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6화 (296/328)

“…네?”

“제 앞으로 누우세요.”

멀거니 눈만 깜박이던 페기가 어설픈 몸짓으로 욕조에 눕기 시작했다. 온천수인지 짙게 유황 냄새가 나는 물은 다행히 따뜻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마지막으로 뒷머리를 누이자, 금세 귓전으로 물이 들어찼다.

“제 목소리 들리시나요?”

먹먹해진 귓가로 신관의 음성이 둔중하게 들려왔다. 페기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눈을 깜박였다. 따뜻한 물속에서 온몸의 근육이 이완되고 있었다. 게다가 청각은 둔해지고 시각마저 부연 습기에 가려지니, 어느덧 감각의 세계와 멀어진 그녀는 점점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앞으로는 제 목소리만 따라오시면 됩니다.”

다시 눈을 깜박이려는 찰나에 코 밑으로 무언가 닿았다. 페기는 그것을 의심할 새도 없이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쓰고 매캐하고… 도저히 알 수 없는 냄새가 콧속으로 스미는 것과 동시에 눈이 스르르 감겼다. 마치 눈꺼풀에 무거운 바위라도 매달린 것처럼.

그리고 신관의 목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울려 왔다.

“이제 당신의 심연으로 들어가 볼까요.”

암전이었다.

제 손발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통 캄캄한 와중에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만이 선명했다. 그녀는 마치 거친 풍랑 속을 아슬아슬하게 헤쳐 나가는 조각배처럼 이리저리 떠돌았다. 금방이라도 세상이 뒤집힐 것처럼 마구 흔들리는 통에 구역질만 치밀었다.

그러던 중 요동치던 움직임이 불시에 멈추었다.

아연할 새도 없이 들이닥친 것은 등짝을 파고드는 고통이었다. 페기는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덮인 눈꺼풀 안으로 어디선가 보았던 익숙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짙은 안개, 황량한 벌판, 나부끼는 낡은 담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그녀는 고꾸라지는 자신의 몸을 느끼며 깨닫는다.

아, 여기는 북방이구나.

안개로 가려진 저 어딘가에 활을 든 예후르가 있을 것이며, 사술이 벗겨진 그녀의 맨얼굴을 보고 지금쯤 충격에 휩싸였을 것이다.

페기는 다시 찾아온 둔통 속에서 차츰차츰 발치로 스며 올라오는 죽음의 한기를 감지했다. 싫어. 끔찍해. 도저히 움직이지 않는 몸을 떨며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마치 사자(死者)의 차가운 손길이 닿아 오는 것처럼 하반신이 시려 오기 시작했다.

“…기선 안 되겠군요.”

먼 데서 신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 봅시다.”

등골을 아프게 파고들던 화살촉의 감각이 일순간 멎었다. 스멀스멀 피어 올라오던 죽음의 한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페기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더듬더듬 자신의 팔뚝을 감싸 쥐었다. 이런 것인 줄 알았다면 보다 신중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그녀는 조금 전의 경험으로 신관이 어떤 기억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려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곧이어 닥칠 기억이 무엇인지, 모르고 싶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하릴없이 덮쳐 오는 공포의 파도에 휩쓸려 그녀는 감긴 두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기억이 밀려오고 있었다. 미리 안다고 하여 대비할 수도 없는 그날의 악몽.

순간 왼 손등에 어마어마한 격통이 몰려왔다.

본능적으로 입이 벌어지고 목에 핏대가 섰다. 그녀는 귓전에 와 닿지도 않는 비명을 내지르며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얼굴을 적시는 것이 눈물인지 아니면 그날의 빗물인지조차 구별할 수 없었다. 다만 부서지던 손과 부서지던 꿈과 부서지던 지난 모든 삶이, 마치 그때로 되돌아간 것처럼 그녀를 서럽게 만들었다.

“고통은 잊으세요.”

또다시 먼 데서 들려오는 음성을 향해 페기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더 이상은 감당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과거를 극복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 아니라, 과거를 묻어 두고 돌아보지 않은 것이었다.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급급했던 그녀에게 지난날은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였다.

그러나 과거의 악몽은 계속 펼쳐지고 있었다. 페기는 가쁘게 숨을 헐떡였다. 시끄럽게 지면을 두드리던 빗소리, 억세게 옥죄인 사지, 조롱과 멸시를 던지는 살인자들…. 그녀의 감긴 눈은 기억 속 야밤의 어둠을 멍하니 훑는다. 곧 칼날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을 것이다.

“고통은 흘려보내세요.”

어떻게.

“이미 지난날의 감각이에요. 한때의 고통에 매몰되지 말고 본인을 똑바로 마주하셔야 합니다.”

우스운 말이다.

지난 고통이라고 내 고통이 아니게 되던가.

