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2화 (322/328)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에 까만 머리, 그을린 피부가 어른거렸다. 레오폴트는 기침처럼 터져 나오는 울음을 힘겹게 삼키며 그에게로 간절히 손을 내뻗었다. 마치 그를 처음 만났던 먼 사막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제가 곧… 죽는다니요?”

살이 벗겨져 벌겋게 짓무른 손끝으로.

“교회는 아직 온전치 못합니다. 제가 있어야 합니다. 망가진 성도를 다시 세우고, 어린 사도들을 보살펴야 할 제가….”

“…….”

“이대로 죽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자 눈부신 태양을 등지고 역광 속에서 그를 굽어보던 천사는….

“네게 생명을 주겠다.”

병든 손을 맞잡으며.

“대신 너는 나의 종이 되어다오.”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씨를 나누어 주었다.

***

진작 죽었어야 마땅할 몸으로 정해진 수명을 넘겨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 까닭은 그러했다. 별 탈이 없는 한 천사의 불씨는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니, 병든 그의 몸은 이렇게 골골거리면서도 어떻게든 질긴 생명을 이어 갈 터.

하지만 이미 오래전 깨달았건대, 천사의 은총은 육신에만 한정된 것이었다. 이미 조각나 너덜너덜해진 그의 정신은 영원할 수가 없었다. 매일같이 썩고 재생되는 육신의 고통, 제 살과 같은 자식들을 하나둘 떠나보낼 때마다 가해진 정신적 타격은 계속 쌓여만 갔다. 한계를 넘어선 지는 오래였다.

이제 그의 정신은 영원히 숨 쉴 육신을 감당할 수가 없다. 아득바득 붙잡고 있던 집착마저 가신 마당에 그는 더 이상 고통만이 가득한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갈 이유가 없어졌다. 그에겐 안식이 필요했다. 죽음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었다.

“제발….”

레오폴트는 바들거리는 손끝을 힘겹게 뻗었다. 눈물로 애원하는 그를 보다 못한 페기가 질끈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리자, 예후르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레오폴트의 가면을 조심스럽게 벗겨 냈다.

어스름한 그늘 아래, 땀에 젖어 흐트러진 백금발과 고통에 일그러진 민낯이 서서히 드러난다.

섬세한 선으로 빚어졌되, 오랜 병마와 세월의 풍파로 허물어져 버린 얼굴의 윤곽. 나병 환자답게 벌겋게 살이 벗겨지고 누렇게 짓무른 피부가 실로 적나라했으나, 갈라진 살갗의 틈으로 흘러나오는 빛은 희미하나마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나의 종.”

“…….

“너의 노고를 잊지 않겠다.”

예후르의 손이 레오폴트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그러자 힘겹게 뜨여 있던 두 눈이 맥없이 감기고, 얼굴 사이사이로 새어 나오던 빛이 사그라든다. 아, 이제야…. 신음 섞인 탄식과 함께 흘러나온 마지막 숨결이 자취 없이 흩어졌다.

차마 그가 가는 모습을 볼 수 없어 끝까지 외면한 채 끓어오르는 울음을 참아 내던 페기는 결국 예후르의 품에서 눈물을 왈칵 쏟아 냈다.

터져 나오는 곡소리에 문밖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성하, 교황 성하…. 눈물로 범벅된 차라가 침실 안으로 뛰어 들어오고, 안드레아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둠 속으로 숨어든다. 가슴을 저미는 슬픔, 못 다 전하여 영원히 입 안에만 남을 말들.

멀리서 교황의 서거를 알리는 종소리가 아득하게 울려온다.

수십 년 만에 성벽 위로 내걸리는 흑기에 시민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울고, 가슴을 때리며 통곡한다. 눈물로 바다를 이룰 것처럼. 그렇게 성도를 영원히 잠기게 할 것처럼.

***

교황 레오폴트가 죽었다.

어린 나이에 성좌에 올라 각고의 노력 끝에 잿더미로 내려앉은 교회를 부흥시킨 장본인이었으므로, 그의 사망이 미친 여파는 만만치 않았다. 특히나 그를 특별하게 여기던 성도 오스피나 시민들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으며, 레오폴트와 함께 교회를 재건했던 나이 든 고위 성직자들 역시 오랜 벗을 잃은 것처럼 우울감에 시달리곤 했다.

그러나 흘러가는 시간은 그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법.

호사가들은 교황 레오폴트의 죽음이야말로 오스피나 참극 이후를 대변하던 세대의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이라 떠들어 댔다.

그도 그럴 것이 레오폴트는 라발을 배격하고 의도적으로 탐보프의 손을 들어 주던 장본인으로서, 지난 수십 년 동안 경직되었던 국제 정세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죽음은 이미 수년 전부터 변화의 급류에 휩쓸리던 국제 관계가 본격적으로 격변의 시대를 맞이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기실 변화의 징후는 수년째 교회 안팎에서 꾸준히 돋보이고 있었다.

우선 북방의 강자 탐보프는 수십 년째 지속되었던 통일화 정책에 대한 반동으로 다시금 분열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독립을 부르짖던 동부와는 기적적으로 합의점을 찾았으나, 지역 갈등은 여전히 심각하여 언제 또다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로 여겨졌다.

중앙 정계도 분열을 면치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알리오나 황녀와 결혼하여 후계자 자격을 획득한 도미에 변경백은 지금도 빌헬미나 황제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고 있었다. 피로 이어지지 않은 두 사람의 관계가 나아질 일은 요원해 보였으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북방의 대국 탐보프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노라 수군거리곤 했다.

하지만 위기는 백방에서 터져 나왔다.

