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백작은 기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 말하는 것을 보면 도망쳐 온 것은 아닐 테고…. 전하께서 무슨 명령이라도 내리신 것이냐.”
“아, 예.”
라만이 퍼뜩 생각난 것처럼 안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실은 전하께서 무얼 찾고 계시는데 말입니다. 아무리 봐도 제 눈에 익은 문자라….”
똑똑.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백작은 잠시 기다리라는 듯 라만에게 손짓하곤 문가를 돌아보았다.
“들어와라.”
그러자 곧장 문이 열렸다. 고개를 빼꼼 내미는 사람은 다름 아닌 셀마였다.
“족장님. 잠시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왜?”
“방금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왔는데….”
터덜터덜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온 셀마가 구깃구깃해진 종이를 펼쳐서 내밀었다.
“카타리나 공작이 온다는데요?”
종이를 받아 들던 몬틸로 백작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허공에서 맞부딪히는 백작과 라만의 시선에 순수한 의문이 서렸다.
카타리나 공작의 마차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쉬쉬하였으나 이미 요새에는 성도에서 아주 높으신 분이 오신다는 소문이 파다하였으므로, 외부인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웬만한 이스파갈족들은 모두 철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저 마차 좀 봐. 저기 붙은 건 황금인가? 쑥덕거리는 소리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번지는 가운데, 별안간 마차의 문이 쾅 열렸다.
“우웩!”
깜짝 놀라 창을 치켜들었던 경비병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경계 태세를 풀었다. 마차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거의 공처럼 굴러떨어진 소년이 웩웩거리며 토악질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마차에서 내린 또 다른 소년이 조금 질린 낯으로 그의 등을 엉성하게 쓸어 주었다.
“너도 어지간하다, 진짜….”
“우욱!”
“다들 보고 있지만 그냥 토해.”
말하기 무섭게 누런 위액이 줄줄이 쏟아져 내렸다. 철문 너머에서 상황을 엿보고 있던 이스파갈족들이 표정을 구기며 슬그머니 고개를 물렸다. 온통 습한 와중에 시큼한 냄새가 퍼져 오는 것만 같았다.
“길이 많이 험하긴 했지.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하긴 하다. 안 그래요, 누님?”
찬란한 금발 머리를 흩날리며 소년, 요슈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호위 기사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오던 페기가 마침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짧게 굽실거리는 얇은 은발이 바람결에 물결친다.
“의사한테 먼저 보이자.”
“그래야죠…. 아니, 근데 문은 왜 안 열어 줘?”
요슈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까치발을 들어 철문 너머를 기웃거렸다. 그때, 고요한 정적을 뚫고 철문이 더디게 열리기 시작했다. 끼익, 쇳소리를 내며 멈추는 육중한 철문 사이로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라만이었다.
“전하.”
그는 페기에게로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페기는 자꾸만 바람결에 나부끼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피로에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차라에게 받았던 팔라브르 유적의 본은.”
“보관하고 있습니다.”
페기는 입술을 떼었다가 다시 닫았다. 짐작대로 라만은 해석이 불가능하던 팔라브르 유적의 말미를 알아보기 위해 세투발로 떠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해답이 있는 걸까.
페기는 경련하듯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쥐며 라만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요슈아까지 조심스레 차라를 부축하여 안으로 들어오자, 등 뒤로 철문이 거대한 쇳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채 눈만 크게 뜨고 사방을 둘러볼 뿐이었다.
피부 검은 사막인들이 철문 주위로 가득 모여 있었다.
의심과 호기심, 혹은 호감과 경계. 한데 뒤섞인 감정들이 찌를 듯 그들을 덮쳐 왔다. 페기는 좀처럼 입술을 떼지 못했다.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이국의 언어가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를 타고 출렁이고 있었다.
앞서 걷고 있던 라만이 우두커니 멈춰 선 그들을 뒤늦게 발견했다.
“전하. 이쪽으로.”
인파를 뚫고 다가온 라만이 그들을 오르막길로 인도했다. 페기는 라만의 등 뒤로 바짝 붙어서 걸으며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늘 보았던 경비대의 우람한 전사들과는 달랐다. 늙고 어리고 연약한 일반인들이 대다수였다.
“이스파갈족은 전부 여기 모여 사나요?”
나지막이 묻는 소리에 라만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딜 가든 배척만 당할 테니 한곳에 모여 사는 것이 낫습니다. 적어도 여기는 안전하니까요.”
어느 누가 접경 지대를 안전하다고 말할까.
페기는 심란해진 눈으로 깎아지를 듯한 낭떠러지나 좁다란 길목, 높게 치솟아 하늘의 절반을 가리는 요새의 벽을 훑어보았다. 빈말로도 일반인들이 살 만한 곳은 못 되었다. 요새의 용도를 생각하면 기껏해야 병사들이 순환하며 지낼 곳임에도, 여기서는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들이 천진하게 뛰어놀고 있었다.
모두가 아는 사이인지, 라만은 요새를 올라가면서 지나치는 아이들의 머리를 익숙하게 헤집곤 했다. 거친 손길이었지만 그마저 좋다는 듯 아이들은 까르르 웃기만 했다.
페기는 제게로 돌진하는 아이들을 피하기도 하고, 옆으로 비켜서 스쳐 보내기도 하며 요새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다. 중간에 더 이상은 도저히 못 걷겠다며 뻗어 버린 차라는 요슈아와 함께 의사에게로 실려 보낸 뒤였다.