하지만 냉소적으로 지껄였던 혼잣말과는 다르게, 바스라진 왼손의 고통은 시시각각 경감되고 있었다. 이미 끔찍한 고통 속에 한바탕 뒹굴었던 페기는 제 가슴팍으로 돌격하는 칼날을 맥없이 응시하기만 했다. 싸한 둔통이 심장을 훑고 지나갔으나, 머리를 절절 끓게 하던 격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저물어 가는 삶을 느꼈다. 온몸의 감각이 멀어지고 또다시 죽음의 한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때는 그다지도 못 견디게 차가웠던 냉기가 이제는 남의 감각인 것처럼 한없이 아득하기만 했다. 죽어 가는 저를 버려두고 떠나는 살인자들, 멈추지 않는 장대비. 과거를 똑바로 마주하라며 거듭 되뇌던 신관의 음성마저 어느 순간부턴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깊디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심연은 검은 호수고, 검은 바다였다. 무뎌진 감각은 물의 온도를 느끼지 못했지만, 머리 위로 아스라하게 멀어져 가는 빛만은 분명했다. 침몰하는 그녀는 가만히 손을 뻗어 보았다. 머나먼 곳에서 아른거리는 빛은 점점 깊어지는 수심에 먹혀 조금씩 사라져 갔다. 어둠에 뜯어 먹히고 삼켜지며.

마침내 그녀는 밑바닥에 이르렀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본들, 한 치 앞도 구분할 수 없는 암암한 어둠뿐.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눈을 굴렸다. 무뎌진 감각에도 스산한 냉기가 뻗쳐 오고 있었다. 덜컥 겁이 난 그녀는 무작정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보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들려오지 않는 신관의 목소리가 시급했다.

그러나 닿아 오는 것은 짐승의 성난 목울음 소리.

…크릉.

본능적으로 어깨가 움찔 튀었다. 페기는 황급히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하얗게 질린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뒤엉키기 시작한다.

…크르릉.

하물며 하나가 아니었다. 둘, 셋, 넷…. 점차 늘어나는 숫자를 헤아리며 그녀는 덜덜 뒷걸음질을 했다. 그녀는 저 울음소리를 안다. 뼈에 새겨진 공포가 되살아나려 했다.

그 순간, 불이 지펴졌다.

타오르는 불길이 삽시간에 사방으로 번져 갔다. 페기는 다급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퍼져 가는 불길 근처로 검고 질긴 가죽, 쐐기처럼 박힌 흉한 가시와 투박한 이빨이 설핏 드러났다. 저건 짐승이 아니다. 한낱 짐승일 수가 없다.

마귀, 하고 입술을 달싹이는 찰나에 소름이 끼쳐 올랐다.

질겁한 페기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무작정 뒷걸음질했다. 공포에 질린 머리가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았다. 고장 난 기계처럼 경황없이 발을 내딛던 그녀는 별안간 단단한 무언가와 부닥치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등골을 서늘케 하는 섬뜩함이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었다.

크르릉!

뒤를 돌아보는 그녀의 눈앞으로 날 선 손톱이 스쳐 지나갔다. 페기는 발작적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물러났다. 목전에 거대한 마귀가 우뚝 서 있었다. 고개를 쳐들고 악에 받쳐 울부짖는 모습에 뒷덜미가 다 저릿했다.

문제는 그 한 마리가 아니었다. 울부짖는 마귀에게 화답하듯 이곳저곳에서 울음소리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울음 섞인 숨을 헐떡이며 몸을 움츠렸다. 이것도 그저 지나간 기억인가. 하지만 내가 왜 이런 곳에, 왜 마귀와 함께….

금방이라도 덮쳐 올 것처럼 사방에서 발 구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면이 갈라질 것만 같은 진동. 그녀는 눈앞의 현실을 마주하지 못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귀를 막았다. 궁지에 몰린 사냥감처럼 애처롭게 떨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별안간 눈앞의 마귀가 사지를 뒤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호응하던 울음소리마저 산발적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페기는 황망히 마귀를 올려다보았다. 근육에 잔 핏줄이 돋을 만큼 힘이 잔뜩 들어간 팔다리가 무언가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속 시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동시에 불길이 마귀의 온몸을 가로질렀다.

크아아아악!

고통을 못 이겨 목 놓아 외치는 소리가 쟁쟁하게 울려 퍼졌다. 반쯤 넋 놓고 그 모습을 응시하던 페기가 뒤이어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둘러싼 다른 마귀들의 몸에도 불씨가 달라붙고 있었다. 불길 속을 뒹굴며 고통에 신음하는 괴물들의 모습에서 페기는 멍하니 경전의 내용을 떠올렸다.

빛이 닿지 않는 먼 지하.

혹한이 몰아치는 암흑 속에는 광휘의 천사 미할리나가 지피고 다른 일곱 천사들이 입김을 불어 퍼트린 성화가 타오른다 하였다. 날개 없는 마귀들은 하염없이 불길 속을 떠돌아야 하나, 죽음을 선사 받지 못한 그들의 영혼은 영속된 고통을 면치 못하리니.

타오르는 불길은 차츰 빛을 잃어 가고, 온몸을 뒤틀며 고통스러워하던 마귀들도 점차 어둠에 먹힌다. 잦아드는 소요 속에서 페기는 불안에 떨리는 양손을 꽉 마주 잡았다. 이대로 끝인가. 정녕 이제는 여기서 벗어날 수 있나.

그런데 어쩐지 손목이 무겁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손목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힘을 줘 본들, 양 손목이 옥죄어져 하나로 겹쳐질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스산한 쇳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잘못 들었나, 의심하는 순간에 소름 끼치도록 날카로운 쇳소리가 고막을 찢을 것처럼 울려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귀를 꿰뚫는 통증에 놀라 엎어지고 말았다. 손목이 붙들려 귀를 틀어막을 수도 없다. 다시 일어서려 해도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엉겁결에 양손을 뻗어 보자, 발목을 칭칭 감은 쇠사슬의 감촉이 느껴졌다.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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