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5화 (275/328)

“베론?”

뜬금없는 지명에 의문을 표하던 차라가 갑자기 굳었다. 복잡한 표정으로 이마를 감싸 쥐고 있던 안드레아가 맥없이 차라의 팔을 툭툭 쳤다.

“왜. 거기가 어딘데.”

“…예후르가 실종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발견되었던 곳이야.”

4년 전, 죽은 페기의 시신도 확인하지 않고 급박하게 떠났던 예후르는 그대로 행방이 묘연해졌었다. 그런데 지난 법정 공방에서 밝혀지길, 그는 사라지기 직전에 뱀의 흔적을 쫓아 당도했던 베론의 교회로 돌아가 지하 수로로 내려갔고 1년 가까이 지상으로 올라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지난 재판의 기억을 더듬어 보던 안드레아가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그거 진짜였어? 퀴테리아에게 던졌던 미끼가 아니라?”

“그러게….”

차라는 조금 불안한 눈으로 페기를 힐끔거렸다.

만일 죽은 사제의 일기가 진실이라면, 당시 성도를 강타했던 수많은 의문점이 다시금 되살아나게 된다. 특히나 예후르가 행방불명이었던 그 1년간 베론 교회의 지하 수로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중점이었다.

차라는 바로 그 지점에서 참을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하필이면 페기가 죽은 직후의 일이었다. 더욱이 그로부터 1년이 지나 돌아왔던 예후르의 모습은 빈말로도 정상이라 할 수가 없었다.

“정말 거기로 가려고?”

“당연히 더 확인을 해 봐야….”

무심결에 대답을 이어 가려던 페기가 덜컥 입술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차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확인? 무슨 확인?”

페기는 몹시 혼란스러워졌다.

차라는 길을 잃고 헤매는 그녀를 도와 달라는 예후르의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그 차라는 예후르를 천사로 알고 있었다.

이 또한 너의 의도일까.

페기는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느꼈다. 모든 것이 오리무중이나, 하나만은 확실했다. 예나 지금이나 뱀은 금기시되는 존재. 아무리 가까운 차라와 안드레아라 할지라도 뱀에 대한 것만은 털어놓지 않는 편이 좋았다.

페기는 일부러 부산스러운 몸짓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날이 곧 어두워지겠다. 일단은 숲부터 벗어나자.”

그녀의 말대로 머리 위를 뒤덮는 나뭇잎 그림자가 시시각각 짙은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어느새 땅거미가 몰려오는 사위를 확인한 차라와 안드레아가 선선히 수긍하며 마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페기 역시 그들을 뒤따라가려는데, 비석 앞에서 골똘히 쭈그려 앉아 있는 라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라만.”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페기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무얼 그리 주의 깊게 보고 있어요?”

“…여기 말입니다.”

라만이 굵은 손가락으로 비석의 아랫부분을 가리켰다. 페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렁이가 기어가듯 꼬불꼬불한 언어가 비석에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다.

“차라! 이 부분도 해석한 거니?”

마차에 올라타려던 차라가 다시 쫄래쫄래 달려왔다. 그러고는 라만이 짚은 부분을 확인하더니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 이 부분은 해석이 안 돼.”

“뭐?”

사어는 연구가 끝난 문자였다. 사어로 적힌 신성 시대의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 문제일 뿐, 해석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게, 사용하는 문자는 비슷한 것 같은데 언어 체계가 다른 모양이야. 아마도 그 시절에 쓰였던 방언이나 이웃 문자가 아닐까 싶어.”

페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까마득한 오래전일 뿐 그때도 사람이 살던 시대였다. 사어에서 뿌리가 갈린 비슷한 문자 한둘쯤은 충분히 있을 법했다.

묵묵히 차라의 말을 경청하던 라만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혹시 이 부분도 본을 뜨셨습니까?”

“네? 아, 있긴 한데….”

차라가 가방을 뒤지며 허둥지둥하는 사이에 라만이 무릎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제게 빌려 주실 수 있습니까?”

“뭐라도 짚이는 점이 있나요?”

페기가 은근슬쩍 떠보았다. 하지만 차라에게서 본을 받아 든 라만은 물끄러미 손안의 종이만 내려다볼 뿐 가타부타 확실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확실해지면.”

그가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무엇이든 확실해지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

우울하게 앉아 있던 페기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둥글게 드리워졌다. 페기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서운 옛이야기에 나올 것만 같은 딱딱한 가면이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니?”

페기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곧이어 레오폴트가 옆자리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예후르와 안드레아가 노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구나.”

멀지 않은 곳에서 안드레아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페기는 무릎을 안은 양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한여름 불볕이 찬란하게 부서지는 강가에서 예후르와 안드레아가 한창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미리 약속된 소풍날이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한 달도 더 전이었겠으나, 한 번은 레오폴트의 과중한 업무로, 다른 한 번은 예고 없이 내린 소나기로, 또 한 번은 신나게 울타리를 뛰어넘던 안드레아가 발목을 삐끗하여 이렇게나 미뤄진 것이었다.

