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후 그를 덮쳐 온 암흑은 영원인 것도 같고 찰나인 것도 같았다. 그의 몸을 탐내던 뱀과 아주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겠으나, 기억이 날아간 것처럼 머릿속은 희기만 했다. 지금의 나는 뱀인가 천사인가. 질문을 던져 본들, 돌아오는 것은 고요한 침묵이었다.
다시 눈을 뜨고 두 다리로 딛고 일어날 때까지도 그는 스스로 크게 달라진 점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이전에는 존재조차 느끼지 못했던 어둠이 제 안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을 매 순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뿐.
그는 제 안에서 꿈틀거리는 어둠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다시 길을 떠났다.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비가 아주 많이 내리던 어느 밤.
등불 하나 걸리지 않은 공동묘지는 한 치 앞도 가릴 수 없는 암흑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어둠 속을 꿰뚫어 보는 눈으로 키 작은 수풀과 웃자란 잡초 사이를 거리낌 없이 가로질렀다. 그렇게 도달한 어느 낡은 묘비. 이름조차 적히지 않은 묘비는 쓸쓸하다 못해 스산하다. 그는 흙탕물이 고여 있는 묘비 앞에 철퍼덕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는 맨손으로 미친 듯이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갈수록 굵어지고, 어둠은 갈수록 짙어진다.
흙은 쌓여만 가는데, 어둠을 파헤치는 손길은 느려질 생각을 안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손끝에 닿은 무언가 드르륵 하며 긁히는 소리를 냈다.
그는 미미하게 떨리는 손으로 다시금 그것을 짚어 보았다. 흙이 아닌 단단한 무언가. 넘쳐흐르는 빗물에 가려 흐려졌던 시야가 한순간에 맑아진다. 그것은 썩어 들어가는 나무였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관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열린 흔적이 없다. 닫힌 그대로다. 하물며 어느 한 군데 우지끈 무너져 내린 흔적조차 없었다.
“죽은 자를 어떻게 되살려 내는지.”
확신은 없었다.
“안다면, 어찌할 텐가.”
그럼에도 매달릴 곳이 없어서.
수많은 벗들을 잃고, 너를 잃고, 심지어는 나 자신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잃은 만신창이가 여기 있다. 상실의 고통은 가시질 않고 더 커져만 가는데, 정작 이 고통을 해갈할 곳이 없다. 미친 듯이 피어오르는 이 분노가 갈 길 잃은 방랑자처럼 나를 맴돌기만 한다.
네가 보고 싶은데 볼 수 없어 애가 탄다.
이것이 그리움이라면, 나는 네가 그립다. 너희가 그립다. 나는.
빗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저 먼 곳에서 동이 터 올 때까지. 그리고 뻗어 오는 서광을 젖은 등으로 맞으며 그는 오래도록 굳어 있던 손으로 다시 한 줌의 흙을 쥐어 들었다. 썩어 들어가는 나무 관 위로 다시금 흙이 뿌려진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녀의 싸늘한 시신을 머릿속으로만 그리고 또 그리며.
이런 빗속에서 죽어 갔을 때의 너는 과연 나를 원망했을까.
그리움은 끝이 없고, 풀 곳 없는 분노는 쌓여만 간다.
길을 벗어난 그는 폭주하는 제왕처럼 완전히 엇나가기 시작했다. 비난하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만류하는 소리. 무엇이든 관계없다. 들리지 않았다. 그를 미치게 하는 울렁임이 이제는 무엇인지 알았으므로. 분노가 무엇인지, 슬픔이 무엇인지, 절망이 무엇인지 아는 그는 이제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오늘에 이르렀다.
한때 완전무결한 빛이었고, 천사 미할리나였고, 최초의 교황 야누비타였고, 이제는 수사의 예후르라 불리는 존재가 태곳적 불씨가 떨어졌던 허허벌판을 돌아본다.
여전히 불변하는 질서.
