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8화 (308/328)

그렇게 교회의 안팎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녀를 지킬 근위대는 다행히 청백회와 함께 물갈이가 되었으므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장미 기사단은 늘 그래 왔듯 교황의 자리에 오른 사도를 목숨 걸고 지킬 것이었다. 그녀의 위치는 공고했다. 더는 4년 전처럼 권력 투쟁에 희생되어 한낱 자객의 손에 목숨을 잃는 일 따윈 없을 것이나.

“…천사 예리엘.”

그가 남아 있었다.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예후르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예리엘은 페기를 선택하여 권능을 나누어 준 존재지만, 정작 그녀에게서 가장 먼 존재이기도 했다. 예후르는 그깟 천사 따위로 페기가 상처받길 원하지 않았으나, 마냥 숨길 시기는 지나갔다.

“예리엘이 너를 용납하지 않을 거야.”

“천사께서 왜….”

“이미 너를 버렸으니까.”

페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예후르는 입맛이 쓰게 번져 오는 것을 느꼈다.

“대성당의 불이 꺼진 순간부터 예리엘은 너를 의심했어. 그러니 네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올라를 택한 것이고…. 지금은 자신이 택한 비올라가 감히 내쳐진 것에 분노하고 있지만, 오래지 않아 네가 되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아차릴 거야.”

“…….”

“그리고 예리엘은 뱀에게 자비가 없지.”

벗의 얼굴로 달려드는 뱀을 가차 없이 베어 버리던 예리엘. 뱀에게 죽음이란 안식조차 빼앗아 영원한 형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던 예리엘.

그가 페기의 정체를 깨닫게 된다면 어찌 될까.

우스울 정도로 답은 간단했다. 그리고 예후르가 그것을 두고 보지 않을 것 역시도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천사는 쉽게 죽지 않아. 불씨의 힘으로 끈질긴 생명력을 얻어 웬만한 공격으로는 흉터조차 남길 수 없지. 게다가 자유롭게 육신을 갈아탈 수 있어 사실상 인간의 힘으로 천사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해.”

그는 과거 뱀을 죽여 왔던 방법들을 하나둘 떠올렸다. 인간은 감히 실행할 수 없는 잔혹하고도 힘겨운 방식들. 용 기병대를 끌고 간들 결과는 달라지지 않으리라.

하지만 천사는 결정적으로 뱀과 다르다.

하나의 도둑에서 시작되어 무수히 많은 갈래로 뻗어 나간 뱀들과 달리, 천사에게는 하나의 원형이 고스란히 존재했다.

빛의 그림자에서 그림자로, 또다시 그림자에서 그림자로.

그렇게 모든 천사들의 원형이자 모체가 되었던 예후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래서 내가 죽으려고 했어.”

페기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가문 땅에 물이 돌지 않듯 말라붙은 입 안에선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내 그림자에서 태어난 동족들은 나의 분신과도 같아. 내가 사라지면 그들도 사라지겠지. 무엇보다도 예리엘을 죽일 수 있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이야.”

“…….

“난 네가 살아남길 바랐어. 나야 어찌 되든 너만은 4년 전처럼 그렇게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고….”

그는 약속했었다.

누구도 해할 수 없는 영광된 자리로 인도하겠노라.

지금껏 페기는 그것이 교황의 자리인 줄만 알았겠으나, 실상은 천사조차 위협할 수 없는 더욱더 높고 막강한 자리였다. 천사가 사라진 세상에 불을 피우는 사도의 존재란 어찌나 위대할는지.

그런 세상이라면 그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것도, 클레멘스에게 약속했듯 나누어 주는 것도 어디까지나 그녀가 내키는 대로.

하물며 땅에는 그녀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없고, 하늘에도 그녀에게 불복의 벌을 내릴 수 있는 존재가 더 이상 없을 것이니 그녀는 마침내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온전한 삶을 누릴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궁극적인 목표.

그녀의 온전한 삶을 위해 희생될 목숨들은 더 이상 그의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그는 기꺼이 제 한 목숨 바칠 용의가 있었으며, 저의 자살과 함께 사라져 버릴 남은 동족들도 그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리엘.

그녀를 위해 사라져야만 한다.

이슬라.

