뗐다.

“내게 하루만 시간을 주십시오. 나에 대한 일방적인 음해임을 증명해 내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조사는 중앙 교회의 몫입니다! 지금부로 퀴테리아를 도주의 위험성이 있는 인물로 판단하여 즉시 하옥해야 합니다!”

글리체리아가 주먹으로 책상을 때리며 외쳤다. 퀴테리아가 살벌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글리체리아!”

“재판관은 어서 결정하십시오! 눈앞에 버젓이 증거가 있는데 어찌 판결을 망설이십니까!”

재판관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글리체리아와 퀴테리아뿐만 아니라, 재판장을 에워싼 관중들도 점차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험한 욕설로 범벅된 고성이 오가며 장내의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예고 없이 열린 문틈으로 누군가 사뿐거리며 입장했다.

문이 열리는 쇳소리를 듣고 고개를 숙여 통로를 내려다보았던 몇몇 관중들이 놀란 마음에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통로를 울리는 나지막한 발소리를 따라 관중석의 웅성거림이 재판장 전체로 번져 갔다.

“저건….”

쏟아지는 수군거림을 받으며 통로를 가로지른 여인이 마침내 재판장의 중심으로 발을 내디뎠다. 글리체리아와 퀴테리아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재판관이 그녀를 발견하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

그의 중얼거림을 기점으로 설전을 벌이던 이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느릿하게 로브를 벗어 내린 페기가 민낯을 훤히 드러내며 천천히 장내를 돌아보고 있었다.

떠나갈 듯 소란스럽던 재판장은 삽시간에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느닷없이 나타난 페기에게로 이목이 쏠린 가운데, 선봉으로 나섰던 글리체리아가 비로소 안도하는 표정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야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찌 허락받지 않은 자가 함부로 재판장을 드나든단 말입니까! 근위대는 도대체 무얼 하시는 거요!”

난데없이 야손의 살벌한 눈빛을 받은 근위대원들이 장창을 들고 허둥지둥 달려왔다. 페기는 근위대원들이 제 앞을 가로막는 꼴을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를 저지하듯 교차된 두 개의 장창에서 시퍼런 쇳빛이 번뜩였다.

페기는 말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두 개의 장창이 교차되는 지점으로 내려앉는 그녀의 손길을 따라 수백의 시선이 숨죽이며 움직였다.

찰나의 침묵.

거두어지는 그녀의 손아래서 벌건 불꽃이 피어올랐다.

일순간 경악에 찬 비명 소리가 장내를 뒤덮었다. 기함한 근위대원들마저 불붙은 장창을 맥없이 떨구며 뒷걸음질했다. 탄식과 고함, 비명이 한데 섞여 몰아치는 가운데, 페기만은 홀로 평온한 걸음으로 근위대원들을 스쳐 지나갔다.

재판장의 거대한 단상 앞에는 세 명의 재판관들과 퀴테리아, 야손, 글리체리아 등이 모여 있었다.

페기는 그들과 적당한 거리를 남기고 멈추어 섰다. 재판장을 에워싼 관중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입을 틀어막은 채 그녀의 이어질 말만을 기다렸다.

페기가 마침내 입술을 뗐다.

“재판은 끝났습니다.”

재판관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살짝 벌렸다. 페기는 품속에서 서신을 꺼내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는 교황 성하께서 내리신 교서입니다. 모두들 주의 깊게 경청하십시오.”

“교황 성하…?”

뜻밖의 언급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페기는 개의치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 교황 레오폴트는 참담한 심정으로 입을 연다. 오랫동안 참고 인내해 왔으나, 내 소중한 아들마저 해하려는 수작은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음이다.”

페기의 시선이 흘끗 변방을 지키고 있는 예후르를 향했다. 그는 여전히 존재감을 죽인 채 잔잔한 미소만을 머금고 있었다.

“위스누아의 대주교이자 원탁 추기경 퀴테리아는 자매인 알비야 공작의 위세를 이용하여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왔다. 내 입으로 하나하나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이나, 우둔했던 나는 행여 알비야 공작에게 해가 될까 모르는 척 눈을 감아 왔다. 부디 그녀가 스스로 깨우치길 바랐던 나의 소망과는 반대로 퀴테리아는 차츰 선을 넘기 시작했다.”

퀴테리아는 곧장 반박하려 했으나, 페기는 뒤돌아 그녀를 외면하며 관중들을 올려다보았다.

“성도의 시민들이여. 그대들은 나를 나이 먹고 힘을 잃어 밀실에 은둔하는 겁쟁이 교황으로 알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퀴테리아의 명을 받은 근위대가 나를 시시때때로 내전에 감금하였음이니.”

“뭐?!”

조마조마하게 그녀의 낭독을 경청하던 관중들이 깜짝 놀랐다. 개중에는 더러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도를 지켜야 할 근위대가 한낱 추기경의 뜻에 휘둘리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 혼자의 고난이라 생각하여 넘겼던 지난날의 과오가 나의 아들딸까지 괴롭히고 있으니, 이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대관절 어떤 성직자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사도를 두고 뱀의 꼭두각시라 욕보일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불붙은 장창을 향했다. 꺼져 가는 불씨는 살아 돌아온 사도의 정체에 대해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가 되어 주었다.

