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4화 (264/328)

“오랜만에 돌아온 성도의 분위기가 흉흉해서 많이 놀랐지? 초대하기 늦은 시간이라는 건 알지만, 너에게 따로 설명해 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 불렀어. 보았다시피 내가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비올라가 굳게 닫힌 문을 눈짓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차라가 감당 못 할 쓴맛에 떫은 표정을 지으며 얼른 다과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대충은 들어서 알아.”

“어디까지?”

“…정변이 일어났던 것 정도.”

“내가 감금된 걸 보면 그 주모자가 누군지도 알겠네.”

꿀과 과일을 조린 다과처럼 혓바닥에 휘감기는 달콤한 목소리였다. 다과를 씹는 차라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졌다. 꺼림칙한 기분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실은 네게 작은 부탁이 있어.”

역시나.

차라는 목구멍 너머로 맥없이 다과를 삼켜 버렸다.

“나한테 무슨 힘이 있다고.”

“레오를 만날 수 있잖아. 가서 말만 전해 줘.”

“무슨 말?”

“마지막 시험을 미뤄 달라고.”

차라가 멈칫하며 그녀를 보았다. 비올라는 더없이 진중한 얼굴이었다.

“마지막 시험까지 고작 이틀 남았어. 예상했다시피 종목은 맨손으로 성화를 피우는 것이고. 만약 마지막 시험에서 패배하면 난 끝이야. 자비 없는 엘피도 공작이 설마 날 살려 두겠니?”

비올라의 목소리가 처연하게 떨려 왔다. 촛불이 일렁이는 푸른 눈에 얼핏 물기가 아른거렸다.

“이제 와 너에게 부탁하는 것도 염치없는 짓이란 건 잘 알아. 그런데 차라, 너밖에 없어. 내 편을 들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시험만 며칠 미뤄 달라는 거잖아. 응?”

비올라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간절하게 차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피해 탁자의 모서리만 응시하던 차라가 망설임 끝에 입술을 뗐다.

“왜. 며칠 미루면 바스토뉴의 용병들이 널 구하러 온대?”

비올라가 그대로 굳었다. 차라는 손등을 문지르며 영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한 달 동안 여러 곳을 돌아다녔어. 개중에는 위스누아와 인접한 접경 도시도 있었고. 거기서 내가 무엇을 봤는지 알아?”

“…….

“출정 준비를 끝마친 바스토뉴의 용병단.”

“그건!”

비올라가 다급히 반박하려 했으나, 차라의 목소리가 먼저였다.

“처음엔 다른 도시들과 싸움이라도 붙은 줄 알았어. 리누스 도시 연맹에선 그런 도시끼리의 항쟁이 흔하니까. 그런데 도시 항쟁치고는 용병단의 규모가 너무 컸고, 무엇보다도 용병단이 진을 치고 있던 곳은 리누스 도시 연맹과 교국의 접경 지대였지.”

만일 도시 간의 항쟁이었다면 용병단은 보다 서쪽에 진을 쳤으리라. 후방에 숨긴다고 숨겨질 규모도 아니거니와, 리누스 도시 연맹에서 위스누아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한다면 용병단을 앞으로 내세워 상대의 기세를 꺾는 것이 한결 수월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지그시 입술을 깨문 비올라가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차라의 표정을 힐끗 곁눈질했다. 이미 결론을 내린 사람에게 구차한 변명은 역효과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위스누아에서 고용한 용병단이 맞아. 하지만 맹세코 교국을 침공하려던 의도는 아니었어. 엘피도 공작이 장미 수도회와 작당하여 병력을 끌어 모으고 있다는 첩보를 들어서, 만에 하나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태를 대비하고자 했을 뿐이니까.”

결국 한발 늦어 오늘에 이르고 말았지만.

작게 뇌까린 비올라가 치맛자락이 흉하게 구겨지도록 주먹을 쥐었다. 차라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용병단을 기어이 불러들이겠다고?”

