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아무래도 엘피도 공작이 권력을 차지하지 않겠느냐 하였고, 혹자는 카타리나 공작이 민심을 등에 업고 성좌에 오르지 않겠느냐 하였다. 나지막한 수군거림 속에는 행여 두 사람이 권력을 두고 충돌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섞여 있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토록 조용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우려를 불식하듯, 레오폴트의 장례가 끝난 직후 또 다른 파란이 성도를 덮쳐 왔다.
바로 대성당의 성화가 하나 더 꺼졌다는 소식이었다.
***
페기는 텅 비어 있는 성화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등 뒤에서 촛대를 든 안드레아가 어둠을 뚫고 껄렁거리며 걸어 나왔다.
“봐. 내 말이 맞지?”
확실히 안드레아의 말대로 성 마르쿠스 대성당의 성화는 꺼져 있었다. 페기는 한참 동안의 고심 끝에야 겨우 그 사실을 인정했다. 단순히 눈앞의 광경을 받아들이는 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이런 결과를 초래한 원인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럼 너는 어떻게 된 거야?”
“뭐가.”
“내가 왜 이렇게 묻는지 알잖아.”
성화가 꺼졌다는 것은 곧 사도의 생명이 다했다는 것.
레오폴트가 죽고 성 발레론 대성당의 성화가 꺼진 것처럼, 성 마르쿠스 대성당의 성화가 꺼졌다면 안드레아의 신변에 어떤 이상이 생겼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눈앞의 안드레아는 이렇게나 멀쩡하다. 4년 전 뱀이 성 예리엘 대성당의 성화를 훔쳐 갔던 일이 또다시 반복되지 않은 이상, 꺼져 버린 성화와 멀쩡한 안드레아가 공존할 수는 없었다.
“예후르 그 새끼가 아무 말 안 해 줬어?”
“일이 있으니 나 혼자 가 보라던데.”
“낯짝도 보기 싫다는 거야, 뭐야.”
나지막하게 욕지거리를 중얼거린 안드레아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것저것 귀찮게 설명할 필요 없으니까 결론만 간단하게 말할게. 난 이제 사도가 아니야.”
페기는 말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더 자세한 설명을 요하는 눈빛이 빤하게 이어지자, 견디다 못한 안드레아가 다리를 덜덜 떨다가 재차 입술을 뗐다.
“내가 쓰던 사술. 그거 원래 천사의 권능을 갉아먹는 짓이야. 애새끼 시절부터 하도 남용했더니 드디어 내 안의 권능이란 것도 바닥이 난 거고.”
“…….”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알고 한 짓이니까.”
한마디 하려던 페기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안드레아는 늘 자유를 꿈꿔 왔다. 사도로서의 의무나 작위 따위는 그녀의 자유로운 삶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영감님 살아 계실 적에도 적당한 때가 되면 날 놓아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어. 이래저래 복잡한 일들이 계속 터져서 실천을 못 한 거지, 이제 나는 사도도 뭣도 아니고 성화도 꺼졌잖아. 일 크게 키워 봤자 내 권능이 다시 돌아오는 거 아니다. 사술을 부린 죄로 비올라처럼 옥고나 치르게 되겠지.”
“…나도 알아.”
페기는 조금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가만히 소매나 매만졌다.
일전에 안드레아는 훗날 적당한 때가 되거든 자신을 놓아 달라는 부탁을 해 왔다. 그것이 그녀의 일생일대 소원임을 모르지 않아 수락하고 말았지만, 이별의 순간이 이토록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레오폴트를 눈물로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이별이 남기고 간 가슴의 멍울은 여전히 지워질 줄 몰랐다.
“표정 풀어. 앞으로 못 보는 것도 아닌데.”
안드레아가 페기의 머리 위에 손을 턱 올려놓았다. 페기는 데구루루 눈만 굴려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조심해야 돼. 괜히 사고 치다 위험한 짓 하지 말고.”
“알았다니까.”
“그리고….”
페기가 아랫입술을 잠시 물었다가 놓았다.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와.”
“…….”
“다 같이 모여서 레오를 추억하는 날은 있어야지.”
페기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안드레아가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러고는 돌아서는 뒷등을 페기는 차마 붙잡지 못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오폴트를 사랑하는 안드레아의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저렇게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는 것도 레오폴트가 더 이상 이곳에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떠나기 전에 차라한테 인사라도 하고 가. 나중에 타박 듣지 말고.”
휘적휘적 대성당을 빠져나가는 안드레아가 길쭉하게 손만 들어 흔들었다. 페기는 멀어지는 뒷모습에다 대고 작별 인사를 덧붙이려다가 말았다. 안드레아의 말대로 앞으로 못 볼 사이도 아니었다. 구구절절 길어질 이유가 없다.
안드레아의 사망 소식은 이튿날 아침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레오폴트의 장례가 끝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시기였기에 경악 어린 파란이 제법 거세었지만, 평소 사도로서 그다지 명예롭지 못했던 전적 때문인지 크게 상심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다만 어디서 사고를 쳐서 죽었다더라, 앙심을 품은 누군가에게 칼 맞고 죽었다더라 하는 실체 없는 소문만이 암암리에 떠돌 뿐이었다.
그렇게 성 발레론 대성당의 뒤를 이어 성 마르쿠스 대성당의 문도 닫혔다.
이제 나르세스 광장을 둘러싼 여덟 대성당 중 열려 있는 대성당의 문은 단 세 개였다. 이는 교회를 수호하는 사도가 셋밖에 남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비록 안드레아가 교회의 수치라 불리던 망나니긴 하였어도, 레오폴트란 커다란 기둥에 이어 그녀마저 사라져 버리자 성직자들은 한순간에 비어 버린 두 사도의 자리를 보며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도란 천사의 권능을 상징하는 존재.