오래지 않아 라만은 계단에서 벗어나 투박하게 벽돌을 쌓아 올린 어느 석조 건물로 들어갔다. 벽이 두껍고 창문은 좁아 일조량이 적은 건물이었다. 한낮에도 꼭 늦저녁처럼 어둑한 복도를 가로질러 어느 방 앞에 도달한 라만이 가볍게 노크하곤 문을 열어젖혔다.
페기는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종이 특유의 쿰쿰한 냄새로 가득한 방 안에는 며칠 밤을 새운 듯한 몰골의 몬틸로 백작이 있었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백작이 교국의 예법대로 한 손을 가슴에 올리며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페기는 말없이 고개만 까딱였다. 그녀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보겠다는 듯 소파에 한가득 쌓여 있는 서류를 옮기려던 백작이 실수로 다른 서류 더미를 밀어 버리고 말았다.
붙잡아 볼 겨를도 없이 서류 더미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백작은 망연자실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고, 페기는 부옇게 올라오는 먼지를 피해 고개를 돌리며 얕게 기침했다. 그러자 묵묵히 있던 라만이 다가왔다.
“제가 치우겠습니다. 대화 나누십시오.”
“그래….”
서류를 줍기 위해 쭈그려 앉은 라만의 어깨를 토닥이며 백작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피로에 가득 잠긴 얼굴을 한참이나 양손으로 문지르더니, 뒤늦게 페기의 존재를 다시 깨닫고는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앉으십시오, 전하.”
백작이 가리키는 자리에도 역시 서류들이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페기가 조심스럽게 그 틈새로 들어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자그만 파동에도 쓰러질 것처럼 사방의 서류 더미들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많이 바쁜 모양입니다. 내가 때를 잘못 찾았군요.”
“아닙니다. 그저 산사태 문제가 생각보다 조금 커져서….”
“산사태요?”
페기의 반문에 백작이 잠시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정신없는 와중에 말이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아… 별문제는 아닙니다. 최근에 산사태가 일어났는데,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선 더 튼튼한 목책을 세워야 해서 말입니다. 전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사안은 아니니 부디 염려는 거두어 주십시오.”
페기는 할 말을 잊은 채로 멀거니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사방 가득한 서류들이 죄다 지출 관련된 내용이긴 했다. 교회의 재정은 안정화된 지 오래인데 여전히 이들에 대한 지원은 열악한 것일까. 페기는 여기까지 오면서 스쳐보았던 요새의 허름한 풍경을 떠올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나저나 어느 비석의 내용을 해석하고 싶어 오신 거라고요.”
퍼뜩 정신을 차린 페기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도 본을 보았나요?”
“예. 확실히 신어(神語)와 유사하더군요.”
“신어…?”
처음 들어 보는 단어였다. 페기가 설핏 미간을 찌푸리자, 백작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막의 신관들이 구사하는 언어입니다. 보통은 경전을 쓰거나 제례를 행할 때 사용되지요.”
백작은 그러면서 품속에서 팔라브르 비석의 말미를 뜬 본을 꺼냈다. 페기는 조금 황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 문자, 신성 시대에 사용되었던 사어와도 유사한데요.”
“…그렇습니까?”
백작이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의아하게 눈을 떴다. 하기야 먼 사막에서 온 그가 이제는 사용되지도 않는 먼 옛날의 언어를 알 리가 없었다. 페기는 혼란스러운 기분을 접으며 애써 말을 이었다.
“좌우간 백작은 그럼 해석이 되었나요?”
“아쉽게도 저 역시 신어에 아주 능통한 것은 아니라서 말입니다. 겉핥기로만 아는 저 녀석보다는 조금 나아도….”
한심하다는 듯한 백작의 눈길이 잠시 라만에게로 떨어졌다.
“아무튼 중요한 일인 것 같아 신당에 말을 전해 두었습니다. 급한 일이라 일렀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신녀들이 해석을 마쳤을 겁니다.”
“신당이 어디죠?”
페기가 급한 마음에 벌떡 일어서자, 백작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내저었다.
“고정하십시오, 전하. 신당의 문은 밤에만 열립니다.”
“네…?”
“저희 이스파갈족은 달의 신 아나키오스를 주신으로 모십니다. 하여 달이 뜨는 때에만 신당의 문이 열리는데….”
그때, 갑자기 바깥에서 빗소리가 들려왔다. 성실하게 서류를 줍던 라만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반사적으로 창가를 돌아보았던 백작 역시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곤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구겼다.
“이런….”
페기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무슨 일인가요?”
“…말씀드렸듯이 신당은 달이 뜨는 때에만 문을 엽니다. 비가 밤까지 계속 내려 달이 뜨지 않는다면, 오늘 밤 신당의 문은 열리지 않겠지요.”
“하, 하지만…!”
당혹하여 목소리를 높이려던 페기가 멈칫했다. 백작이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이교의 문화. 아무리 백작이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한들, 쉽사리 건드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결국에 페기는 하릴없이 백작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지나가는 소나기이길 간곡히 바라지만, 백작의 말로 아그레다 산은 본디 습하여 비가 자주 내리고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잘 그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심지어는 내일이라도 그치면 다행이라는 첨언까지.
다시 라만의 뒤를 따라 걸으며 페기는 눅눅하게 가라앉는 습기와 차가워지는 공기의 온도를 느꼈다. 무섭게 쏟아붓는 빗소리만큼이나 불투명한 내일의 무게가 그녀의 어깨를 아프게 짓눌러 왔다. 페기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늪으로 침잠하는 생각은 정신을 병들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