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8화 (298/328)

다급하게 돌아가던 머리는 이내 세투발에 닿아 신관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려 냈다. 겨우 움켜쥔 기억의 단초가 순식간에 그녀를 현실로 끌어 내렸다.

“저기….”

그녀는 드러난 발목을 본능적으로 감싸 쥐며 휙 뒤를 돌아보았다. 조심스럽게 다가오던 차라가 그녀의 반응에 놀라 얼떨결에 멈춰선다. 그 뒤에 서 있던 요슈아와 라만도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기색이나, 페기에겐 더 이상 남을 돌볼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그저 존재감만이 뚜렷한 진실.

그녀는 말라붙은 입술을 파르르 떤다. 역한 토기가 몰려왔지만, 입을 틀어막을 여유조차 없었다. 다만 죽도록 부정하고 싶은 진실이 계속해 역류하여 원하지도 않는 반복이 이루어질 뿐.

내가 본 것.

내가 느낀 것.

내가 기억하는 것.

그리 병적으로 진행되던 되새김질 끝에 어떤 깨달음이 둔중하게 그녀의 머리를 치고 갔다.

허공을 응시하던 보랏빛 눈에 서서히 초점이 사라진다. 발목을 가리고 있던 손끝은 움찔거리며 오므라든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의식해 본 적 없던 발목이 못 견디게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노엽다 못해 수치스럽다. 손안에 칼이 들려 있다면 당장이라도 발목을 잘라 낼 것처럼.

“내가….”

차마 이어지지 못하는 말만 하염없이 되풀이하며.

“내가….”

***

황량한 벌판에는 죄인을 가두는 탑이 세워져 있다.

민가는 멀고 도시는 더더욱이나 멀다. 간수가 실수로 죄인을 죽여도 아무도 모를 것이며, 죄인이 몰래 탑에서 뛰어내려도 역시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런 곳에 가둬지는 죄인들은 으레 죽음을 선고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중죄인이었다. 형을 선고받기 전에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라는 냉엄한 전언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아주 오래간만에 탑에 든 죄인은 멀쩡하게 하루를 영위하고 있었다.

뜨는 해와 함께 일어나 지는 해와 함께 잠들며, 남는 시간은 경전을 읽거나 명상을 하는 등 일반적인 수도사의 삶을 이어 갔다. 조악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모습은 하물며 성인처럼 경건하니, 본디 사람을 어려워하던 간수는 죄인을 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지평선 부근에서 흙먼지가 일어난다 싶더니, 어느 높으신 분이 호위 기사를 잔뜩 이끌고 나타났다.

본인이 죄인이기라도 한 것처럼 허리를 깊숙이 숙인 간수는 제 머리털보다 더 윤기가 나는 것 같은 말의 갈기를 보곤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모르긴 몰라도 성도에서 내려오신 분이 분명했다. 그런 분과는 눈을 마주하지 않는 것이 상책일지니, 죄인을 보러 왔다는 말씀에 토 한번 달지 않으며 아주 공손한 태도로 탑을 안내해 들어갔다.

그 시각, 죄인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탑 꼭대기 방에서 조용히 경전을 탐독하고 있었다. 낡은 계단을 밟아 올라오는 발소리가 여럿이니, 이미 손님의 등장을 알아챘음이다. 하지만 죄인은 자물쇠가 풀리며 문이 열리는 와중에도 경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문턱을 사이에 둔 고요한 적막.

혼자서 안절부절못하던 간수는 살펴보시라는 말만 남기곤 헐레벌떡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덤벙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지자 비로소 손님이 문턱을 넘어 방으로 들어왔다.

“…퀴테리아 만포르차.”

죄인, 퀴테리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천재 예술가 겔랑수스의 조각상보다 완벽한 사내를 마주하며 가느다란 미소를 띤다.

“늦으셨습니다, 엘피도 공작 전하.”

쇠창살 사이로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는 금안은 고요하기 짝이 없다. 퀴테리아는 읽고 있던 경전을 덮곤 그를 마주하는 방향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렇게 뵙고 싶다 청하였는데 이제야 와 주시는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비둘기 이야기를 꺼낼 걸 그랬습니다.”

묘하게 조롱기 섞인 어조에도 예후르는 별말이 없었다. 넌지시 그의 반응을 주시하던 퀴테리아가 고상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검지로 허벅지를 두드리며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곧 입술을 떼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일전에 제게 경고하셨지요. 흰 비둘기를 거론하시면서.”

“…….”

“그때 그러셨습니다. 비둘기에 올라탈 자신이 없다면 이만 포기하라고. 제가 감당할 수 있는 판이 아니라고요.”

“내 경고를 듣지 않은 것을 이제야 후회하는 겁니까?”

“보다 영리하고 신중해야 했었다는 후회는 매일 밤 합니다.”

엷은 미소를 짓는 퀴테리아는 변함없이 당당해 보였다. 최종 선고를 앞둔 죄인의 모습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같잖게 들으실지는 모르겠으나, 승리할 기회는 분명 제게도 있었습니다. 찰나의 승리감에 도취해 기회를 바로 보지 못하고 스스로 위기를 자초했을 뿐이지요. 전하께서 뱀 숭배자란 모욕을 들으시면서까지 본인을 미끼로 내걸었던 것 또한 그만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저를 처리하기 힘들다고 여기셨기 때문임이 아닙니까?”

