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 성궁 떠날 거라며. 언제 떠날 건데?”
“몰라.”
“몰라? 떠나는 건 맞지? 설마 여기 눌러앉을 셈이야? 영원히?”
“아, 나도 모른다니까!”
차라가 빽 소리를 지르며 반대쪽 길로 성큼성큼 가 버렸다. 뒤에 남겨진 요슈아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을 걸 알지만, 차라는 좀체 감정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이게 다 쪽지 한 장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안드레아 때문이다.
레오폴트가 숨을 거둔 뒤로 깊은 우울감에 시달리던 차라는 장례가 끝나고도 며칠째 훌쩍이다 잠들곤 했는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발견한 것이 바로 안드레아의 쪽지였다.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쪽지에는 ‘고마웠어. 잘 지내.’라고 적혀 있었고, 심장이 철렁한 차라는 아침 댓바람부터 잠옷 차림으로 페기에게 달려갔다.
“조용히.”
하지만 쪽지를 받아 든 것은 페기와 동침하고 있던 예후르였다. 행여 안드레아에게도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식겁했던 차라는 어슴푸레한 침실에서 나신으로 일어나는 예후르를 보곤 조금 멍해졌다. 어쩐지 보면 안 될 장면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안드레아는 무사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쪽지를 읽고 예후르가 해 준 말은 그뿐이었다. 차라는 더 캐물을 생각도 못 하고 터덜터덜 방을 나왔다. 결국에 자세한 전말은 그날 오후에야 페기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페기는 그런 말로 다독여 주었지만, 차라는 상심한 마음을 좀체 달랠 길이 없었다.
하필이면 시기가 안 좋았다. 레오폴트를 떠나보낸 상황에 안드레아와도 기약 없는 이별에 직면하자, 마치 마음속에 커다란 구멍이라도 뚫려 버린 것 같았다. 애써 위로해 주면서도 우울한 기색이 남아 있는 페기의 표정이 그런 심리를 더욱 자극했다.
그런데 나까지 떠나 버리면 어떡해.
불쑥 치솟은 생각은 수년 동안 열심히 세워 두었던 성궁 탈출 계획을 와르르 무너트리고 말았다.
타고나길 살갑지 못한 성격이라 간지러운 말을 못 할 뿐이지, 차라는 사람에게 약했다. 낯선 사람이 도움을 청해 와도 매정하게 뿌리치질 못하는데, 가족 같은 페기가 눈에 밟히지 않을 리 없었다. 적어도 웃으면서 레오폴트를 추억할 수 있게 될 때까진 성궁에 머무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머리를 들었다.
게다가….
“전하, 오늘도 지하 감옥으로 가시겠습니까?”
눈치껏 그의 뒤를 졸졸 따라오던 시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차라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하라는 호칭이 부담스럽기도 하거니와 지하 감옥에 담긴 여러 함의가 지겹도록 싫었다.
“전하의 마음은 잘 알겠으나 부디 낮에는 지하 감옥으로 걸음 하는 것을 삼가 주십시오. 더는 외부의 눈을 피하기가 힘듭니다.”
지하 감옥에는 비올라가 갇혀 있다.
“…왜. 누가 날 막으라고 시켰어? 내가 지하 감옥에 가지 못하도록?”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시종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지그시 시종을 노려보던 차라가 고개를 휙 돌렸다. 또다시 어딘가로 척척 걸어가는 그의 모습에 잔뜩 주눅 든 시종이 다시금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혹시 지금 지하 감옥으로 가시는….”
“아냐! 지하 감옥은 저쪽이잖아!”
“저, 전하, 조금만 목소리를 낮추어 주십시오.”
안 그래도 심란하던 마음이 흙탕물처럼 아주 어지러워졌다. 홧김에 발 닿는 데로 걷던 차라가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며 주저앉았다.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레오폴트는 죽었고, 안드레아는 떠났으며, 비올라는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른다.
성궁을 차마 떠나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는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비올라.
비록 페기와 비올라는 상대가 죽어야 살 수 있는 원수지간이라지만, 차라는 그렇게 모질어질 수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페기의 편을 들어 주었으면서 매정하게 비올라의 손을 놓지도 못했다. 비올라가 그를 어떻게 생각했건 그는 비올라 역시 가족이라 여겨 왔다. 가짜 사도임이 확실해진 지금도 그 생각만은 변함없었다.
게다가.
“차라, 네가 나 대신 비올라를 돌보아 주련.”
생전의 레오폴트는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차라를 불러 그리 이르곤 했다. 스스로 할 수 없는 부모 역할을 아직 어린 너에게 미루어 미안하다는 말도 늘 함께였다. 차라는 그런 레오폴트가 싫었다. 항상 혼자서 모든 짐을 끌어안으려 하고, 항상 자식들에게 미안하다고만 하는 그가 싫어서 부끄럽지만 눈물도 찔끔 보였었다.