하지만 그녀는 되돌아왔다.
어디로 이어질지 몰랐던 자기 파멸적인 길이 이런 곳으로 와 닿을 줄 짐작이나 했겠나. 하지만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리움은 옛일이 되었으며, 그의 숨통을 옥죄어 오던 상실의 고통은 놀랍게도 잦아들었다.
그러니 그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
“의심하지 않는 존재는 없다.”
다만 너의 바람대로.
“빛이여, 네가 사랑하는 그 아이는 어떠할 것 같나.”
이제는 페기, 네가 선택할 차례다.
***
한번 수면 위로 떠오른 기억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잠시나마 눈이라도 감을라치면 심연 아래서 보았던 기억들이 폭풍우처럼 몰려들었고, 그러면 그녀는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르는 악몽에 발버둥 치다 식은땀에 푹 젖은 몸으로 겨우 깨어나곤 했다.
자연스레 밤잠을 꺼리게 되니 한낮에 병든 닭처럼 조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마저 절반가량은 또 악몽에 발목이 잡혀서 소스라치며 깨어나는 것이었다. 스스로 깨어나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발작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사지를 발발 떨어 대는 모습을 보다 못한 차라가 뺨을 때려 강제로 깨우는 일도 다반사였다.
사태가 그 지경으로 흘러가자, 그러잖아도 여위어 핼쑥하던 그녀의 태가 위태로우리만치 가늘어졌다. 도대체 어디까지 하려나 싶어 지켜만 보던 안드레아까지 한마디 할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하지만 아닌 척 걱정하는 안드레아에게도, 갑갑한 마음에 화를 내는 차라에게도 좀체 털어놓을 말이 없었다.
도대체 무어라 털어놓는단 말인가.
내가 뱀이라고?
우습게도 저 홀로 머릿속으로 되뇌는 혼잣말조차 속을 뒤집히게 하는 자각이었다. 저 높다란 아그레다산 꼭대기에서 떠올린 뒤로 하루에도 숱하게 발목이 깨물리는 악몽을 꾸었으나, 그 순간 번개처럼 내리치는 통증도, 몇 번째일지 모를 깨달음도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아니, 그게 무턱대고 곱씹는다고 익숙해질 만한 일이던가.
그녀는 며칠째 곤히 잠들지 못하여 어지럽게 빙빙 도는 머리로 간신히 생각을 이어 갔다.
사도였다.
사도이기 전에 여덟 천사를 숭배하는 신자였고, 신자이기 이전에 한 명의 인간이었다.
비록 제대로 기억하지는 못하나 다른 사람들 다 그러하듯 어미 배에서 태어났을 것이고, 늙어 죽든, 병으로 죽든, 아니면 살해당하든, 언젠가 생의 끝을 맞이할 평범한 인간인 줄만 알았다.
당연하지 않겠나.
천운으로 천사의 간택을 받아 만인이 우러러보는 사도의 자리에 올랐다 한들, 인간이면 마땅히 겪어야 하는 인생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사도들 역시 병에 걸리고, 부주의하게 상처를 입으며, 제각기 원인은 다를지언정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했다. 천사의 권능을 나누어 받고도 여전히 평범한 인간이란 점에서 도리어 사람들은 천사의 전능함을 되새기곤 했다.
그런데 뱀이라니.
지난 수천 년간 천사들의 숙적이었으며, 이 땅을 공포에 떨게 했다는 그 뱀이라니.
처음에는 충격이었다. 두 번째는 극심한 거부감이었고, 세 번째는 강경한 부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지금껏 열심히 신성 시대의 기록을 찾아다녔기로, 뱀은 수많은 천사들을 죽이고 공포에 떨게 했던 존재였다.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사도인 야누비타 1세-심지어 그녀는 광휘의 천사 미할리나로 추측되고 있는 실정이다-마저 뱀을 봉인하는 데 그쳤으며, 뱀을 죽였다고 알려진 예후르도 실상은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뱀을 흡수한 것에 가까웠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너무나도 미약하다.