“먼저 성도를 침략한 건 저들이야. 나는 왜 그러면 안 되는데? 엘피도 공작과 그 가짜는 너의 소중한 가족이라?”

비올라가 차가운 웃음을 터트렸다.

“똑같이 천사의 성흔을 받은 사도인데 누구는 해도 되고, 누구는 하면 안 되고. 그거 되게 우스운 거 아니? 결국에 그 사람들 편을 들어줄 거면서 나한테 가족이니 뭐니 가르치려 들었던 거야?”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난 너도 가족이라고 생각해.”

차라의 눈길이 새 발자국 성흔이 찍혀 있는 비올라의 손등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니까 안 오면 죽어 버리겠다는 그 같잖은 협박에 넘어온 거고.”

비올라는 멈칫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쩌면.

한 줌 희망이 잿더미 속에서 움트려던 찰나.

“이만 포기해, 비올라.”

차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당해 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비올라는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간신히 싹을 보이려던 희망이 단숨에 사그라졌다.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을 흘려 보냈다.

“…그만.”

“가족인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이야. 제발 포기해.”

“그만하라고!”

“너도 사도라며. 부질없는 몸부림이라는 걸 왜 몰라?”

비올라는 급하게 숨을 멈추었다. 그녀를 담아내는 차라의 눈에 안타까운 동정의 빛이 어려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 아득바득 버텨 왔던 자존심에 금이 갔다. 저 자신조차 외면해 왔던 밑바닥 수치심이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그 가짜가 뭐라고….”

까득, 이가 맞물렸다.

“맨손으로 불을 피우든, 다른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든!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야? 그건 가짜야! 내가 왜 가짜를 당해 낼 수가 없는데!”

“…페기를 말하는 게 아니야.”

차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일순 비올라의 표정이 아연하게 물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

“무슨 소리냐고!”

견디다 못한 차라가 그녀를 외면하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러자 울컥한 비올라가 벌떡 일어나 그의 팔을 잡고 강제로 돌려세웠다.

“말을 하려면 제대로 해! 가짜가 아니면 누굴 말하는 건데!”

“내 말을 이해 못 하니 포기하란 거잖아.”

차라가 지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넌 이길 수가 없어. 처음부터 그렇게 짜인 판이니까.”

무섭게 일그러져 있던 비올라의 표정이 가장자리부터 설핏 무너져 내렸다. 그녀를 딱하게 응시하던 차라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네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빌어 볼게.”

그의 팔을 붙잡고 있던 비올라의 손이 툭 떨어져 내렸다. 불편한 기색으로 시선을 피하던 차라가 그제야 달아나듯 방을 빠져나갔다.

그가 떠난 자리만 멍하니 주시하던 비올라가 갑자기 털썩 주저앉았다.

“왜….”

사도가 되어 성궁에 들어오자마자 느꼈던 소외감.

저들이 함께했던 수십 년의 세월을 모르니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저 또한 위스누아의 가족들을 잊지 못했으니 서로 동등한 입장이라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위스누아의 가족들에 비하면, 너희는 이미 뿔뿔이 흩어져 애증만 키우고 있을 뿐이니 그 잘난 사도들도 별반 다를 바가 없노라 여겼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 개운치 못한 것이 있었다.

차라와 만날 때마다, 교황을 대면할 때마다, 먼발치서 엘피도 공작을 볼 때마다 무겁게 속내를 짓눌러 오던 어떤 것.

서먹한 관계에서 오는 어색한 감정이라기엔 자꾸만 자신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나를 깎아 먹는 부정적인 감정을 애써 떨치고 마주해 본들, 그들은 산처럼 거대해지며 나는 자갈보다 작아지는 순간이 문뜩문뜩 찾아왔다. 하다못해 불을 피우지 못하는 데서 오는 열등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스스로 할 정도로.

하지만 그마저 모자란 자각이었음을 이제 알겠다.

