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8화 (288/328)

“하지만.”

페기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떨림 없이 입술이 열렸다.

“내가 뭐라고.”

예후르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페기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나 같은 하찮은 사람이 뭐라고 널 걸어. 너는 그러면 안 되잖아. 너는,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너는….”

단순히 뱀을 죽인 영웅이었을 때도 그의 위상은 남달랐다. 하지만 이제 그는 천 년 전 뱀을 봉인하고 교회를 세운 전설적인 초대 교황이며, 심지어는 신처럼 숭배되는 존재였다. 세상의 어떤 것도 그와 비견될 수 없었다. 페기는 그의 앞에서 작아지는 자신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그러지 마. 나 때문에 너를 걸지도 말고, 나 때문에 널 희생하지도 마. 나는 그저….”

“사랑해.”

덜컥, 그녀의 입이 다물렸다. 예후르의 입꼬리가 살며시 말려 올라갔다.

“이 말이 듣고 싶은 거지?”

아슬아슬하게 지탱되던 페기의 표정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는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못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한없이 애틋한 눈빛에 목이 메어 왔다.

왜 나를 사랑하실까.

지하 수로에서 나온 뒤로 줄곧 그녀를 괴롭히던 의문이었다. 고작 그녀를 위해 고귀한 목숨까지 내건 이유가 본인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사랑 때문이라면, 그 사랑의 이유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에겐 사랑의 이유가 있었다. 다정한 눈빛, 상냥한 어투, 사려 깊은 태도와 몸에 깃든 배려심…. 그녀를 죄 잊은 듯이 굴었던 북방에서조차 그를 놓지 못했던 까닭은 오래전 고향에서 죽어 가던 그녀에게로 내려왔던 따스한 손길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구원의 순간은 뼈에 박히고 혈관에 각인되었다.

하지만 그에겐 달리 이유가 없었다. 굳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저 높은 하늘처럼 아득한 존재인 그의 눈에 인간이란 죄다 고만고만해 보일 것이었다. 그녀만이 특별할 이유가 하등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불안했다. 감정에 미숙했던 그가 혹 상실의 아픔을 사랑으로 오인하여 그릇된 선택을 내렸던 것은 아닐지. 기쁨을 알고 슬픔을 아는 지금의 그가 서서히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지하 수로에서 내렸던 결정을 후회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다시 말해 줘.”

허공을 배회하던 그녀의 손이 살포시 그의 옷깃 위로 내려앉았다. 페기는 젖은 눈으로 애처롭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 번만 다시….”

“사랑해.”

더없이 명료한 고백이었다. 환청이 아니었음을 되새겨 주듯 선명한 어조. 페기는 하릴없이 고개를 떨구어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대었다.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던 돌덩이가 비로소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간신히 눈을 내리감았다.

“너도 날 사랑하니?”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페기는 맥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듣도록 외치고 싶었으나, 지친 몸은 물 먹은 솜처럼 축 처지기만 했다.

“영원히 사랑해?”

“…….”

“페기, 대답해 줘.”

그답지 않은 재촉에 페기는 어렵사리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그와 시선을 맞추며 부드럽게 눈을 접었다.

“응. 영원히.”

“…다행이다.”

그는 진심으로 안도한 기색이었다. 무엇이 그토록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를 일이나, 페기는 정수리를 스치는 그의 한숨을 느끼며 그의 품으로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영원.

할 수만 있다면 영원이 끝나도록 사랑하고 싶은 이 마음을 그는 알까.

“그럼 영원히 나만 보겠네.”

“…….”

“영원히 나만 생각하고, 나만 그리워하고.”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려던 페기는 돌연 이상한 느낌을 받고 멈칫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곱씹을 겨를도 없이 나긋한 목소리가 칼날처럼 내리꽂혔다.

“죽여 줘, 페기.”

페기는 그대로 멈추었다. 호흡도, 감각도, 생각도, 심지어는 살아 있다는 자각조차. 고장 난 기계처럼 정지된 그녀를 일깨우듯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스산하게 파고들었다.

“나를 죽여.”

그의 입술이 은밀하게 귓가로 닿아 온다.

“나를 죽이고 영웅이 돼.”

“…….”

“교황의 자리에 올라.”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목소리가 귓전을 마구잡이로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페기는 별안간 노도처럼 밀려드는 현기증에 허덕였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마치 교회당에서 연주되는 오르간 소리처럼 장엄하게 울려 오고 있었다.

“모두가 너를 사랑하고, 모두가 너를 숭배할 거야.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자리에서 만민의 추앙을 받으며 살아. 안전하고, 아늑하고, 안락하게.”

다섯 손가락 사이를 파고든 그의 커다란 손이 다물리는 자물쇠처럼 꽉 깍지를 낀다.

“그러면 다시는 그때처럼 처참하게 죽는 일이 없을 거야.”

죽을 것처럼 숨통이 막혀 왔다.

페기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쳐냈다. 하지만 단단한 그의 몸은 꿈쩍도 안 했다. 도리어 뒤로 밀려 나간 그녀가 위태롭게 몇 발짝 휘청거리다가 겨우 바로 섰다. 그러고 아연하게 들리는 얼굴이 핏기 없이 창백하기만 했다.

“뭐 하자는 거야…?”

속절없이 목소리가 덜덜 떨려 왔다. 그녀는 여린 손바닥에 손톱을 힘껏 박아 넣으며 어렵사리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냐고.”

“내가 약속했었잖아. 그 누구도 너를 해할 수 없는 영광된 자리로 인도하겠다고.”

