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기는 슬쩍 미간을 좁혔다.
검은 수도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면 성직자가 분명했다. 기껏해야 서른을 좀 넘겼을까. 아무래도 낯선 얼굴의 사내는 따사로운 볕을 이불 삼아 낮잠이라도 청하고 있는 듯했다.
시큰둥하게 시선을 미끄러트리려던 페기가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작은 뱀 한 마리가 잠든 사내를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페기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피해요! 위험해요! 뱀이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들 소용없었다. 사내가 있는 곳과 그녀의 자리가 완전히 유리된 것처럼, 목소리가 전혀 가 닿질 않았다.
그사이 뱀은 사내의 어깨 근방까지 근접했다. 페기는 갑갑한 마음에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이봐요! 위험하다고요! 그러나 굳게 닫힌 사내의 눈은 뜨일 줄 몰랐고, 뱀은 흐트러진 수도복 사이를 헤집고 들어 사내의 목덜미를 콱 깨물었다.
순간, 사내의 눈이 번쩍 뜨였다.
부릅 뜨인 눈알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부풀고, 눈가 주위로 굵은 핏줄들이 가닥가닥 섰다. 고통이 너무나도 선연하게 드러나는 모습에 페기는 저도 모르게 입가를 가렸다. 쩍 벌어지는 사내의 입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마구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격렬한 반응이 일시에 뚝 그쳤다.
동시에 사내의 목덜미를 깨물었던 뱀이 돌연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연속되어 그저 망연자실하게 지켜만 보던 페기가 별안간 벼락 맞은 것처럼 굳어 버렸다.
사내의 눈이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심지어 까만 동공은 세로로 쭉 찢어져서 마치 파충류의 눈알을 보는 듯했다.
페기는 소름이 등골을 타고 달리는 것을 느꼈다. 설마, 하는 의심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찰나에 멀리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제님!”
사내가 휙 고개를 돌렸다.
“어디 계세요!”
“여기 있습니다.”
상냥하게 대답한 사내가 흐트러진 수도복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앳된 수도사를 맞이하는 사내의 눈은 어느새 본래의 평범한 색으로 돌아가 있었다. 혹여 잘못 보았나 싶어 자신의 눈을 의심하던 페기는 이어지는 수도사의 말에 그만 생각을 멈추고 말았다.
“찾았잖아요, 만달 사제님!”
만달이라니.
페기는 황급히 사내의 전신을 다시 훑어보았다. 조금 덥수룩한 갈색 머리에 갈색 눈. 타고나길 좋은 체격에 다소 군살이 붙어 둔해진 몸은 흔히 볼 수 있는 성직자들의 전형이었으나, 그녀의 기억 속 백발이 성성하던 여든 살 노인과는 거리가 있었다.
만달.
위스누아의 대주교이자 수십 년 가까이 원탁을 지켰던 추기경.
4년 전, 성 예리엘 대성당의 성화가 꺼지면서 온 성도가 혼란으로 물들었을 때 의문의 죽음을 당한 그는 이후로 세간의 기억에서 까맣게 잊혔다.
페기의 죽음, 사라져 버린 예후르 등 많은 사건들이 있기도 했거니와, 그의 후임이었던 퀴테리아 추기경이 강력한 존재감을 바탕으로 만달의 흔적을 지워 나갔기 때문이다.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인물의 젊은 시절 모습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페기는 여전히 아연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멀어지는 만달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사이 세상은 다시금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저 넋 놓고만 있어도 현기증이 일 것 같은 광경을 실눈으로 겨우 응시하던 페기는 불현듯 엉망진창으로 뒤섞이는 눈앞의 광경들이 시간의 흐름임을 깨달았다.
수십 년 전 베론의 시가지, 그 시절에도 이미 낡아 빠졌던 교회를 책임지던 만달, 중앙 교회로 진출하며 점차 올라가는 그의 직위와….
“그대를 위스누아의 대주교로 봉하노라.”
낭랑하게 읊어 내리는 한 소년.
불시에 뒷머리를 후려 맞은 듯한 충격이 몰려왔다.
오르간 연주 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이곳은 성 발레론 대성당.
드넓은 교회당 가득 검고 붉은 의복을 차려입은 성직자들이 개미 떼처럼 우글거리고, 날카롭게 벼린 창칼을 든 근위대가 단상 아래를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자색 추기경 의복을 입고 경건하게 무릎을 꿇은 만달과 그의 머리 위로 앙상한 손을 뻗어 축복을 내리는….
“감사합니다, 성하.”
어린 교황.
페기는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교황을 상징하는 백색 성의를 갖춰 입은 소년은 지나치게 거대해 보이는 성좌에 앉아 머리에 인 관의 무게를 간신히 견뎌 나가고 있었다.
문지르면 사라질 듯 창백한 백금발,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푹 꺼진 뺨.
심혈을 다해 깎아 놓은 조각상처럼 작고 섬세한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다. 지친 녹색 눈이 맥없이 깜박인다.
…레오폴트.
페기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곤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가면을 쓰지 않은 그의 맨얼굴은 최초로 보는 것이었지만, 놀라움이나 반가움 대신 하염없는 슬픔만이 가슴을 조여 왔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제네로사 5세를 잃고 혼자가 되었던 어린아이.
곁에 두고 부릴 믿음직한 사람 하나 없이, 그를 통제하려 들기만 하는 라발 세력들에게 둘러싸여 숨 막히는 매일을 보냈을 것이다. 달리 치료법이 없는 병세는 계속 악화되어만 가니, 고귀한 사도께서 저주받으셨다는 헛소리가 가장 세를 떨치던 시절이리라.
