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9화 (299/328)

성도 오스피나는 각국의 고요한 격전지.

고도로 훈련받은 전서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성도와 본국을 오갔으며, 성도에 거주하는 외교 대사들은 전서구가 전해 주는 밀지를 바탕으로 태세를 정하곤 했다.

퀴테리아가 노린 것은 바로 그 전서구들이었다. 전서구들이 자주 지나다니는 길목의 저택을 구입하여 다그마르 산맥에서 공수해 온 풀을 태우자, 온 성도를 떠돌아다니던 정보들이 그녀의 손아귀로 손쉽게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해가 잘 안 갑니다. 도대체 그 풀이 뭐라고 천사께서 곱게 보지 않으셨다는 것인지….”

“그건 뱀이 심은 씨앗입니다.”

“예?”

퀴테리아가 말 그대로 기함했다. 그러나 길게 설명해 줄 생각은 없는지 예후르는 태연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대가 씨앗의 정체를 알았든 몰랐든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리엘은 언제나 순종적인 사도를 원했으니까요. 그렇다고 예리엘과 비슷한 시기에 사도를 정한 다른 천사들이 그대를 선택하기엔, 또 기질적으로 그대와 맞는 자들이 아니군요.”

“…….”

“정말 중요한 문제는 이겁니다.”

한 발짝 창살로 다가온 예후르가 빙긋 웃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그대에게 해 주는 것 같습니까?”

퀴테리아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잠시간 대답을 기다리던 예후르가 픽, 하는 웃음소리를 냈다.

“어렵습니까? 그럼 질문을 바꾸죠.”

“…….”

“퀴테리아 만포르차. 내가 왜 하필 이 탑에 그대를 가둔 것 같습니까.”

황량한 벌판에 우뚝 선 탑.

죄인이 간수를 죽여도, 간수가 죄인을 죽여도, 죄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아무도 모를 곳.

“이제야 좀 말귀를 알아듣는 모양입니다.”

녹슨 창살 사이로 금안이 매끄럽게 휘어졌다.

“내가 아는 예리엘이라면 곧 그대의 몸을 노릴 겁니다. 일전에 올라탈 자신이 없으면 이만 포기하라 했던 것은 진심이에요. 하지만 그대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한낱 인간 된 몸으로 천사를 감당할 수나 있겠습니까?”

“나는….”

앙다무는 퀴테리아의 입술이 허옜다. 천천히 질식하는 듯한 그녀의 얼굴에는 혼란과 경악, 온갖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핼쑥한 안색이었으나, 예후르는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처음부터 그대가 감당할 수 있는 판이 아니었습니다.”

“…….”

“더 늦기 전에 결심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한눈에도 자격은 충분한 몸.

만약에 예리엘이 세상을 활공하는 새의 몸에서 한계를 느낀다면, 먼 옛날 그러했듯 결국에는 지상으로 강림할 것이었다. 이토록 질 좋은 그릇을 알면서도 구태여 다른 그릇을 찾아 헤맬 이유는 없었다. 퀴테리아의 독립성은 사도일 때야 문제가 되는 것이지, 예리엘이 강림을 결심한다면야 문제가 될 소지는 전혀 없었으므로.

하지만 일이 그렇게 흘러간다 한들, 먼 훗날 역사에는 퀴테리아 만포르차의 이름만이 남을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예리엘이 승리한다면 퀴테리아 만포르차는 승자의 이름이 되어 오래도록 찬사를 받겠으나, 패배한다면 만고의 역적이 되어 두고두고 짓밟힐 것이었다.

마치 미할리나의 은혜를 입은 야누비타 1세가 지금까지 칭송받고, 예리엘의 공이 사도 로살레다의 업적이 되며, 천사 이슬라의 예술이 샤를로망 프리울리의 이름으로 남은 것처럼.

재해나 다름없는 거대한 권능을 상대하여 한낱 인간이 승리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다만 본인을 희생하여 천사의 계획을 어그러트리는 것쯤은 가능했다. 지목된 당사자는 몹시 억울한 심정이겠으나, 제삼자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였다. 강림을 계획하는 천사의 눈에 든 이상 어차피 죽은 목숨이거늘, 적어도 본인의 이름이라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는 객관적이다 못해 냉정하기까지 한 천사 미할리나의 시각일 뿐이다.

그는 인간 퀴테리아가 느끼고 있을 좌절감을 어렴풋이는 이해했지만, 당장 탑에서 뛰어내리지 못하는 망설임은 납득하지 못했다. 그는 이제 예전처럼 마냥 순백에 가깝지도, 오롯이 이성으로만 작동하는 감정적 백치도 아니었으나,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을 종용당하는 인간에게 공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끝을 모르는 전능한 존재.

바람 앞의 등불 같은 목숨을 짊어지고 사는 피식자의 심경을 어찌 이해하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좌절감을 못 이겨 발악하는 퀴테리아를 두고 홀연히 탑을 빠져나왔다. 비명처럼 악을 지르는 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쟁쟁하게 울려 왔으나, 그의 콧대 높은 동정심을 자극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탑에서 나오자, 한군데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시시덕거리던 호위 기사들이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오셨습니까, 전하.”

“말들이 지친 듯하여 먹이와 물을 먹이러 잠시 보냈습니다. 탑에 쉴 만한 곳을 마련해 두라 간수에게 일렀으니, 들어가 쉬고 계시지요.”

호위 기사가 공손하게 권했으나, 예후르는 개의치 않고 조금 전까지 그들이 모여 앉아 있던 곳을 눈짓했다.