미약할 뿐인가, 다른 사도들과 비교해도 특출한 점이 전혀 없었다.
예후르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안드레아는 어릴 적부터 빈손에 불을 피우며 놀았고, 차라는 스스로 자각하고 있지 못할 뿐 천사에게서 받았음이 분명한 언변의 힘을 지녔다. 천사의 권능을 받은 곳조차 하필이면 귀여서 쓸데없이 청각만 예민한 그녀와는 달랐다. 모두들 그녀와는 다르게 능동적으로 활동할 수가 있었다.
그러자 악몽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머나먼 고향, 쓰레기통에 처박혀 실뱀에게 발목이나 물리던 더러운 쥐 새끼에서 심장을 꿰뚫린 채 죽어 갔던 3년 전의 소녀로.
멀어지는 빗소리, 멀어지는 추위, 멀어지는 감각. 그러나 추락과 동시에 닥쳐오던 지하의 스산함.
어느새 그녀의 곁에는 쇠사슬에 사지가 묶인 마귀들이 득시글했다. 그들은 꺼지지 않는 불길에 휩싸인 채 영원토록 고통받고 있었다. 그들의 비명 어린 아비규환이 그러잖아도 위태롭던 정신을 완전히 미치게 할 것처럼 몰려들었으나, 신기하게도 수만 개의 바늘인 양 밀려들던 고통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만다.
마귀도, 불길도, 비명도.
교회당에서 숱하게 보았던 지옥도의 광경은 멀어지고, 그녀는 다시 어둠 속에 홀로 남겨졌다. 그리고 계속해 걸어 나가는 것이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그렇게 걷다 보면 또다시 식은땀에 푹 젖은 몸으로 깨어나곤 했다. 늘 그렇듯 차라는 걱정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고, 안드레아는 괜스레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다.
그러면 페기는 혼곤해진 눈으로 덩달아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본다.
세투발에서 다시 성도로 돌아가는 길.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마차의 창밖 풍경은 늘 달라져 있었다. 언제는 낮이고, 언제는 밤이고. 언제는 드넓은 평원이고, 언제는 시끄러운 도시 한복판이고.
턱없이 부족한 수면 시간을 선잠으로 간신히 메우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졸음과 부단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살이 내리고 정신은 갈수록 흐려지는데 정작 악몽은 더 선명해졌다. 심지어는 진화하는 것도 같았다. 아그레다산의 꼭대기에서 사막의 신관이 보여 주었던 심연은 조각에 불과했건만, 매일같이 악몽은 이어지고 있었다.
걷고, 또 걷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막연히 걸어 나간 지도 벌써 수일째였다. 그녀는 이제 꿈과 현실의 경계조차 제대로 분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고르지 않은 흙길에 마차가 덜컹거리는 소리는 들려왔다. 혹은 눈부신 햇살이 눈가로 드리워지는데, 지친 다리는 계속해 어딘가로 걸어 나가고만 있었다.
그렇게 오늘도 그녀는 눈을 떴다.
점차 벌어지는 눈꺼풀 사이로 찔러 들어오는 빛이 유독 붉었다. 불그스름하게 번지는 시야를 가만히 가늠해 보던 그녀는 나지막이 들려오는 풀벌레 울음소리와 발목을 훑고 지나가는 다소 서늘한 바람, 그리고 신선한 자연의 냄새를 맡았다. 차례차례 돌아오는 감각을 느끼다 보니, 어느덧 시야는 맑아져 있었다.
창밖으로 노을이 가득한 해 질 녘이었다. 잠시 쉬느라 정차라도 하였는지, 마차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쩐 일로 곤하게 자서 깨우지 않은 것인가. 그녀는 아직 무디게 돌아가는 머리를 여태 기대고 있던 창틀에서 떼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