허리를 깊숙이 숙인 채로 물러나는 만달의 뒤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새로운 추기경을 반기는 소리였으나, 홀로 성좌에 앉은 어린 교황은 그마저 버겁다는 듯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을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파리한 안색이 차츰 눈물에 가려 흐릿해져 갔다.
울컥 차오른 눈물을 닦아 내는 틈에 다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조금씩 늙어 가는 만달과 부쩍 자라나는 레오폴트. 하지만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팔다리론 여전히 교황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고, 짙어져 가는 병세는 한눈에도 확연하게 보였다.
곧 죽을 사람처럼 거친 숨만 색색 내쉬던 레오폴트는 어느 날 추레한 순례자의 행색으로 다시 나타났다.
어린 예후르와 함께.
“그대가 만달입니까.”
어린아이답지 않은 사근사근한 말투였다. 레오폴트와 마찬가지로 먼지투성이 거지꼴의 행색이었으나, 눈빛만은 맑고 영롱했다.
“어린 사도이시여.”
만달은 기꺼이 땅바닥에 꿇어앉아 고개를 조아렸다. 굽은 등 위로 어린 예후르의 눈길이 내려앉았다. 상대를 가늠하듯, 혹은 꿰뚫어 보듯. 빈틈없는 눈빛은 곧 깊숙이 가라앉고, 어린아이답게 명랑한 웃음기가 눈꼬리에 맺혔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제 레오폴트는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
섬세한 미형의 얼굴은 어둠 속으로 묻히고, 그녀가 알던 엄숙함이 전면으로 내세워졌다.
이듬해에 그의 손을 붙잡고 성궁으로 들어온 안드레아, 라발의 세력을 등에 업고 레오폴트와 매번 각을 세우던 젊은 시절의 클레멘스, 혈기 넘치던 글리체리아와 오르코와 꼭 닮았던 보나벤투라까지.
익숙한 인물들의 면면을 스쳐보던 페기의 시선이 어느 한 군데에서 멈추었다.
“카니나에서 왔다고요?”
만달을 비롯한 여러 명의 성직자들이 모여 수군거린다.
“카니나라면 유명한 환락의 도시가 아닙니까? 거긴 아직도 암암리에 노예를 사고판다던데요.”
“어디서 더러운 핏줄이라도 데려오신 것이 아닐지….”
“혈통이 의심스럽긴 합니다만, 어쨌든 성흔을 받은 사도니까요.”
그들의 시선이 흘끗 건너편을 향했다. 그곳에는 레오폴트의 손을 잡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어린 자신의 모습을 이렇듯 남처럼 보게 되는 것은 흔한 경험이 아니다. 그러나 페기는 조금의 들뜬 기색도 없이 냉랭한 눈으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물 위로 번지는 물감처럼 다시금 일렁이기 시작하는 시야 사이로 수줍게 웃어 보이는 어린 날의 자신이 유독 가슴에 콱 박혀 들었다.
시간은 또다시 빠르게 흘러갔다.
어린아이들은 빠르게 성장하고, 어른들은 조금씩 늙어 갔다. 늦은 나이에 각성하여 성궁으로 들어온 차라가 고향의 가족들이 보고 싶다며 떼를 쓰고 울던 기억은 지금의 그녀에게도 제법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해가 지날수록 부쩍 자라나는 과거의 그녀는 현재와 비교해도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성인식이었다.
노환을 핑계로 오랫동안 위스누아의 저택에서 호의호식하던 만달이 드디어 무거운 엉덩이를 뗀 날이기도 했다. 그는 어느덧 그녀의 기억 속 백발이 성성한 여든 살 노인이 되어 있었는데, 어째선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뱀.
페기는 입술을 달싹이며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만달은 스쳐보았던 과거의 기억대로 성인식에선 꾸벅꾸벅 졸기만 했다. 늘 그러던 사람이기에 누구도 제대로 눈여겨보지 않았던 모습.
그렇기에 페기는 성인식 내내 졸기만 하던 만달이 저와 예후르를 훔쳐보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성인식이 끝난 직후였다.
기억대로라면 그녀는 예후르에게 한숨 섞인 목소리로 푸념을 늘어놓는 중이었을 테고, 예후르는 그런 그녀를 격려해 주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자각하지 못했으나, 이렇듯 제삼자의 눈으로 보자니 유별나게 정다운 모습이긴 했다.
흡사 연인으로 보일 것처럼.
몰래 실눈을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만달이 불현듯 입술을 꿈틀거렸다. 수북한 흰 수염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그것은 분명한 미소였다. 가늘게 뜨인 두 눈에 맴도는 음험한 빛이 소름 끼치도록 징그러웠다.
충격에 휩싸인 페기가 우두커니 서 있는 사이, 세상은 다시금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덮쳐 오는 시간의 파도는 짧았고, 사위는 어느덧 새카만 밤의 장막으로 가려졌다.
촛불이 올랐다.
불그스름한 불빛이 드리워진 만달의 얼굴은 아주 늙고 초췌했다. 성성한 백발에 가려져 있던 눈 밑에는 검버섯이 얼룩덜룩 올라와 있었으며, 수염이 자라나는 뺨은 축 늘어져서 꼭 죽은 동물의 가죽 같았다.
전에 없이 지쳐 보이던 만달이 돌연 허리를 수그리더니 격한 기침을 토해 냈다. 성대를 뽑아낼 것처럼 온몸을 들썩거리던 그가 가쁜 숨을 들이마시며 힘겹게 허리를 세웠다. 그러고는 검붉은 선혈이 묻어난 손바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이 몸도 얼마 남지 않았군.”
쉰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가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일렁이는 촛불을 따라 바닥에는 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갈등의 기미가 엿보이던 눈빛은 곧 굳어지고, 노쇠한 입술이 열렸다.
“계획을 서둘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