소중한 벗이지만 어찌 그녀에게 비할까.

다른 동족들은 이미 퇴화하여 사라졌거나,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기나긴 잠에 든 지 오래였다. 뱀을 흡수한 뒤로 스스로의 어둠을 자각하여 사랑을 깨우치고 만 그는 더 이상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아무리 소중하다 한들, 4년 전 싸늘한 시체로 남겨졌던 그녀를 생각하면 그게 무엇이든 가차 없이 버릴 수가 있었다.

그러니 퀴테리아와 청백회를 모두 잡아들인 뒤로 검을 말아 쥐었을 때의 머뭇거림은 한낱 구차한 미련 때문이 아니었다.

자살을 목전에 두었던 그의 손길을 잡아 세운 것은 언젠가 들었던 그녀의 처절한 울부짖음.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이루어 주겠다며. 그런데 왜 내가 진정 원하는 건 들어주질 않아.”

무덥던 한여름의 문도성.

죽은 페기의 겉가죽을 뒤집어쓴 여자가 정말로 페기임을 깨닫자, 그는 영원히 그녀를 제 품 안에 가두어 보살피기로 결심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곁을 떠났던 그 한 번에 그녀는 죽어 사라졌다. 그녀가 되살아난 것은 천운이었으나 그런 운이 두 번 따르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모험이었으므로, 이 세상 가장 안전한 그의 품에서 영원토록 지켜 주는 것만이 그녀를 두 번 잃어버리지 않을 길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거부했다.

격렬하게 반항하고 몸부림쳤다.

아둔하게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쏘았던 화살의 기억이 아직도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만 같아 다정하게 안아 달래 주면서도, 한편으론 시간이 해결해 주리란 생각을 했다. 지금 그녀가 품고 있을 불안감이나 불신도 결국은 계절이 바뀌고 해가 지나가면서 서서히 옅어지리라고….

돌이켜 보건대, 참으로 안일한 생각이었다.

무작정 견디다 보면 괜찮아지리라는 예측, 지나칠 정도로 낙관적이었던 기대는 도대체 어디서 샘솟았던 것인지.

그녀를 되찾았다는 환희와 그녀가 뱀이라는 충격. 그토록 양가적인 감정들은 그의 눈을 가려 왔고, 그러잖아도 감정적으로 서툴렀던 그는 그녀가 느끼고 있을 좌절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의 그는 진실로 희망적인 기대에 부풀어 있었기에.

조금만, 그녀를 잃어 절망에 빠졌던 시간들에 비하면 아주 조금만 더 견디면 된다고. 그러면 길고 길었던 지난 생에서 맛보지 못했던 달콤한 행복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고.

그리하여 싫다는 그녀의 목소리, 그러지 말라는 간절한 몸짓마저 생판 다르게 받아들이고 만 것이었다. 그것이 그녀 나름의 경고였는 줄도 모르고.

“여긴 안전한 줄 알아?”

날카롭게 웃어 보이던 그녀의 흰 얼굴, 얇은 커튼 사이로 흘러들던 눈부신 여름의 불볕, 그녀의 살결과 구분되지 않던 흰 원피스 자락과 왜 하필 거기에 있었는지 도통 모르겠는 촛대가 기억난다.

악에 받쳐 촛대를 쥐어 들던 그녀.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뻔했지만, 그마저 보여 주기 위한 허세라고 판단했다.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녀의 부활을 인정한 자신은 더 이상 그녀에게 해가 되는 존재가 아님을 과신했으며, 저와의 불필요한 마찰에서 이기겠다고 자해하는 일 따위 영특한 그녀가 저지르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그저 불안감을 못 이겨 한낱 객기로 맞서는 것인데, 진지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런 태도가 그녀의 분노를 부추겼음은 분명하다.