“무얼 하고 있었지?”

“아, 그게….”

호위 기사들이 난처한 기색으로 눈빛만 주고받았다. 예후르는 더 이상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기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드문드문 풀이 자라는 황량한 땅에 눈을 까뒤집고 죽은 독수리의 사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저, 저희가 죽인 것이 아닙니다. 날아오던 독수리가 갑자기 꽥 하는 소리를 내더니 떨어져선… 그대로 땅에 고개를 처박고 죽어 버렸습니다. 맹세코 저희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전하.”

수하들이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성도 오스피나에 한해 전면적으로 새 사냥을 금지할 만큼 날개 달린 것들을 귀하게 여기는 교회이니, 교회에 소속된 성기사로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예후르는 질책하는 소리 없이 물끄러미 독수리의 사체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의 침묵에 의아해하던 호위 기사들은 곧 남의 이목에도 개의치 않고 미친 듯이 비둘기 사냥을 다니던 그의 전적을 떠올렸다. 사실상 교황에 버금가는 권력을 쥔 엘피도 공작만이 대놓고 자행할 수 있는 행각이었다.

그때, 말에게 물을 먹이러 떠났던 동료 하나가 돌아와 멀찍이서 손을 흔들었다. 아무래도 도움을 청하려는 듯한 몸짓이다. 그러자 슬그머니 예후르의 눈치를 살피던 호위 기사들이 잠시 다녀오겠다 아뢰곤 하나둘 꽁지 빠져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난처한 상황에 처하거든,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예후르는 모래바람 휘날리는 벌판에 우두커니 서서 죽은 독수리를 계속해 굽어본다.

순식간에 절명한 것처럼 채 감기지도 못한 눈알, 땅으로 고꾸라질 때 부러지기라도 했는지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 버린 날개, 날카롭게 벌어진 부리와 아직은 매섭게 날이 선 발톱.

죽을 때 다 된 새가 부지불식간에 추락하여 죽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님에도, 그는 죽은 독수리에게서 쉽사리 시선을 떼지 못했다. 본인 스스로조차 이상하게 여겨지던 것은 곧 종탑이 울리는 것처럼 둔중한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그는 못내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걸릴 것 하나 없이 탁 트인 벌판.

헤아릴 수 없이 까마득한 먼 옛날, 아무도 모르게 떨어진 불씨가 나뒹굴던 곳이 바로 여기였다.

시간의 더께에 묻혀 존재조차 잊고 살았던 기억은 갑자기 되살아나 그의 평정심을 깨트렸다. 얼떨떨하다 못해 아찔한 충격이 그의 뇌리를 가격해 온다. 그래, 이 길고 지긋지긋한 역사의 시작이 바로 여기였다. 이토록 황량하고 쓸쓸한 곳에서. 이토록 아무것도 아닌 곳에서….

이제는 기억조차 흐릿한 저 머나먼 하늘의 고향에서 타오르던 최초의 불.

거기서 아주 우연적으로 불씨가 떨어져 나간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실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최초의 최초로 거슬러 올라가 이 기나긴 핏빛 역사의 원흉을 찾기엔 지나치게 오래된 일이었으며, 기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자마저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그렇기에 원흉은 언제나 그자였다.

모래 먼지 가득한 땅 위를 뒹굴던 불씨를 우연히 발견하여 욕심을 낸 자.

한때는 그와 같이 위대한 존재였으나, 탐욕에 눈이 멀어 땅으로 내려온 자.

현존하는 언어로 이르길, 천사.

그러나 죄질을 말하자면, 도둑.

“감히 불씨를 삼켰소.”

처음 도둑을 발견하여 노여워하던 이가 예리엘이었던가, 아니면 마그누스였던가. 지나치게 오래된 기억은 번잡하기 이를 데 없으나, 귓전을 쟁쟁하게 울리던 노성만은 여전히 뚜렷하다.

“불씨를 모조리 탐하였으나, 절반은 토해 냈고 절반만을 삼켰음이라. 당장에 도둑을 잡아 엄벌에 처해야 할 것이오.”

“옳소.”

신성한 불을 탐하였다.

잡아 죽일 명목은 충분했다.

“왜 욕심을 가지면 안 되는가.”

하지만.

“왜 욕망은 허락되지 않는가.”

도둑이 그리 말했던가….

당시의 그에겐 이해할 수도, 이해하기도 힘든 말이었다. 그는 그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동족들을 이끌고 죄인을 벌하러 갔을 뿐이다. 불을 지키는 것은 그들의 의무고, 질서고, 또한 그의 뇌리에 박힌 진리였기에.

기실 처음부터 결말이 정해져 있던 싸움이었다.

도둑이 절반의 불씨를 삼켜 가공할 만한 힘을 얻었다 한들, 수백에 달하는 동족들을 모두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예상보다 오래 버텼지만 그뿐이었다. 수많은 동족들을 적으로 돌린 순간부터 도둑의 마지막은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불씨의 끈질긴 생명력.

도둑의 발톱 일부분을 자르자 떨어져 나간 조각은 새 생명을 얻어 새로운 날개를 펼쳤고, 도둑의 손바닥을 박살 내자 후드득 떨어져 나간 조각들도 제각기 다른 숨결을 내뱉기 시작했다. 도둑이 쇠잔할수록 새로운 도둑들이 생겨나니, 이대로는 영영 싸움의 끝이 나지 않을 성싶었다.

종국에 그는 빛의 창을 뽑아 들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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