같은 언어로 아무리 말을 나눈들, 내게로는 절대 전달되지 않는 의미들.

나는, 너희를 이해하지 못한다.

“흐윽….”

비올라는 절로 막혀 오는 숨통을 어쩌지 못하여 열 손가락으로 처절하게 목을 긁어내렸다. 목에 걸리는 것 하나 없건만, 마치 무형의 사슬이 목을 옥죄어 오는 것처럼.

***

성도 오스피나의 날이 밝았다.

도래하는 아침과 함께 백방에서 전서구들이 날아들었다. 대개 성도에서 정변이 일어나자마자, 자국 외교 대사들에게 앞으로의 태세를 알리기 위해 보낸 것들이었다. 교국을 둘러싼 수많은 국가들이 성도의 형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나, 정작 성도 오스피나는 지극히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깨끗하게 닦인 핏자국 위로 전령들은 늘 그렇듯 바삐 걸음을 옮겼으며, 시민들은 무너진 건물에 임시로 천막을 덧대어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근위대의 역할을 임시로 맡고 있는 장미 수도회의 수습 기사들마저 시장 상인들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누며 아침 인사나 주고받았다.

거룩한 새벽의 도시 오스피나는 그렇게 아문 상처 위로 새로운 싹을 움트고 있었다. 한바탕 난무했던 피와 비명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시민들은 이미 지난날을 잊은 듯했다. 청명한 겨울 하늘 아래 우뚝 선 성궁 앙겔리카의 순백색 외벽이 오늘도 시리도록 반사광을 내뿜었다.

그리 새하얀 성벽 아래 커다란 마차 한 대가 세워진 것은 느지막한 아침의 일이었다.

마차의 문을 열고 나오던 페기는 갑자기 들이치는 햇빛에 인상을 찌푸렸다. 신기하게도 성도에서는 겨울 볕이 더 독했다.

“전하.”

미리 마중을 나와 있던 클레멘스와 글리체리아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페기는 손차양으로 볕을 가리며 엷은 미소로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얼굴이 좋아 보이십니다. 다행히 잠을 설치지는 않으신 모양이군요.”

클레멘스가 유쾌하게 말을 건넸다. 페기가 새침하게 그를 흘겼다.

“이런 짓도 한두 번이어야 긴장을 하죠.”

“좋은 마음가짐이십니다.”

글리체리아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페기는 그들과 함께 성 나르세스 광장으로 들어가며 넌지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의외로 사람이 적네요.”

“뭐… 이미 결판이 난 일이지 않습니까.”

오늘은 진정한 사도를 가르는 마지막 시험.

장소는 4년 전 페기가 시험대에 올랐던 성 예리엘 대성당이었다. 천사 예리엘의 사도를 가르는 자리로 그보다 더 적당한 곳은 없었기에.

그러나 성 나르세스 광장이 꽉 차도록 인파가 몰렸던 4년 전과 달리, 오늘은 한산하다 못해 적적할 지경이었다. 비올라의 가장 큰 지지 세력인 청백회가 이미 결딴난 상황이기도 하거니와, 종교 재판소에서 페기가 불을 지폈다는 소문이 성도 전체에 파다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차라 도련님께서 성도로 돌아오셨다는데, 소식 들으셨습니까?”

“차라가요?”

페기가 의아하게 반문했다. 클레멘스가 조금 당황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틀 전 밤에 알비야 공작 전하와 잠시 대면하기도 하셨다더군요.”

“아….”

“아직 만나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페기는 멍하니 발치를 응시했다. 그녀는 차라가 성도에 없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어딜 다녀왔대요?”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돌아와서도 여전히 바쁘신 것 같더군요. 아까 아침에 조용히 성궁을 빠져나가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페기는 씁쓸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도 한 가지에 집중하면 다른 건 안 보이는 아이긴 했지만, 오늘처럼 중요한 날에도 후순위로 밀려나는 것은 조금 섭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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