그는 아직도 눈앞에서 터져 나오던 핏물을 단번에 떠올릴 수 있었다. 제가 쏜 화살에 맞고 쓰러지던 그녀의 모습이 채 잊히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는 순간 자신이 또 실수를 저질렀나 싶었지만, 촛대는 여전히 그녀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자신의 허벅지를 찌르며 신음하고 또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왜?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그는 그녀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 모두를 줄 수 있었다. 이 세상을 원한다면 저 사막 이남의 땅까지 모두 정벌하여 그녀의 발아래 바칠 것이고, 파괴와 멸망을 원한다면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던 모든 존재들을 쓸어 버릴 것이었다. 하물며 그는 기꺼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이 세상 가장 안전한 그의 품이 도리어 가장 위험하다고 했다. 그녀를 죽일 것이라 했다. 그녀는 그가 가두려 하는 그의 품에서 종래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릴 것이라 경고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를 지키고 싶었던 그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저 세상으로부터 그녀를 지키면 된다고 여겼던 그의 어수룩한 생각에 처음으로 균열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그는 이제 그녀 자신으로부터도 그녀를 지켜야 했다. 너무나도 어려웠다. 그녀를 위협하는 것들을 단순히 없애면 된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그녀라는 새로운 장애물의 등장은 너무나도 난해한 문제였다.

그렇기에 마지막 문턱에서 또다시 혼란에 휩싸인 것이었다.

청백회를 끝으로 난잡하던 지상은 정리되었다. 이대로 자살에 성공한다면 그녀를 위협하는 예리엘의 존재도 사라질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안전해질 수 있었으나, 그녀 자신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과연 그녀는 그가 사라진 세상에서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심연이여. 내게 답을 다오.”

망설이던 그는 이슬라를 찾아갔다.

태초부터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방황하던 이슬라는 동족들 사이에서도 가장 인간에 가까운 존재였다. 한없이 약해 보이다가도 결국에 주저앉지 않고 꿋꿋이 살아남은 그는 가장 현명하면서도 가장 사려 깊은 자였다.

“내가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너의 아이에게 물어보아야지.”

“물을 수 없다.”

“정녕 고백하지 않을 것인가.”

“무엇을.”

“네가 말하지 않은 모든 것들.”

그가 천사 미할리나라는 것. 또한 그녀가 뱀이라는 것.

그는 그 무엇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진실은 때로 가장 잔인한 무기가 되곤 했다.

“의심하지 않는 존재는 없다.”

이슬라는 딱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빛이여, 네가 사랑하는 그 아이는 어떠할 것 같나.”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는 또다시 갈림길에 섰다. 뱀에게 물린 뒤 그의 눈앞으로 펼쳐졌던 무수한 샛길들. 그러나 죄 무시하고 하나만을 바라보며 달려왔던 그는 도저히 선택할 수 없는 갈림길에서 고민한다.

페기, 너는 어떠할까.

누구보다 밝은 눈으로 미세한 신체 반응을 좇아 상대의 거짓을 간파하고, 상대를 농락하던 천사 미할리나는 더 이상 없었다. 그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라도 된 것처럼 갈팡질팡했다. 뼛속까지 안다고 자부했던 페기란 존재가 갑자기 베일 속에 싸인 미지의 존재처럼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그녀 자신으로부터 그녀를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 이상 이대로 자살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예리엘을 잡아 죽이기엔 실패했을 시의 타격이 너무나도 크다. 무엇보다도 양측 모두 페기의 반응을 예상할 수가 없었다. 그는 페기가 스스로를 죽이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마도 바로 그즈음.

그는 수만 갈래로 뻗어 있는 길들 가운데 오직 곧게만 뻗어 있는 진리의 길을 발견했다. 뱀에게 물들어 버린 뒤로 한결 흐릿해진 눈에 예전만큼 질서와 진리가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건만,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다시 일직선의 길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의아해하던 그는 예전에 그러했듯 일직선의 길을 다시 걸어 보기로 했다.

그러자 무수히 많아 도리어 그를 괴롭게 만들던 샛길들은 사라지고, 그는 다시금 기로 없는 편안한 여정에 도달하였다. 이 길의 끝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건대. 여전히 알 수 없던 그는 마치 벼락처럼 한순간에 깨닫고 말았다.

이 길은 더 이상 질서나 진리의 길이 아니다.

페기, 바로 너였다.

안개처럼 희미하던 세상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먹구름 사이로 해가 뜨며 서광이 온 세상으로 번져 갔다. 외길을 걷는 그의 곁에는 그리운 고향에서 들었던 기억 속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함께였으며, 사랑으로 충만한 마음이 싸늘했던 그의 몸을 따뜻하게 덥혀 왔다.