“나는 더 이상 참고 인내하지 않을 것이다.”

페기가 엄중하게 눈을 치떴다.

“지금 이 시간부로 근위대의 자격을 박탈한다. 또한 퀴테리아를 비롯한 그 일파를 모두 잡아들여 어지럽혀진 교회의 질서를 바로 세울 것이니.”

“…….”

“이는 교황 레오폴트가 내리는 지엄한 교서이니라.”

낭독을 마친 페기가 차분하게 교서를 내렸다. 장내의 분위기는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아연실색한 사람들이 차마 입술도 떼지 못했다.

그러자 야손이 이를 꽉 깨물며 페기에게로 달려들었다.

“거, 거짓말! 다 거짓말이야! 교황 성하께서 그러실 리가….”

페기는 순순히 교서를 내어 주었다. 교서를 잡아 뜯을 듯이 움켜쥔 야손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빠르게 내용을 훑어 내렸다. 그러나 대필한 수도사의 정갈한 필체 아래 찍힌 교황의 인장을 확인한 순간, 마지막 희망마저 산산조각 부서져 내리고 말았다.

얼이 빠진 야손을 밀치며 퀴테리아가 뚜벅뚜벅 다가왔다.

“날 잡아들이시겠다고요?”

낭랑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독이 잔뜩 올라 있었다. 파들거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 올린 퀴테리아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대체 누가 날 잡아간단 말입니까? 오, 설마 당신께서 직접 내 손발을 묶을 요량이신가요? 어디 한번 해 보시든가요!”

퀴테리아가 날카롭게 웃었다. 자격을 박탈한다는 소식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근위대원들도 하나둘 웃음소리를 보태기 시작했다. 근위대가 없는 교황은 허울 좋은 맨몸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대로 근위대를 이끌고 성궁으로 갈 겁니다.”

바짝 다가온 퀴테리아가 페기의 면전에 대고 속살거렸다.

“가서, 내전을 장악하고 교황 성하의 신병을 확보할 거예요. 그 뒤는 당신들입니다. 치안대가 힘이 되어 주리란 헛된 기대는 마십시오. 그들은 근위대의 상대가 되지 않을뿐더러 이미 내게 복종하는 자들이니까.”

“…….”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곧 다시 뵙지요.”

씹어 뱉듯 속삭인 퀴테리아가 페기의 어깨를 거칠게 밀고 지나갔다. 페기는 얌전히 눈을 내리깔며 입술을 달싹였다.

“갈 수 있다면 가 보시든지요.”

갑자기 재판장의 문이 열렸다.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온 정체불명의 기사들이 순식간에 재판장을 둘러쌌다. 다급히 검을 찾던 근위대원들은 무기를 휘둘러 볼 새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퀴테리아를 비롯한 청백회 단원들 역시 눈 깜짝할 사이에 포위되었다.

“누, 누구야, 너흰!”

떼로 몰려드는 기사들에게 짓눌려 포박당하던 야손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페기는 차분하게 다가가 그의 발치에 떨어져 있던 교서를 주워 들었다.

“말했잖아요.”

“…….”

“재판은 끝났다고.”

담담한 목소리만 남긴 그녀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멀어지는 그녀의 구두를 멀거니 응시하던 야손이 형편없이 짓눌린 채 고성을 내질렀다.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창살에 몰려 반항조차 못하고 포박당하던 퀴테리아는 그저 활짝 열린 재판장의 문을 끈질기게 노려볼 뿐이었다.

쏟아지는 눈부신 빛.

그 속으로 그늘 진 페기의 뒷등이 부옇게 잠식되고 있었다.

***

꾸벅거리며 졸던 성궁의 북문 문지기가 갑작스러운 통증에 화들짝 깨어났다.

“어, 어…?”

문지기는 두개골이 빠개질 듯 아파 오는 이마를 문지르며 아직도 졸음기 뚝뚝 묻어나는 눈을 껌벅였다. 차츰 선명해지는 시야에 호리호리한 몸집의 노인이 들어왔다.

“누구….”

“이젠 내 얼굴도 못 알아보는 겐가?”

막힌 귓구멍도 꿰뚫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어딘지 익숙했다. 가늘게 눈을 뜨며 고개를 내밀던 문지기의 얼굴에 서서히 충격이 차올랐다.

“서, 설마… 단장님?”

“떠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단장이라 부르는가!”

“저, 전 단장님!”

문지기가 무릎을 꿇을 기세로 엎어졌다. 그 하찮은 등에다 대고 끌끌 혀를 차던 노기사, 미란테가 열린 성문 너머를 턱짓했다.

“어째서 자네 혼자지? 내 분명 북부 지구는 치안이 좋지 않으니, 성궁 북문의 문지기는 반드시 근위 기사를 동반할 것을 근위대 율법서에 적어 두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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