허예지다 못해 시퍼런 빛까지 감도는 그녀와 달리, 예후르는 지극히 평온해 보이는 안색이었다. 페기는 이를 까득 갈았다. 온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 것처럼 참을 수 없는 열기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언제 그런 걸 바랐어. 난, 나는 그저 지금이면 돼. 그냥 이대로 우리 둘이 행복하면….”

“안 돼.”

“…….”

“그건 안 돼, 페기.”

그가 더없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페기는 넋을 놓은 듯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

“왜 안 되는 건지 말을 해 줘야…. 넌 알잖아,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다 알면서… 왜 항상 내가 바라는 것만은 주지 않으려고 해…?”

오직 그만 바라볼 때도 있었다.

오랜 약혼녀가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포기하지 못했던 마음. 하지만 그때의 그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외면하면서도 차마 그의 곁을 떠나지는 못하게끔, 죽지 못해 살아갈 수 있을 만한 애정만을 던져 주었다.

그가 믿어 주기만을 바랄 때도 있었다.

나는 죽은 카니나의 페기가 맞다고. 나를 죽은 자와 겹쳐 보는 너의 눈이 옳다고. 더 이상 나를 밀어내지 말고, 나를 상처 주지 말라고. 그리도 애원하고 절박하게 매달렸건만 돌아온 것은 화살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무섭게 덮쳐 오던 죽음의 한기를 그는 알까.

그러고는 지금이었다.

제자리로 돌아와 그와 함께하기만을 바랐던 나날들.

하늘에 태양이 둘이 될 수 없듯, 그녀와 공존할 수 없던 비올라는 마침내 사라졌다.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그녀의 곁에는 약혼하지 않은 예후르가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온 세상을 가진 듯한 기분이었다. 영웅의 위상, 교황의 자리. 그딴 건 바란 적도 없었다. 그녀는 분명 바라던 것을 모두 가졌었다.

아니, 가진 줄 알았었다.

“넌 언제나 그랬어.”

아무렇지 않게 외면하고, 아무렇지 않게 내팽개치고.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날 진창으로.

“그게 기쁨을 알고 슬픔을 안다는 사람이 할 말이니…?”

페기는 서럽게 토해 냈다. 달라진 줄 알았던 그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도리어 그녀를 아프게만 한다는 사실이 못내 그녀를 쓰라리게 했다.

“왜 다른 사람들처럼은 안 되는 거야. 날 사랑한다며. 네 사랑은 뭐가 그리 특별하길래… 뭐가 그리도 잘나서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냐고.”

“…….”

“뭐라고 말을 좀 해 봐!”

울먹거리는 소리가 교회당을 쟁쟁하게 울렸다. 그러나 석상처럼 버티어 선 그는 한 점의 표정 변화도 없이 묵묵하게 그녀의 고성을 흘려보낼 뿐이었다. 마치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처럼.

그러자 멀거니 그를 응시하던 페기가 짧은 헛숨을 내뱉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어.”

괜찮아질 만하면 다시 고꾸라지고, 행복해질 만하면 기어이 불행해지는 이 지겨운 쳇바퀴.

그녀는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이 몰이해의 구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울며불며 그에게 매달리는 것으로 부족하다면, 그가 치밀하게 짜놓은 이 판을 깨고 나가야만 했다. 고작 이것이 그가 바라는 결말이라면 더 이상 그에게 휘둘리고만 있을 생각이 없었다.

“…알아낼 거야. 네가 왜 이러는지.”

“뭐?”

그가 처음으로 반응했다. 선명하게 찌푸려지는 그의 미간을 보며 페기는 꿋꿋하게 대답했다.

“북방에서 그랬지. 갑자기 동부로 와 탐보프를 적으로 돌리는 너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미쳤다고 수군거렸어. 하지만 넌 죽은 내 복수를 하려던 거였고, 나를 비롯해 아무에게도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지.”

지난 법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넌 퀴테리아를 속이기 위해 네 자신을 미끼로 걸어야 한다고 했지만, 그 미끼가 뱀이라고는 얘기하지 않았어. 혹시나 내가 말릴까 봐 그랬니? 하지만 그런 중요한 얘기, 너는 늘 말해 주지 않았잖아. 네가 천사면서 뱀이라는 것도 어떤 목적이 없었다면 절대 나한테 털어놓지 않았을 거면서.”

사랑에는 비밀이 없다는 말을 페기는 믿지 않는다. 정체가 밝혀진 지금도 그는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으므로. 무슨 생각인지, 어떤 마음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그를 우습게도 그녀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으므로.

“그래도 지금까진 원망하지 않았어. 결국에는 네 뜻대로 잘 풀렸으니까. 너는 특별하니, 나를 비롯해 평범한 사람들과 하나하나 의논하며 일을 진행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

“하지만 이건 아니야.”

손끝이 바르르 떨려 왔다. 가눌 수 없는 슬픔 때문인지, 아니면 참을 수 없는 노여움 때문인지 알 길이 없다.

“이것만은 용납이 안 돼. 못해. 난 안 할 거야, 예후르.”

그가 확연하게 찡그린 얼굴로 한 발짝 다가왔다. 동시에 페기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네가 왜 이러는지 먼저 알아야겠어. 너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너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요구하는 이유가 있겠지만 그래도 안 돼. 문제가 있으면 같이 해결해 나갈 생각을 해야지, 왜 내가 널… 그렇게 해야 해.”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을 돌려 가며 페기는 간신히 울음을 참아 냈다. 아직은 무너질 때가 아니었다. 무너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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