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5화 (325/328)

고드릭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갑자기 차라가 어딘가로 급하게 뛰어갔기 때문이다.

이상하리만큼 꼼꼼하게 치워져 있었던 고서들.

제아무리 이단 심문관들이 병적인 신앙에 도취해 있다 한들, 번역되어 세간에 나도는 금서들을 처리하면서 동시에 옛 사어로 쓰여 먼지 속에 처박혀 있던 고서에까지 신경을 쓰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완벽하게 치워진 것도 아니고 정체불명의 메모가 적힌 책들은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마치 지정된 몇몇 서적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조리 정리하란 명령이라도 내려진 것처럼.

“어디 가!”

정신없이 복도를 내달리던 차라가 별안간 그를 뒤쫓아 오던 요슈아의 손에 붙들렸다.

“넘어지겠다, 좀 조심히….”

“레오였어.”

“…….”

“그 메모를 쓴 사람, 레오였다고.”

어리둥절하던 요슈아의 표정이 점차 굳어 갔다.

페기가 부활한 이유를 찾겠답시고 문서 기록원을 들쑤시고 다니다가 우연히 손에 닿았던 악필의 메모.

그것은 종내 천사와 뱀에 얽힌 과거의 비밀들을 들추어내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자연스레 의문이 몰려왔다.

“성하께서 왜 그런 짓을….”

차라는 혼란스러워하는 요슈아를 내버려 두고 다시 침실을 향해 달렸다.

레오폴트가 어떤 마음으로 금서를 탐독하기 시작했는지는 더 이상 알 수 없다. 다만 페기가 성궁으로 들어온 직후 연관된 다른 서적들을 모두 파쇄하란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 중요했다.

왜?

차라는 도저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레오폴트는 도대체 무엇을 숨기려 한 것인지. 페기와는 무슨 관련이 있는지. 단순히 시기상의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꺼림칙한 부분이 너무도 많았다. 그리고 차라는 자신의 감이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다급하게 바닥을 차오르던 발이 끼익, 소리를 내며 모퉁이를 돌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지금부터 알아 가면 될 일이다.

레오폴트가 어찌하여 비밀의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는 메모만은 남겨 두었는지 모를 일이나, 차라는 그 옛날 그의 선택에 감사하기로 했다. 덕분에 비올라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비밀을 파헤치려는 의도는 다른 게 아니다. 그의 바람은 그토록 소박했다.

그런데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 도착한 침실의 문을 열어젖히자, 기다렸다는 듯 거센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반사적으로 양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 차라가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침실의 삼면을 에워싼 창문들이 죄 열려 있었다. 폭풍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눈앞의 광경도 충분히 아연하였지만, 그보다 창틀에 앉아 있는 올빼미에게 시선을 모조리 빼앗겨 버렸다.

압도하는 금빛 안광.

부리에 물린… 찢겨 나간 고서의 낱장들.

그것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레오폴트의 메모임을 깨달은 차라가 저도 모르게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동시에 올빼미는 지체 없이 날개를 퍼드덕거리며 창밖으로 날아올랐다. 차라가 다급히 창가로 달려갔을 때, 올빼미는 이미 흐린 하늘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진 뒤였다.

***

위스누아의 비올라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기실 모두가 예상한 대로였다. 사도 사칭이란 중죄를 범한 데다 비호해 줄 세력까지 사라진 그녀는 이제 정치적으로 쓸모없는 패가 되었기 때문이다.

명실상부 교회의 권력자로 발돋움한 엘피도 공작과 카타리나 공작의 뜻에 반하면서까지 그녀를 지켜 줄 사람은 이 교회에 남아 있지 않았다. 탈주하여 라발의 황태자에게 붙었던 퀴테리아마저 비명횡사한 마당이었으니, 당사자인 비올라조차 만사 포기한 태도로 선고를 들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페기에게 그 소식이 전해진 것은 캄페지오의 대주교인 산딜라와 대담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알겠으니 나가 보세요.”

재판장의 소식을 전달해 준 수도사가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어쩌다 보니 비올라의 사형 소식을 함께 듣게 된 산딜라는 조금도 놀란 기색 없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지긋지긋했던 교회의 혼란도 이제야 마무리가 되겠군요.”

페기는 말없이 지긋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앞을 보지 못하는 중년의 대주교는 늘 그렇듯 속을 알기 어려운 말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교회가 다시 정상 궤도에 오르려면 혼란을 마무리 짓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교회의 앞날을 이끌어 나갈 자격 있는 지도자들이 있어야겠지요.”

“전하께선 잘해 내실 겁니다.”

“…….”

“아, 혹시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성좌에 오르기로 하셨나요?”