리누스 도시 연맹의 맹주로 활약하던 위스누아의 몰락은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결말이었다.

하루아침에 사도로 각성해 교회의 실권자로 올라선 알비야 공작은 살아 돌아온 카타리나 공작과의 경쟁에서 패배하여 그릇된 사도로 내쳐지게 되었다. 그녀의 막후에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퀴테리아 추기경마저 낙오되자, 사력을 다해 그 두 사람을 지원했던 만포르차 가문은 몰락을 면할 길이 없어졌다. 오래전 후계자로 낙점되었던 세르난도마저 비명횡사한 마당이니, 심지어는 가문의 대가 완전히 끊길 위기였다.

그 틈에 새로이 리누스 도시 연맹의 맹주로 발돋움한 것은 연맹 동부의 오랜 강자인 프라가였다. 프라가는 위스누아와 달리 교국의 영향권에서 상대적으로 벗어난 지역으로, 바스토뉴의 야만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 곳이었다. 교회로선 새로이 프라가와 협조적인 관계를 다지는 것이 시급했다.

변혁의 물결을 맞은 또 다른 나라는 바로 라발이었다.

천 년 제국, 교회의 수호자, 대륙의 유일무이한 강자.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수식어를 차지하고 있는 이 오랜 제국은 요앙 오귀스트의 치하에서 평화로운 번영기를 누리고 있었다. 황제의 변덕스러운 성정과는 별개로 정치 체계는 안정되어 있었으며, 황제의 권력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게끔 잘 조립되어 있었다.

아마도 황태자 티에리가 어느 날 눈이 뒤집히지만 않았더라면, 황제의 염원대로 발루아 황가는 수백 년을 갔을지도 모른다. 티에리는 비록 아둔하고 나태하였으나, 천 년을 버텨 온 라발의 견고한 체계는 고작 멍청한 황제 따위로 무너질 것이 아니었다. 하물며 요앙 오귀스트는 아둔하지만 유일무이한 후계자를 위해 자신의 사후를 치밀하게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황태자는 역사에 길이 남을 어리석은 짓을 저질러 버렸다. 가만히 참고 인내하였으면 고스란히 제게로 내려왔을 제좌를 탐하여 내전을 일으켰으며, 심지어는 이기지도 못하여 개죽음을 당했다. 누미디아가 함락되는 광경을 보다가 심장이 멎어 버린 요앙 오귀스트는 덤이었다.

하루아침에 황제와 황태자를 모조리 잃어버린 라발은 당연히 혼란에 휩싸였다. 아무리 견고한 체계를 갖추었다곤 하나, 우두머리가 없는 조직은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불행히도 요앙 오귀스트에겐 황태자를 제외한 자식이 없었으며, 역적으로 죽은 황태자의 어린 사생아는 제위를 이을 자격이 없었다. 불과 한 대만에 끝난 발루아 황가를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겨 두고, 이제는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인물을 찾아 헤매야만 했다.

힘겹고 고단한 작업이었다.

당초 세잔의 어린 왕이었던 요앙 오귀스트를 데려온 것부터 라발에는 제좌에 오를 만한 인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요앙 오귀스트에게는 사촌인 크리상즈 공작이 있었으나, 그는 마흔이 넘는 생애 전부를 세잔에서 보낸 세잔인이라는 점에서 일찌감치 탈락이었다. 누미디아의 콧대 높은 귀족들은 더 이상 냄새나는 시골의 농부를 황제랍시고 모실 수 없었다.

그렇게 새로운 황제를 둘러싼 논의가 격화되는 가운데, 요앙 오귀스트의 시체는 절벽 아래서 천천히 썩어 가고 있었다.

심장이 멎음과 동시에 절벽에서 떨어져 버린 그의 시신은 위험한 지형이란 이유로 사실상 버려져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나 겨우 정신을 차린 단돌로 공작의 엄명으로 수색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생전의 권위를 모두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사지 멀쩡한 구석이 없는 것으로도 모자라 두개골은 함몰되어 있었으며, 눈알은 까마귀에게 파먹힌 뒤였다. 의복이 아니었다면 진정 죽은 황제가 맞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런 요앙 오귀스트의 장례는 지나치리만큼 약소하게 치러졌다. 이미 대가 끊긴 황가의 마지막 황제를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이 많지 않았을뿐더러, 치열한 논의 끝에 겨우 옹립된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이 더욱 시급했기 때문이다. 독배를 마셨으나 장례만은 화려했던 디안드라 섭정과 달리, 참으로 초라한 결말이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라발의 제좌에 오른 것은 고작 일곱 살 된 여자아이였다. 전 황가인 살레르티나 왕조의 먼 방계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일찌감치 수도원에 맡겨져 성직자로 자라나던 아이였다.

재상으로서 가장 큰 결정권을 지니고 있던 단돌로 공작은 막후에서 권력을 휘두를 사람이 없는 천애 고아란 점에 가산점을 두었으며, 한편으론 차라리 어린아이를 들여 올바로 교육시키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물론 스스로 섭정이 될 수 있다는 계산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교회는 이 선택에 반발하지 않았고, 즉위식은 순탄하게 치러졌다. 수십 년간 요앙 오귀스트가 자행하던 측근 정치의 상징이었던 살라체 대궁전의 밀실도 자연스레 폐쇄되었다. 어찌 되었건 라발에도 새 시대가 열린 셈이었다.

그렇다면 교회의 새 시대는 누가 열 것인가.

탐보프에는 도미에 변경백이란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고, 리누스 도시 연맹에는 프라가가 우뚝 섰으며, 세잔에는 비로소 크리상즈 공작이 평생의 염원이던 왕위를 차지했다. 라발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성도 오스피나만은 여전히 잠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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