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히는 한여름 불볕을 피해 기어 들어갔던 쓰레기통. 거기서 조용히 죽어 가던 그녀에게로 한 줄기 빛처럼 그의 손길이 내려왔다. 구원의 순간만은 선명했다. 너무 밝아 주변의 별빛을 죽이는 태양처럼 그의 존재는 이전의 기억을 모조리 까마득하게 만들어 버렸으므로.
그러나 최초로 맞이한 죽음과 함께 빛이 소멸하고 말았다.
죽음과 함께 찾아온 것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한기와 빛이 사라진 어둠. 동시에 정신은 암전되었고, 3년 후 그녀는 비 내리는 무덤가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 3년의 공백.
아마도 머릿속 어딘가 깊숙이 파묻혀 있을 기억을 페기는 감히 떠올릴 수 없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였다. 많은 사람들이 어미 배 속에 있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듯. 그리해 마찬가지로 페기가 자신의 부모를 기억하지 못하듯.
계속해 울려오는 빗소리는 어지럽던 감정을 가라앉히고 고요한 상념 속으로 사람을 끌어당긴다. 페기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사색에 잠겼다. 잠길 듯 밀려오는 어둠과 늪처럼 발목을 빨아 당기는 졸음. 그렇게 깜빡 잠이 든 것도 같았다.
비는 이튿날에도 계속 내렸다.
빗줄기는 조금 약해졌지만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는 산사태 공포에 더 많은 이들이 안전지대로 피신을 왔다.
성도에서 내려온 높으신 분들을 대접한답시고 텅 비어 놓았던 숙소는 어느새 더벅머리 아이들로 가득 찼다. 몬틸로 백작이 거듭 용서를 구해 왔으나, 기실 페기는 거멓게 죽어 가는 그의 몰골을 보았을 때부터 격려의 말만 해 주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비만 그치면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전하를 방해하지 말라 단단히 일러둘 터이니….”
그러나 백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린 사내아이가 퍽 소리가 나도록 페기를 치고 지나갔다. 순간 백작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덕분에 페기는 아프다는 티도 못 냈다.
“저, 전하….”
“괜찮아요, 백작.”
“당장 아이를 잡아다가….”
“라만. 백작을 데려가요.”
대기하고 있던 라만이 기다렸다는 듯 백작을 부축하여 빠져나갔다. 페기는 작게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업무가 과중한 것은 알겠으나, 백작은 누가 보더라도 깊은 수면이 필요한 모습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라와 요슈아가 홀딱 비에 젖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다녀왔니?”
차라는 대답 대신 커다랗게 재채기를 하며 코를 훌쩍였다. 그 옆에서 요슈아는 흙탕물이 흥건하게 들어찬 장화를 벗어 탁탁 물기를 털어 내고 있었다.
“어우, 이 지긋지긋한 비….”
비가 내린 지 고작 하루 만에 질린 표정을 한 요슈아가 물 먹어 무거워진 우비와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페기가 손수 우비를 벗겨 주었다.
“길은?”
“다행히 신당으로 가는 길은 무사하더라고요. 군데군데 잠긴 곳이 있긴 한데, 적당히 돌아가면 괜찮을 것 같아요. 비 그치면 물도 좀 빠질 테고요.”
말을 끝마친 요슈아가 젖은 강아지처럼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사방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요리조리 피해 마른 수건을 가져온 페기가 요슈아와 차라의 머리 위에 하나씩 수건을 덮어 주었다.
“그런데 길보다는 목책이 문제더라고요.”
“목책?”
페기의 반문에 말없이 머리만 탁탁 털던 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산사태 나면 꼼짝없이 당하게 생겼어.”
신당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지난번 산사태가 일어났던 위험 지역이 있었다. 만약 비가 그치기 전에 또다시 산사태가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신당으로 가는 길은 한없이 요원해질 것이었다.