그 자체로 교회의 특수성과 우월함을 보여 주는 존재가 둘이나 사라졌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의 권위가 약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사도 한두 명이 겨우 명맥을 이어 가던 시기에 교회는 암흑기를 맞이했으며, 예후르를 시작으로 우후죽순 각성했던 사도들과 함께 교회는 다시금 부흥기를 맞이했다. 어쩌면 또다시 교회의 암흑기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머잖아 원탁으로도 확산되었다.
“갑자기 사도께서 두 분씩이나 돌아가셨으니 그런 말들이 도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마가 공작 전하의 장례식이 끝나는 즉시 지금의 암울한 분위기를 쇄신할 방편을 마련해야겠지요.”
“새 교황을 선출하는 문제 말이군요.”
그러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원탁 추기경들의 시선이 한 명에게로 모였다.
“…왜들 그리 쳐다보십니까?”
한가롭게 차향이나 즐기던 클레멘스가 안대로 덮이지 않은 눈을 껌벅이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솔란지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전으로 좀 들어가 보시란 말입니다. 그대가 엘피도 공작 전하와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측근임을 온 세상이 아는데 그리 여유작작할 기분이 나십니까?”
“사냥개가 주인 마음을 어찌 다 알겠습니까. 내려오는 명령이나 잘 따르면 그만이지요.”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신다고요?”
솔란지아가 도끼눈을 뜨자, 클레멘스는 어이쿠 소리를 내며 슬슬 시선을 피했다.
“그렇다기보단 기다려 보면 다 알 것이다, 이런 말씀이지요.”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됐습니다, 됐어요. 화를 내 보았자 나만 손해죠.”
솔란지아는 잔뜩 뿔이 난 표정으로 자세를 틀었다.
레오폴트의 장례를 치를 때는 그 핑계로, 또 지금은 마가 공작의 장례를 핑계로 엘피도 공작과 카타리나 공작은 원탁회의도 물린 채 내전에서 칩거만 하고 있었다.
하루빨리 새로운 교황을 정하여 옹립해야 하는데, 정작 그 당사자들이 회의를 거부하니 도리가 없다. 침묵이 길어지자 세간에는 교황 자리를 둘러싸고 두 공작이 갈등을 빚고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어떤 분이 성좌에 오르실지 빨리 결정되어야 비어 있는 원탁의 자리도 충원이 될 텐데 말입니다.”
기운 없이 앉아 있던 도미시오 추기경도 한마디 보탰다. 솔란지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머릿속으로 가만히 숫자를 헤아려 보았다.
현재 원탁을 지키는 추기경의 명단은 이러하다.
우선 사도인 엘피도 공작과 카타리나 공작, 그리고 복잡한 성도 사정으로 말미암아 연거푸 연기되던 성인식을 얼마 전 치러 작위를 받은 페란 공작.
클레멘스를 중심으로 모인 도미시오와 글리체리아가 라발 쪽으로 분류되며, 솔란지아와 람베르토는 출신지로 말미암아 같은 탐보프 진영으로 분류된다. 한때 아나클레토에게 붙어 있었으나 이후 청백회 쪽으로 기울었던 콘체사는 현재 원탁에서 가장 어정쩡한 위치라 할 수 있었다.
겉으로만 본다면 원탁의 공석은 퀴테리아와 보나벤투라, 안드레아의 빈자리뿐이지만, 이미 성도의 모두가 원탁에도 개혁의 바람이 불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솔란지아는 숱한 비리의 증거가 드러난 콘체사, 아나클레토와 깊은 연관이 있었던 람베르토가 우선적으로 물러나게 되리라 예측했다. 어쩌면 청백회와 손을 잡았던 그녀 역시 무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글리체리아 추기경께서도 은퇴하신다고 하더군요.”
그녀의 치열한 머릿속 사정을 읽은 것인지 도미시오가 울적하게 말을 보탰다. 잠시 멈칫했던 솔란지아가 그를 돌아보았다.
“은퇴요?”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무사히 제자리를 찾으셨으니 더 이상 성도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이제 누구를 믿고 원탁을 지켜야 할는지….”
클레멘스가 요앙 오귀스트를 배반한 것에 대단한 유감을 가지게 된 도미시오 추기경이 다 들으란 듯이 한탄했다. 정작 그의 말에 심란해진 사람은 클레멘스가 아닌 솔란지아였지만 말이다.
머리를 흔들며 애써 글리체리아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린 솔란지아가 빈정거리듯이 코웃음을 쳤다.
“축하드립니다, 클레멘스 추기경. 이제 그대의 입맛대로 원탁이 채워질 것이니, 아주 살맛이 나시겠습니다.”
“불경스러운 말씀이군요. 원탁 추기경은 새로이 교황이 되실 분께서 정하시게 될 겁니다.”
“그럴 의사가 있으시다면 저렇게 내전에서 칩거하실 이유가 없겠지요. 실은 죄다 그대에게 일임하신 것 아닙니까?”
“오, 설마요. 두 분은 그냥 정리 중이신 겁니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클레멘스가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왕 새 시대를 열 것이라면 과거의 잔재는 미리 쓸어 버려야겠지요. 아무렴 시작이 산뜻해야 맛도 좋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소린지…. 멍하니 있던 솔란지아가 대놓고 불평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클레멘스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며,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 하나를 잃고 맞이한 새 시대. 이만하면 좋게 발휘된 객기가 아닌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