예후르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수긍하는 그의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던 퀴테리아가 시선을 거두었다.

“어차피 지나간 일입니다. 후회해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잘 알아 되도록 부질없는 짓은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만, 남는 것이 시간이다 보니 자연스레 지난날로 생각이 쏠리더군요.”

“…….”

“이를테면 그 비둘기 말입니다.”

은밀한 비밀을 속삭이듯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제가 보았던 ‘특별한 비둘기’는 알비야 공작 전하께 성흔을 찍으러 내려오셨던 소명의 천사 예리엘이 유일합니다. 설마하니 천사 예리엘을 함부로 운운하셨던 것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렇다고 달리 평범한 비둘기를 이르셨던 것 역시 아니겠죠.”

“…….”

“어차피 저와 청백회가 회생할 여지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만 대답해 주십시오. 그때 경고하셨던 비둘기가 설마 천사 예리엘이었습니까?”

어느새 퀴테리아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만이 형형하였으나, 정작 그녀를 마주하고 선 예후르는 일말의 미동도 없었다. 마치 그녀를 재단하고 평가하는 듯한 눈으로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그가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내 경고를 기억한다면 이 말도 기억하겠군요.”

“…….”

“왜 그대가 아닌 그대의 자매였을까.”

퀴테리아의 눈썹이 꿈틀했다. 예후르는 그제야 설핏 미소를 머금었다.

“한낱 인간이 품기엔 지나치게 불경한 생각이라던 대답은 여전히 유효합니까?”

“…한낱 인간인 저는 그렇겠지만,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야 어떤 생각을 하시든 불경한 일이 아니겠지요.”

“…….”

“평범한 인간이 아니시잖습니까.”

예후르의 눈이 슬며시 가늘어졌다. 퀴테리아가 우습지도 않다는 듯 작게 코웃음을 치며 턱을 괴었다.

“천 년 전의 전설적인 사도 야누비타 1세조차 죽이지 못하여 봉인에 그쳤던 것이 바로 뱀입니다. 아무리 봉인되었던 여파로 약해졌다곤 하나 전하께선 그 뱀을 손수 죽이셨지요. 아십니까. 모두들 전하를 세기의 영웅으로 떠받들지만, 한편으론 뱀과 마귀만큼이나 전하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적당한 재능은 시기의 대상이 된다. 뛰어난 재능은 찬사의 대상이 되며, 넘볼 수 없는 재능은 숭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감히 총량을 짐작할 수 없는 재능이 나타난다면, 그는 곧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전하께서 교황이 되시는 날에는 더욱 심해지겠지요. 그 누구도 전하께 반기를 들 생각을 못 할 겁니다. 저 사막의 신과 같이 군림하시게 되겠지만, 천사조차 함부로 거론하시는 걸 보면 왕관의 무게 따윈 버겁지도 않으시겠지요. 예,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 제게 경고하셨던 그 비둘기가 천사 예리엘이었음은 잘 알겠습니다.”

어쩐지 갈수록 빈정거리는 투였다. 마지막을 앞둔 사람의 객기라 해도 좋았다.

그러자 잠자코 그녀의 말을 경청하던 예후르가 팔짱을 꼈다.

“그대의 자매에겐 재능이 없습니다.”

“…예?”

“천사가 나누어 주는 권능을 제대로 흡수할 수 있느냐. 더 나아가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느냐.”

뜬금없이 이어지는 소리에 퀴테리아는 조금 의아한 얼굴을 했다. 예후르는 개의치 않고 손을 들어 올렸다. 손끝에 매달린 불씨가 영롱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결국 사도의 자격도 재능의 영역이란 뜻입니다. 그대의 자매는 천사가 나누어 주는 권능을 미약하게나마 흡수할 정도의 재능은 있었지만, 제대로 구사할 재능은 없었지요. 애당초 타고나길 훌륭한 사도의 그릇이 아니었습니다.”

“…….”

“하지만 그대는 다릅니다.”

예후르는 팔짱을 풀고 슬며시 양 무릎을 짚었다. 천천히 굽혀 내려오는 허리를 따라 퀴테리아와 눈높이가 맞춰졌다. 유리알처럼 무기질적인 금안에 매끄러운 윤이 흐른다. 예후르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보기 드물게… 훌륭한 그릇이로군요, 그대는.”

허벅지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퀴테리아의 손이 움찔했다. 예후르는 미련 없이 허리를 세웠다.

“자격 있는 그대가 선택되지 않은 이유는 다양합니다. 그대는 쉬이 이해할 수 없겠지만 때로는 지나치게 영특한 것도 문제가 됩니다. 게다가 악의 씨앗을 무분별하게 퍼트리고 다닌 것 역시 예리엘에겐 곱게 보이지 않았겠지요.”

“…악의 씨앗이라면.”

성급하게 말을 꺼낸 퀴테리아가 이내 침음을 흘리며 입술을 닫아걸었다.

악의 씨앗이라 함은 그녀가 다그마르 산맥의 수도원에서 수행을 할 적 우연히 발견한 풀이었다. 원주민들은 산천에 널린 잡초라며 신경 쓰지 말라 일렀지만, 퀴테리아는 기나긴 연구 끝에 그 풀이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 독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풀을 먹이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고, 풀을 태워 연기를 마시게 하면 기절한다. 그저 학문적으로만 접근했던 당시에는 신기한 발견이라 치부하고 말았지만, 본의 아니게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풀을 악용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