“잠잠하기만을 바라야겠지만… 솔직히 이번만이 문제는 아니잖아. 비는 언젠가 또 내릴 텐데 언제까지 비 올 때마다 저 불안한 목책에 기댈 수 있겠어.”
“슬쩍 보니까 비용이 문제가 아니라 기술이 문제인 것 같아요.”
요슈아가 척척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사막에서 유목 생활 하던 사람들이 산사태를 뭐 얼마나 대비해 봤겠어요. 아는 잡 기술을 총동원해서 목책이라도 세운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엔 영 아니에요. 어디 물어볼 데도 마땅찮았을 테니 이해는 간다지만….”
중얼중얼하던 요슈아가 갑자기 코를 킁킁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누가 개코 아니랄까 봐, 젊은 아낙들이 삶은 감자를 가득 담은 소쿠리를 이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요슈아는 젖은 장화를 내팽개치고 전광석화처럼 달려갔다. 그에 비하면 한참 느리지만 차라도 나름대로 열심히 뛰었다.
두 사람이 어린애들과 뒤섞여 감자를 나누어 먹는 동안, 페기는 여기저기 나동그라져 있는 수건이나 우비 따위를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젖은 장화를 뒤집어 세워놓은 그녀가 가만히 고개를 들어 먼 산을 올려다본다. 빗속으로 스며 올라가는 안개는 날이 갈수록 짙어지고만 있었다.
안개는 밤중에도 계속되었다.
빗줄기는 눈에 띄게 가늘어졌으나, 달도 뜨지 않았을뿐더러 이 야밤에 산길을 오르기란 무리였다. 감자를 먹다 말고 종일 아이들과 몸으로 놀아 주었던 차라와 요슈아는 곯아떨어진 지 오래였다. 페기는 어느새 고요해진 실내를 돌아보곤 침실로 들어갔다. 어젯밤 홀로 잠들었던 침실에는 젊은 아낙들과 어린아이들이 뒤엉켜 잠들어 있었다.
머무는 사람은 많은데 방은 적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젊은 아낙들은 무어라 감사를 표하려는 것 같았지만 언어가 서툴러 제대로 의미가 통하지 못했다. 세투발에서 교국의 중앙어를 원활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성도를 자주 드나드는 경비대원들뿐인 것 같았다.
페기는 잠든 아이들 사이를 조심조심 디뎌 갔다. 나름대로 그녀의 자리라고 마련해 놓은 듯한 이부자리는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아이들로 인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페기는 배를 까고 잠든 아이들에게 손수 이불을 덮어 주곤 어두운 구석 자리로 들어갔다. 이불을 깔고 눕자, 말똥말똥한 눈에 천장의 윤곽만이 어렴풋하게 들어왔다.
…너는 잠들었을까.
불쑥 솟아오른 생각은 수만 가지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페기는 겁먹어 달아나는 사슴처럼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것투성인 지금은 적어도….
그렇게 밤새 선잠에 뒤척이다가 새벽녘 겨우 잠이 든 페기는 느지막한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떴다.
볕 닿지 않는 구석에 처박혀 있던 그녀가 멀리 창가로 쏟아져 내려오는 눈부신 햇살을 보곤 멍하니 윗몸을 일으켰다. 어젯밤 잠든 아낙들과 아이들로 가득하던 방 안에는 그녀 혼자 남아 있었다. 휑뎅그렁한 공간에 햇살만 가득하자 도리어 빈 느낌만 가득하다.
“페기!”
갑자기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차라였다. 그 역시 조금 전에야 일어난 듯, 얼굴에 물 칠만 겨우 한 몰골이었다.
“봤어? 비 그친 거?”
“아….”
맥없이 눈만 깜박이던 페기가 다시 창밖을 돌아보았다. 언제 비가 내렸었냐는 듯 청명한 날씨. 얼핏 내다보이는 먼 산에는 안개조차 걸쳐 있지 않았다.