먼 남쪽의 도시 카니나에서 구출되어 성도로 들어온 페기는 근 반년 동안 성궁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레오폴트는 그녀에게 살뜰히 신경을 써 주었으나 몸소 데리고 나가기엔 할 일이 너무 많았고, 안드레아는 저 놀기에 바빴다. 어느 날 나타나 카니나의 뒷골목에서 페기를 구원해 주었던 예후르는 정작 그녀에게 별반 관심이 없어 보였다.

홀로 남겨진 페기는 하릴없이 종탑의 꼭대기에 앉아 멍하니 성 밖을 내다보곤 했다. 그런데 안드레아가 불쑥 등장하여 종알거리기를, 성궁 밖에는 물이 잔뜩 흐르는 강이란 것이 있다고 하였다. 남쪽 바닷가에서 태어났으나 불행히도 뒷골목 쓰레기장을 벗어나지 못했던 페기에겐 그야말로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였다.

물이란 늘 마시고 씻는 것.

페기의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안드레아가 말한 ‘무지하게 넓고 무지하게 물이 많은 강’이란 것을 제대로 상상할 수 없었다. 한 번은 그녀를 씻겨 주던 하녀에게 용기 내어 강이란 이 욕탕과 비슷한 곳이냐고 물었으나, 어처구니없다는 비웃음만 돌아올 뿐이었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의기소침해졌던 페기는 어느 날 성 밖 미레강으로 나들이를 가자는 레오폴트의 제안에 잠을 설칠 정도로 기뻐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 꼴.

페기는 울적한 표정으로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목 끝부터 발끝까지 가리는 흰 의복을 입고 있었다. 모두 풀어 헤치고 강물로 뛰어든 예후르와 안드레아와는 대조적이다.

“날씨가 참 좋구나.”

바로 저 사람 때문이다.

페기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소심하게 눈을 흘겼다. 예후르와 안드레아를 따라 강으로 들어가려는 그녀를 제지했던 수도사의 말로는 세례 기간이 끝날 때까지 그녀의 옷차림을 단정히 하라는 교황 성하의 엄명이 있었다고 했다.

페기는 그 세례 기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무섭게 생긴 수도사는 그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라는 양 겁을 주었지만, 정작 안드레아는 영감탱이 드디어 노망났다며 막말을 할 뿐이었다. 그리고 안드레아는 조금 거칠긴 해도 틀린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페기는 불쑥 치솟는 억울한 마음에 입술을 비쭉였다.

안드레아는 저딴 헛소리 듣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결국에 이 갑갑한 옷을 벗지 못하여 그늘에나 앉아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자의였다.

페기는 아직도 종종 꿈에서 보곤 하는 고향의 뒷골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레오폴트는 이상할 정도로 그녀에게 상냥했지만, 언제 돌변하여 그녀를 이 멋진 성에서 내쫓을지 몰랐다. 페기는 가면 쓴 사람을 믿지 않았다. 더군다나 가면 너머에서 조용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녹안을 발견할 때면 등골이 절로 오싹해지곤 했다.

“페기.”

불현듯이 들려오는 쉰 목소리에 페기는 흠칫 놀랐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보니, 먼 강가를 향해 있는 가면의 옆모습은 역시나 미끈하고 딱딱했다.

“보통은 태어난 지 백일이 지나 세례를 받지만, 너처럼 늦은 나이에 세례를 받는 경우는 몸가짐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세례를 완전히 끝마치려면 아직 반년이 더 남았으니 갑갑하더라도 그때까진 참도록 해라.”

“네에….”

“그리고.”

가면이 느릿하게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시무룩하게 입술을 오물거리던 페기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무 그늘에 가려 침침해진 가면 속 녹안이 기이한 빛으로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분간 예후르는 멀리하도록 하려무나.”

그 말이 어찌나 뇌리에 깊숙이 박히던지.

수천수만 일이 지나도록 페기는 문득문득 그날의 일을 떠올리곤 했다. 따갑게 내리쬐던 여름철 불볕과 느슨하게 기울어져 있던 나무 그림자, 그리고 고요히 저를 바라보던 뜻 모를 그의 옥빛 눈동자까지.

그때는 몰랐지만, 머리가 조금 굵어져서 돌이켜 보건대 당시 중앙 교회의 성직자들 사이에선 고만고만한 나이대의 사도들이 모여 자라는 성궁이 남모르는 걱정거리였으리란 생각이 든다. 보수적인 교회에서 성별이 다른 아이들이 한데 섞여 사는 모습이 얼마나 위험천만하게 비쳤을지는 대강 예상이 갔다.

예나 지금이나 예후르만 보고 사는 페기는 특히나 어린 시절에는 정도가 더 심했다.

예후르는 카니나의 뒷골목에 홀연히 나타나 그녀를 구원한 사람이었고, 어린 페기는 알을 깨고 나온 새끼가 최초로 본 존재를 어미로 인식하듯 예후르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그저 어린아이의 맹목적인 애정이었을 뿐이나, 결국에 그 마음이 잦아들지 않은 것을 보면 그때 레오폴트의 조언은 합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왜 ‘당분간’이었을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