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을 견뎌 온 그에게 그녀의 존재란 마치 땅을 기는 미물과 마찬가지로 작고 하찮을 것이었다. 그녀가 천사 예리엘의 선택을 받은 사도라 한들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녀와 같은 존재는 그의 기나긴 생을 수없이 지나가고 또 지나갔을 터.
그토록 고귀한 존재가 그녀 하나를 살리겠다고 스스로를 포기했다고는 도저히….
“…예후르.”
페기는 비관적으로 흘러가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끊어 내며 중얼거렸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아침 햇살이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바닥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먼 곳에 익숙한 뒷모습이 있었다. 페기는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리며 다시금 입술을 뗐다.
“예후르.”
그제야 뒷등이 돌아간다.
페기는 저를 돌아보는 얼굴이 순식간에 미소로 흐드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오래전, 사랑에 빠지는 기분이 이러했을까. 우습게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페기.”
그가 상냥하게 속삭이며 양팔을 벌렸다. 페기는 잘 떼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였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땅이 시소처럼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간신히 그의 앞으로 걸어간 페기는 차마 그와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시선을 떨구었다. 심장이 목 언저리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통이 꽉 막혀 왔다. 현기증이 노도처럼 밀려오는 가운데, 발밑을 어지럽히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난잡하게 눈을 어지럽혔다.
그런데 불현듯 따스한 손길이 그녀를 감싸 왔다.
페기는 멈칫한 순간에 속절없이 그의 품으로 끌려 들어갔다. 발작적으로 들이켠 숨에 메마른 바람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페기는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엇박자로 불안하게 뛰던 심장 고동이 신기하게도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
그의 포근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나직이 울려 왔다. 페기는 어렵사리 마른침을 삼켰다. 나도,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교라도 바른 것처럼 입술이 떼어지질 않는다. 어쩐지 목이 메어 왔다.
한참이나 그렇게 페기를 끌어안고 있던 예후르는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떨어져 나갔다. 심려 깊은 눈빛이 페기의 행색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유심히 살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것 같고….”
신중하게 중얼거린 그가 이내 빙긋이 웃어 보였다.
“여전히 예쁘네.”
낯간지러운 말에 페기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언제나 봄바람처럼 따스하게 살랑거렸다. 평소에는 무심결에 지나치다가도 막상 의식하게 되거든 뺨이 달아오를 만큼 부끄러워지곤 했다.
페기는 괜스레 말을 돌렸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광장과 마찬가지로 대성당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늘 장엄한 오르간 연주 소리로 가득하던 곳에 새 지저귀는 소리만이 간혹 아스라하게 들려오고, 기도를 드리는 인파 대신 맑은 아침 볕이 환하게 내부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냥….”
예후르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보고 있었어.”
그의 시선은 정면 제단에 꽂힌 성화대를 향해 있었다. 페기는 그를 따라 가만히 제단을 올려다보았다.
제단을 덮는 거대한 돔 아래와 제단 양옆 벽면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에서 폭포처럼 빛이 쇄도하고 있었다. 색유리로 그려진 성화의 화려한 빛줄기는 그대로 제단을 뒤덮으며 수만 가지 색상으로 섞여 나갔다. 그럼에도 그 가운데 자리한 성화의 존재감만은 가라앉지 않는다.
영롱한 불빛.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쏟아지는 빛줄기는 마치 타오르는 성화를 에워싸듯 그 주위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빛이 강해지고 잦아들고, 또 빛이 들어오는 방향이 변하면서 시시각각 빛줄기가 흔들리니, 때에 따라선 형형색색 빛무리가 서로 손을 잡고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어찌 보면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마저 성화를 향해 경배를 드리는 격이었다.
찬란한 빛의 향연에 잠시 도취되었던 페기는 어둡게 그늘진 성화의 뒤편으로 자리한 성상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날개를 펼친 무성(無性)의 존재.
광휘의 천사 미할리나.
쇄도하는 빛줄기가 미처 닿지 못하는 곳에서 미할리나의 성상은 외려 무겁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심지어 성상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는 얼핏 인간성을 아득히 초월한 신성처럼 보이기도 했다.
페기는 가만히 입술을 달싹였다. 하고픈 말이 많았으나 정작 단어로 매듭지어지지 않았다. 이교의 신처럼 머나먼 줄 알았던 존재. 하지만 실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그.
“…원래 저렇게 생겼어?”
적당한 단어를 찾아 한참이고 머릿속을 배회하던 페기는 무심결에 말을 내뱉었다가 곧 후회하고 말았다. 성도를 떠나 다시 돌아오기까지, 거의 한 달이란 기간 동안 밤잠 설치며 고심했던 것이 무색하리만큼 철없고 가볍게 들리는 질문이었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하고 후회하는 동안에 예후르는 그저 픽 웃고 말았다. 그녀의 심경을 모두 꿰뚫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창피함에 고개를 못 들던 페기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기왕에 이렇게 되었으니 뻔뻔스럽게 질문이나 이어 나가자는 생각이었다.