“빨리 식사하고 떠나자. 산에는 밤이 일찍 찾아와서 최대한 빨리 출발해야 한대.”
페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겨진 잠옷 대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나가자, 고소한 냄새가 풍겨 왔다. 그녀는 이미 저만치 자리 잡고 앉아 그릇에 코를 박고 있는 차라와 요슈아 곁으로 다가갔다. 기다렸다는 듯 젊은 아낙이 내어 주는 그릇에는 당근과 양파, 감자, 고기 등을 큼직하게 썰어 눅진하게 끓인 스튜가 담겨 있었다.
페기가 깨작거리며 스푼을 서너 번 놀릴 동안에 차라와 요슈아는 경쟁적으로 그릇을 비워 나갔다. 그녀는 대강 보조를 맞추다가, 두 사람이 부른 배를 두드리며 그릇을 내려놓을 즈음 함께 식사를 끝마쳤다. 때맞춰 라만이 가벼운 차림으로 당도했고, 세 사람은 쉴 틈 없이 신당으로 향하는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틀 새 빗물에 쓸려 나간 산길은 빈말로도 곱진 못했다. 군데군데 파인 웅덩이는 약과였다.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로 물이 고인 곳이 나오면 돌아가야 했고, 나무가 뿌리째 뽑혀 길을 가로막고 있으면 다른 이들의 부축을 받아 나무를 넘어야 했다. 온종일 산을 타도 멀쩡할 라만과 요슈아를 제하면, 페기와 차라는 중간중간 쉬어 주기도 해야 했다. 당연히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반나절가량 힘들게 산길을 올라가니 비로소 끝이 보였다.
그나마 상태가 나은 페기는 제 발로 걸어 올라가기라도 했지만, 차라는 진작 라만의 등에 업힌 신세였다. 너무 지쳐서 창피함도 못 느끼던 차라는 불현듯 눈가로 드리워지는 붉은 빛을 느끼곤 고개를 들었다. 확 트여 오는 시야에 불그스름한 석양이 한가득이었다.
“와!”
어느덧 산봉우리였다.
어디 하나 걸리는 데 없이 사방으로 펼쳐진 저녁 하늘. 페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지는 해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서산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태양이 마치 무언으로 그녀를 부르는 것처럼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한참이나 넋 놓고 노을을 구경하던 그들은 불현듯이 가까워지는 인기척을 느꼈다. 이국적인 의복을 차려입은 여인이 거친 바람을 헤쳐 그들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신관님.”
업고 있던 차라를 땅에 내려놓은 라만이 황급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단정한 몸짓으로 마주 인사한 신관의 눈길이 넌지시 페기에게 닿았다.
“해석을 들으러 오신 분인가요?”
페기는 조금 놀란 표정을 했다. 신관은 라만과 비슷할 정도로 중앙어에 능숙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신관이 별말 없이 뒤돌자, 페기는 황급히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저만치 보이는 석조 건물을 향해 외길로 걸어가는 동안 라만이 속삭이길, 신관은 어릴 적 용에 탑승하여 경비대 역할을 수행했다고 하였다.
신당이라 불리는 건물은 단순하다 못해 투박해 보이는 생김새였다. 겉보기로는 그저 벽돌을 쌓아 올린 직육면체의 건물이었는데, 채광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는지 실내는 어둡다 못해 캄캄할 지경이었다. 하기야 산봉우리라는 위치를 고려한다면 바람에 쓸려 내려가지 않는 견고함이 가장 중요할 터.
신관은 촛대를 들고 익숙하게 좁은 복도를 밟아 나아갔다. 페기는 조심스레 그 뒤를 따르며 주위를 흘깃거렸다. 복도 양옆으로 문 없는 방이 여럿이었으나, 입구마다 두꺼운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어 안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여러 방에서 새어 나오는 이국의 언어만이 그녀의 귓가를 간질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