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4화 (314/328)

이득이라 한다면 이제 막 국교를 재개한 라발에게 정치적인 빚을 부담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며, 손실이라 한다면 참전으로 인한 경제적, 군사적 손해와 교국의 국경 경비가 한결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

수십 년 전 방만한 군대 운용으로 한낱 용병대 따위에 짓밟히는 수모를 겪었던 성도 오스피나의 시민들은 특히 교국의 국경 경비에 대해 염려했다. 교국의 경비를 맡은 이스파갈족이 상대적으로 적은 머릿수를 용 기병대로 충당하고 있는 만큼, 가뜩이나 적은 병력의 유출은 예민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려는 오래지 않아 불식되었다.

“생각들 해 보게나. 교국의 경비가 약해졌다 해서 잽싸게 쳐들어올 나라가 지금 어디 있는지.”

나라가 두 동강 나게 생긴 라발이야 당연히 아니다.

이웃한 세잔에도 그럴 여유는 없었다. 지금쯤 요앙 오귀스트는 세잔에도 원군을 닦달하고 있을 것이나, 사실상 세잔의 실권을 쥐고 있는 크리상즈 공작은 어떻게든 이 기회를 잡아 세잔의 왕위를 탐하려 들 것이었다. 라발만큼이나 정세가 복잡해진 곳이 바로 세잔이었다.

그렇다면 북방의 대국, 탐보프는 어떠한가.

엘피도 공작이 동부의 편을 들어 분열을 초래한 뒤로 교국과 탐보프의 긴밀했던 관계는 상당히 미묘해졌으나, 한편으로 알리오나 황녀와 결혼하여 실질적인 황위 계승자가 된 도미에 변경백은 교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위태로운 위치를 다지고 있었다.

빌헬미나 황제야 제국을 분열시킨 엘피도 공작이 미워서라도 당장에 교국을 짓밟고 싶어 할 테지만, 도미에 변경백이 아니어도 실익 없는 교국 침공을 반대할 세력은 차고 넘쳤다. 탐보프가 온전한 상태라면 또 모를까, 동부와의 갈등이 채 매듭지어지지 않은 지금은 외부로 눈을 돌리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리누스 도시 연맹뿐이다.

넘치는 돈으로 바스토뉴의 야만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있는 그들은 그 옛날 라발이 그러했듯 용병단을 부려 교국을 침공할 수 있었다.

문제는 교회에 악감정을 가진 위스누아에 그럴 여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후계자가 죽고 가문의 사활을 걸었던 알비야 공작마저 추락한 마당에 현재 만포르차 가문은 위스누아의 통치권을 유지하는 데만도 허덕이고 있었다.

더욱이 서쪽의 프라가가 호시탐탐 위스누아를 점령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으니, 다른 도시 국가들 역시 언제 터질지 모르는 내전을 대비해 도시 방어에만 전념하는 실정이었다.

이렇듯 복잡한 정세로 말미암아 현재 교국을 침공할 만한 여력이 있는 국가는 전무했다. 성도를 휘감았던 불안감은 점차 사그라졌고, 어차피 먼 데서 벌어질 전쟁에 시민들은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말로는 쓸데없이 병사를 추가 징발하기보단, 용 기병대를 주축으로 한 소규모 파병이 이루어질 것이라 했다. 머릿수로는 절대 라발을 당해 낼 수 없는 만큼, 비할 데 없이 강력한 용 기병대야말로 진정 황제에게 도움이 될 것이었다. 시민들도 이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했다.

그러나 곧이어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경악스러운 소식이 성도를 강타했다.

바로 엘피도 공작과 카타리나 공작이 몸소 라발로 행차하리라는 것이었다.

근위대의 왈테르는 한 달이 넘도록 칩거 중이었다.

혹자는 단장으로서 부단장 본시오의 만행을 막지 못했던 죄책감 때문이라 하였고, 혹자는 돌아온 단장 미란테에게 사실상 내쳐진 것이 아니냐고 하였다. 성도로 돌아와 다시 단장 자리에 오른 미란테는 아직도 부단장을 정하지 않았으므로, 왈테르를 둘러싼 소문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주변에서 무어라 수군거리든, 왈테르는 새벽같이 일어나 자정 넘어 잠들며 아주 고된 노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일평생 땀 흘리며 수련하던 몸으로 온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었으나, 이건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또한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왈테르는 주어진 사명을 완수해 냈다.

때는 푸르게 동이 터 오는 이른 시간이었다. 그는 피로에 젖은 몸을 깨끗하게 씻고 길을 나섰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으나 이상하리만큼 정신이 또렷했다.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근위 기사들의 어정쩡한 인사를 대충 받아넘기며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카타리나 공작의 집무실이었다.

“식사 중이시라고?”

그러나 카타리나 공작은 부재중이었다. 왈테르는 그제야 본인도 반나절 넘게 공복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의 품에 소중하게 안겨 있는 양피지들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오래지 않아 내전의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실례를 무릅쓰고 뵙기를 청한다 고하니, 어린 하녀가 식당의 문을 열고 나와 들어오시라 말했다. 왈테르는 문턱을 넘기 직전 다시 한번 자신의 옷차림을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주군 앞에서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용납할 수 없었다.

한여름의 식당은 눈부신 빛으로 가득했다.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유리창은 활짝 열려 있었는데, 커튼은 모두 가장자리에 얌전히 묶여 있었다. 어두운 복도에 익숙해져 있던 왈테르는 문턱을 넘자마자 들이치는 볕에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 와중 드넓은 식탁을 홀로 차지한 카타리나 공작은 휘황찬란한 빛을 익숙하게 두르고는 여유롭게 식기를 놀리고 있었다.