“그 올빼미는 대체 뭐였어?”
베론의 지하 수로로 들어와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과거의 단편들을 보여 주었던 새.
당연히 평범한 존재일 리 없었다.
“봤구나.”
살며시 그녀를 돌아보는 예후르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나의 충실한 벗이야.”
페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천사 미할리나의 벗이라면 또 어떤 존재란 말인가. 그녀는 최대한 올빼미의 정체를 상상해 보려 했지만, 머잖아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결국 페기는 추측을 포기하고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갔다.
“그럼 내가 본 게 모두 사실이 맞아?”
말끝이 조금 떨려 왔다. 그의 포옹에 모두 사라진 줄 알았던 긴장감이 다시 스멀스멀 차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하릴없이 굳어진 표정으로 예후르를 주시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미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따스한 눈빛을 담고 있었다.
“응.”
그녀의 속눈썹이 한 차례 파르르 떨렸다. 제발, 제발 아니기를. 구질구질하게도 마음 한 구석 여태 놓지 못하고 있었던 마지막 희망이 부질없이 바스러졌다. 페기는 가까스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번잡해지는 마음을 다스리며 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지금의 너는 어때?”
“…….”
“천사야… 아니면 뱀이야?”
엿듣는 사람도 없는데 괜스레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페기는 남몰래 치맛자락을 꽉 부여잡았다.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는 예후르의 얼굴은 얼핏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처럼 천진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좀처럼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페기는 갑갑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재차 입을 열었다.
“뱀이 그랬어. 너를 온전히 가질 수는 없다고. 이지를 잃지 않기 위해 악을 쓰는 것이 전부일지도 모르며, 그저 너를 더럽히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고. 그러면 너는 온전한 뱀일 수가 없는 거잖아. 응?”
만일 그가 뱀에게 완전히 먹힌 것이라면 말도, 행동도, 생각도 달라져야 했다. 하지만 그는 변했을지언정, 여전히 그녀가 알던 수사의 예후르였다. 유년기를 공유하는 남매요, 함께했던 세월만큼이나 더욱 애틋해진 연인.
애타게 매달려 오는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예후르가 곧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잘 모르겠어.”
페기의 눈이 조금 커졌다. 예후르는 차분히 손을 들어, 흘러내린 그녀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기억은 남아 있지만 왜곡되었을 여지가 있고, 눈은 여전히 밝지만 세상만사 꿰뚫어 보았던 예전의 영광에는 비할 바가 못 돼. 날개는 꺾이지 않았지만 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아.”
“…….”
“무엇보다도 마귀가 나를 따르지.”
그의 입술이 매혹적인 선을 그렸다. 넋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페기는 뒤늦게야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뭐?”
“뱀의 충실한 종, 죽여도 죽지 않는 암흑 속 죄인들이 나를 따라. 페기, 네가 말해 줘. 이런 나는 과연 뱀일까, 아니면 천사일까.”
예후르가 대답을 조르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하지만 페기는 감히 어떤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의 질문은 그녀가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은 영역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대답을 바라서는 안 되었다.
“…그럼 이건 어때.”
예후르가 그녀의 허리를 잡고 살짝 끌어당겼다.
“나는 예전보다 자주 기쁘고, 또 자주 슬퍼. 가끔은 화가 나서 모든 걸 뒤엎어 버리고 싶다가도, 가끔은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지. 하루에도 기분이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는데 변덕을 모르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
“왜냐하면….”
불현듯 그의 말끝이 나직하게 잦아들었다. 페기는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이 조금 짙어진 것도 같았다. 페기가 아무것도 모르고 그의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동안에 예후르는 혀끝으로 지그시 아랫니를 눌렀다. 혓바닥 밑으로 은밀하게 침이 고여 왔다.
“…많은 것을.”
많은 충동을.
“알아 버렸으니까.”
페기는 멀뚱히 눈을 깜박였다. 알 듯 말 듯 한 말이었다. 하지만 더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예후르가 그녀의 허리를 바짝 당겨 왔다.
“너는 이렇게 변해 버린 내가 싫으니?”
“내가 널 어떻게 싫어해. 애당초 네가 변한 이유도….”
정색하고 대답하던 페기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직도 자신의 목에 칼을 찔러 넣던 예후르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잘린 그의 머리가 데구루루… 바닥을 구르는 악몽은 벌써 며칠째 그녀의 밤잠을 괴롭히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거야.”
결국에 참고 참았던 진심이 송곳처럼 뚫고 나왔다. 페기는 눈을 내리깐 채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넌… 너는 위대한 존재잖아. 조금 더 신중했어야지. 대체 뱀의 무얼 믿고….”
“네가 없어졌는데 신중할 겨를이 어디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