무엇보다도 이 길의 끝에서 만날 수 있는 너.

그를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문제가 더는 문제가 아님을, 깨닫고야 만 것이었다.

“그것은 너의 아이에게 물어보아야지.”

벗이여, 너의 말이 옳았다.

그는 이제 고민하지 않는다. 갈팡질팡하지도 않으며, 검 손잡이를 틀어쥔 채 망설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그녀가 답을 가지고 올 때까지. 그에게 명령을 내려 줄 때까지. 그렇게 그의 눈앞으로 새로운 길이 펼쳐질 때까지.

“네가 스스로 판단하길 바랐어. 너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충분히 길을 잡아 나아갈 사람이니까.”

지하의 어둠을 거슬러 올라 마침내 내가 있는 지상으로 올라온 것처럼.

“내가 아는 너는 거대한 진실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 테고, 좌절할지언정 완전히 주저앉지도 않겠지. 왜 그런 너를 믿지 못했을까. 결국 너는 이렇게 모든 것을 알고도 내게 돌아올 사람인데.”

그는 진심으로 환희롭게 웃고 있었다.

“네가 죽으라면 죽고, 죽지 않으라면 죽지 않을게. 예리엘을 잡아 오라고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을 것이고, 예리엘을 죽이라 하면 내 목숨이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죽일 거야.”

“…….”

“그러니, 페기.”

나의 진리.

나의 질서.

“제발 내게 답을 줘.”

밤과 함께 찾아온 고백.

모든 것을 털어놓은 그는 후련한 얼굴이었다. 도리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쪽이 차갑게 굳어 있다. 숨통을 옥죄는 긴장감에 가팔라진 호흡이 서러움을 담아 한없이 위태로워졌다. 그녀는 퍼레진 아랫입술을 지그시 감쳐문다.

그의 등 뒤에서부터 뻗어온 감청색 밤하늘이 어느덧 지상으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때였다. 서녘으로 넘어가는 태양, 동녘에서 번져 오는 어둠. 그러나 머지않아 밤하늘에는 별이 뜰 것이고, 뒤이어 둥그런 달이 나타날 것이다.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처럼 자명한 사실을, 저이만이 모른다.

꾸역꾸역 눈물을 참아 내던 페기가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은 얼굴로 간신히 입술을 뗐다.

“바보.”

“…….

“우리 얼마나 오래간만에 만난 건지 알긴 해?”

그의 표정은 여전히 말갛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처럼 순수하고, 주인만을 따르는 사냥개처럼 충성스럽다. 세상 모든 이치에 통달했으면서도 이 당연한 하나를 모르는 그가 그녀는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먼저 안아 달라는 거잖아.”

그녀가 울 것처럼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그러자 가만히 눈만 깜박이던 그가 커다란 보폭으로 순순히 걸어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 갑갑한 품 안에서 그녀는 비로소 참아 왔던 숨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그제야 마음속 응어리가 가시며 살 것 같았다.

“…페기.”

“사랑해.”

그의 목에 간절하게 매달려선 다시 한번 속삭인다.

“나를 사랑해.”

“…….

“나를 지켜 주고, 나를 아껴 줘. 절대, 절대로 나를 떠나지 마.”

경고하듯 나직하게 읊조린 그녀가 눈물을 참으며 그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저 어두운 밤하늘, 살며시 떠오르는 별 하나를 헤아리며 꿈을 꾸듯 아늑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렇게 우리 함께 행복하게 사는 거야.”

먼 옛날에도 꾸었던 미래.

돌고 돌아왔으나 결국에 그녀의 종착지는 거기였다. 새로운 삶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될 것이나, 그녀는 혼자가 아닐 것이다. 그와 함께 일구어 나갈 알 수 없는 나날. 불투명하나 그렇기에 좇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미래.

아스라한 밤하늘 별빛을 헤아려 나가던 그녀가 스르르 눈을 내리감았다. 그러자 별빛의 잔상을 몰아내듯 익숙한 바람 냄새가 차오른다. 너의 냄새, 너의 품. 페기는 감격에 겨운 눈물을 흘려 보내며 그리웠던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는다.

희미한 달이 떠오르는 어느 여름밤.

마침내 그녀는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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