그러니까 이는 레오폴트의 유언과도 다름없는 말이었다. 차라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이던 레오폴트의 마지막 부탁을 꼭 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세간의 눈을 피해 가며 밤이면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 비올라를 돌보아 주곤 했으나, 새로운 교황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자 더는 시종도 모른 척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페기는 비올라를 어떻게 할까.
마지막 재판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차라는 사형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다른 죄도 아닌 사도 사칭죄였다. 하물며 비올라를 비호해 줄 위스누아의 만포르차 가문은 몰락의 수순을 밟고 있다. 외톨이로 남은 비올라에게 페기가 한 줌 자비라도 베풀어 주면 좋으련만, 탈주한 퀴테리아가 라발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어째 말을 꺼내 보기도 면구스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페기의 약점이라도 잡고 싶다. 비겁한 방법임을 모르지 않으나, 차라는 그렇게 해서라도 죽은 레오폴트의 유언을 이루어 주고 싶었다. 비올라를 다시 알비야 공작의 자리로 되돌려 달라는 부탁도 아니고, 그녀를 용서해 달라는 부탁도 아니다. 그저 이대로 죽지 않게만, 이름과 신분을 바꾸어 먼 시골에 조용히 묻혀 살게만 해 달라는 청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비올라가 남들 모르게 저 다그마르 산맥 부근에 숨어 산다고 하여 페기와 예후르에게 별 해가 가진 않으리라는 계산은 이미 섰다. 사도라는 명예와 가문의 비호까지 잃어버린 비올라는 정치적으로 더 이상 가치 없는 인물이기에, 페기만 결단을 내려 준다면 은밀하게 빼돌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레오폴트의 유언, 그간 차라가 보여 왔던 그녀에 대한 헌신…. 차라는 모든 패를 내놓을 자신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페기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자신이 들지 않았다. 적으로 규정된 존재에 한하여 무섭도록 싸늘해지던 그녀의 태도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럼 어쩌지, 어떡해야 하지.
성궁 길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던 차라는 불현듯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전하? 여기서 무엇 하시는 겁니까?”
레오폴트의 장례 이후로는 처음 보는 고드릭 수도사였다. 멍하니 눈만 끔벅이던 차라가 얼결에 그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시종은 대체 무얼 했기에 전하를 이런 곳에….”
“내가 멋대로 주저앉아 있던 거예요.”
딱 잘라 말하던 차라는 고드릭을 따라 짐을 짊어지고 오는 하인들을 보았다.
“저게 다 뭐예요?”
“아…. 돌아가신 성하의 물건들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멀뚱하던 차라의 표정이 조금 허물어졌다. 잠시 어중간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고드릭이 얼른 하인의 품에서 낡은 공책을 꺼내 들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성하께서 젊으실 적에 쓰셨던 일기입니다.”
“레오가 일기도 썼어요?”
“심지어 자필로 쓰셨지요.”
차라의 눈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레오폴트는 나병이 악화된 이후로 양손을 천으로 칭칭 감고 다녔다. 어쩔 수 없이 고드릭이 늘 대필하였으므로 차라는 레오폴트의 필체를 본 적이 없었다.
고드릭은 차라의 곁으로 붙어 일기장을 펼쳐 들었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 위로 어린애가 쓴 것처럼 엉망진창인 글씨체가 드러났다. 고드릭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었다.
“명필은 아니셨지요. 처음 성하를 모시게 되었던 날, 성하의 필체를 해석하느라 아주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보다 못한 성하께서 한 글자, 한 글자 짚어 주며 말씀해 주셨는데….”
“…….”
“전하?”
고드릭은 반응 없는 차라를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살짝 떨리는 듯한 차라의 손끝이 일기장에 닿았다.
“이게… 레오의 필체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차라가 고드릭의 손에서 일기장을 가져갔다. 영문을 몰라 하던 고드릭은 뒤이어 들려오는 차라의 엉뚱한 질문에 더욱 의아해졌다.
“저기… 고드릭, 레오를 오래 모셨다고 했잖아요. 그럼 혹시 레오가 헤르고미 문서 기록원을 드나들었을 때가 언제인지 기억해요?”
“헤르고미 문서 기록원이라면….”
“네, 성궁 밖에 있는 그 건물 말이에요. 기억나요?”
거듭된 재촉에 고드릭은 당혹한 기색으로도 열심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예에… 젊으실 적 한동안 그곳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셨었지요.”
“거기서 무얼 했는지는 모르고요?”
“대부분 혼자 들어가셨으니까요. 문서 기록원이니 아마도 고서를 탐독하지 않으셨을지…. 하루 일과를 거의 그곳에서 보내시는 통에 걱정이 참 많았습니다만,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성궁에 들어오신 뒤로는 발걸음이 뜸해지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예후르가 들어온 뒤….”
“예. 아, 그리고.”
고드릭이 막 생각난 것처럼 턱을 쓰다듬던 손을 멈추었다.
“문서 기록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들을 대거 파쇄하라 명하셨습니다. 한동안 탐독하시더니 왜 갑자기 파쇄를 명하시는 건가 싶어 의아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
“그게 언제였더라… 아마도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막 입궁하셨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