“…불의 종, 불의 사자, 우리를 인도하시는 소명의 천사 예리엘의 현신을 뵙습니다.”

더듬더듬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간 왈테르가 그녀와 서너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었으나 페기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식사를 이어 나갔다.

“지난 4년, 근위대 단장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못했던 점 진작 사죄드리며 용서를 구해야 했음이 옳으나, 미처 끝내지 못한 사명이 남아 있어 이제야 전하의 앞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왈테르는 품에서 정중히 양피지 묶음을 꺼냈다. 하녀가 대신 받아 페기에게 전달하자, 페기는 그제야 포크를 놓고 양피지를 한 장 들춰 보았다.

“전 단장인 마르코스 본시오를 비롯해 청백회에 가담했던 근위대원들의 죄를 낱낱이 기록한 문서입니다.”

4년 전.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미란테를 대신하여 왈테르가 단장직에 오르고 상부의 명령에 따라 본시오가 부단장 자리를 차지했을 때, 승패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십 년간 근위대 부단장으로 활약했던 왈테르는 불행히도 검술과 훈련 이외에는 젬병인 인간이었으므로, 천부적인 줄타기 재능으로 살아남은 본시오에 비할 것이 못 되었다. 누구보다 두 사람을 잘 아는 미란테는 그렇기에 대항하겠답시고 허튼짓하지 말라며 왈테르를 세뇌했다. 덤벼서 무조건 질 싸움이라면, 허울뿐인 단장직이나마 유지하고 있는 것이 나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족이 다 잘려 아무런 실권도 없는 허수아비 단장으로 전락했던 지난 4년.

왈테르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느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그는 새벽같이 일어나 훈련을 하고 혼자서 성궁을 돌며 태만해진 병사들을 책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본시오 일당이 하는 짓을 꾸준히 지켜보았다. 본시오를 비롯한 근위대원들은 왈테르의 눈을 피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경계심조차 갖추지 못했기에, 그들이 저지르는 수많은 범법 행위들을 발견하여 기록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당시에는 언젠가 네놈들의 죄를 낱낱이 밝혀 주리란 오기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미란테의 충고대로 멍청하고 힘없는 단장으로 살고 있긴 하여도, 왈테르는 본디 불같은 성질의 사내였다. 저를 무시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장미 기사단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본시오 일당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몰락한 이후, 왈테르는 기다렸다는 듯 지난 기록들을 끄집어냈다.

4년간 매일같이 작성한 기록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가히 한 사람이 정리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지만, 그는 기꺼이 지난 기록과 법전을 대조해 가며 본시오 일당의 죄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난 4년의 악행을 모두 벌로 되돌려 받아야만 했다. 사소한 죄목조차 지나칠 수 없었다.

“이걸 혼자서 다 했다고요.”

“예.”

왈테르는 묵묵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는 일종의 참회나 다름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곤 해도 그에겐 단장으로서 근위대를 제대로 이끌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짙게 남아 있었다.

한동안 양피지를 들여다보던 페기가 고개를 들었다.

“본시오는 지금 성궁에 있나요?”

바로 데려오라는 명령에 병사들이 즉각적으로 움직였다. 왈테르는 당장 본시오를 봐야겠다는 그녀의 진의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하염없는 기다림 끝에 손목이 묶인 본시오가 병사들에게 붙들려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빈말로도 성하다 할 수 없는 몰골이었다. 피딱지가 붙은 얼굴은 잔뜩 부어서 알아보기도 힘들었으며, 핏자국이 배어난 몸에는 고문의 흔적이 역력했다. 향기로운 음식 냄새로 가득하던 식당에 피비린내가 밀고 들어왔으나, 페기는 표정을 찡그리는 일 없이 그를 가만 바라보았다.

“…얌전하던가요.”

뒤늦게 자신을 향한 질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왈테르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대꾸했다.

“지하 감옥에 수감된 뒤로 몇 차례의 탈주 시도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하기야 어떻게 부지해 온 목숨인데, 그리 쉽게 포기가 될까요.”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여 이어져 온 생이었다. 페기는 마르코스 본시오라는 인물을 몹시 경멸하였으나, 삶에 대한 그의 욕망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병사들에게 붙들려 힘없이 고개만 수그리고 있던 본시오가 슬그머니 눈을 들었다. 좌우로 바쁘게 움직이는 시선을 보아하니, 여기서도 어떻게든 살 궁리를 하는 것이 눈에 뻔히 보였다. 페기는 손바닥에 살짝 턱을 괴며 조소했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

왜 불려 왔는지 몰라 돌아가는 꼴을 열심히 염탐하던 본시오가 눈치껏 입을 열었다. 제지하는 자가 없자 용기라도 생긴 것인지, 본시오의 목소리에 보다 힘이 실렸다.

“라발에서 곧 전쟁이 벌어진다고 들었습니다.”

요령이 얼마나 좋으면 지하 감옥에서도 땅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있는 걸까. 과연 어디까지 하려나 싶어 궁금해진 페기는 짐짓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라발 태생입니다. 교황 성하의 은덕으로 운 좋게 근위대로 편입되고도 라발과의 연을 놓지 않아 집 앞마당처럼 모조리 꿰뚫고 있지요.”

힐끔힐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마른 입술을 핥은 본시오가 별안간 철퍼덕 무릎을 꿇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병사들의 손까지 뿌리치며 두 손, 두 발로 기어 오려 했다. 페기는 그를 제지하려는 병사들을 눈짓으로 막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녀의 발치로 기어 온 본시오가 개처럼 헐떡거리며 매달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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