찻잔이 스쳐 지나간 산딜라의 입술에 소녀처럼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페기는 속엣말을 꺼내기를 잠시 고민했다. 엎지르면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에 결정했던 사안이며,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본들 산딜라만 한 적임자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와 엘피도 공작 중 누가 성좌에 오를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교황이 누리던 절대 권력은 원탁으로 이양될 예정이니까요.”

부드럽게 찻잔을 내려놓던 산딜라의 손끝이 움찔했다. 그대로 정지한 모습은 마치 지나간 말을 곱씹는 듯했다.

“앞으로 교황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히 모든 결정은 원탁에서 회의를 거쳐 이루어지겠지요. 교황을 비롯한 사도들은 원탁 추기경의 자격을 상실하게 될 것이니, 보다 많은 추기경들이 새로이 임명되어야 할 겁니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

“말리지 마세요. 이미 오래전에 굳힌 마음입니다.”

산딜라의 표정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페기는 엷은 미소를 지어 올렸다.

“선대 교황 성하께선 갓난아기 시절에 사도로 각성하시어 이미 어린 시절에 차기 교황으로 낙점받으셨지요.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체계적인 교육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타고난 자질 또한 교황의 자리에 걸맞으셨던 분입니다. 엘피도 공작 역시 마찬가지고요.”

“…….”

“하지만 모든 사도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지금이야 사도가 여럿이지만 언제 또다시 사도 한두 명으로 겨우 명맥이 이어지는 시대가 도래할지 모른다. 사도의 자질과 지도자로서의 자질은 전혀 다른 문제이므로, 사도에게 무조건적으로 좋은 지도자가 되리란 기대를 품을 수도 없었다. 지난 교회의 역사에서 암군이 보여 주었던 비극적인 사례는 수도 없이 많았다.

“나만 보아도 그래요. 교황의 자리와 거리가 멀었던 나는 일찍이 제왕학을 공부한 적이 없습니다. 이 자리로 올라오면서 배운 것 역시 협잡과 기만일 뿐, 제대로 된 통치술이라 할 수 없어요. 이런 내가 교황이 된다면 내 자리를 지키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겠으나 그 이상을 바라기는 무립니다.”

언제까지 사도들 중에서 훌륭한 지도자 감이 나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

그 자체로 천사께서 존재하심을 뜻하는 사도들은 그저 교회의 상징이자 숭배의 대상으로만 자리매김해야 했다.

“…제 의견을 구하고자 하심이 아니라면 어찌 저를 부르셨는지요.”

오래도록 침묵하던 산딜라가 비로소 입술을 뗐다. 페기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다리를 꼬았다.

“나와 엘피도 공작이 원탁에서 물러나면 교국은 클레멘스 추기경의 세상이 될 겁니다.”

경력으로나 세력으로나 현명함으로나 원탁에는 더 이상 그와 대적할 자가 없다. 페기와 예후르 역시 교회를 향한 그의 진심 어린 애정을 믿기에 기꺼이 교황의 권력을 이양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죠.”

“…….”

“나는 산딜라 대주교가 원탁으로 들어와 클레멘스 추기경을 견제해 주었으면 합니다.”

산딜라의 고개가 살짝 들렸다. 마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가늠하려는 것처럼.

“말이 견제지, 품고 계신 뜻을 펼칠 기회를 드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캄페지오는 평화롭고 아름답지만 대주교를 담기엔 너무 작은 도시예요. 지난 몇 년간의 혼란을 보며 성도를 쇄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하셨을 텐데요. 그렇지 않고서야 선대 교황 성하께서 제안하신 비밀 추기경 자리를 승낙하셨을 리 없겠죠.”

페기가 빙긋 웃었다.

“승낙하신다면 위스누아의 추기경 자리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위스누아는 원탁에서 클레멘스가 꿰차고 있는 페아노라 다음가는 서열을 누리는 도시. 클레멘스와 대적하려면 당연히 그 정도는 두르고 있어야 마땅했다.

“…클레멘스 추기경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본인의 세력권에서 적당한 자들을 물색하여 원탁 추기경으로 추천할 계획이라 하더군요.”

“원탁의 절반가량은 클레멘스 추기경과 함께하지 않는 자들로 채워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될까요?”

“아니요. 이미 저와 뜻을 함께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

“명단을 적어 드릴 테니 그분들도 원탁에 넣어 주십시오.”

무서우리만큼 침잠되어 있었던 산딜라의 얼굴이 어느새 맑게 개어 있었다. 사뭇 놀란 눈으로 산딜라를 응시하던 페기가 작게 웃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기분 좋은 아연함이었다.

곧이어 산딜라에게서 명단을 받은 페기는 접견실을 나와 서관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딜라가 제안을 수락하였으니 이제 원탁은 빠른 속도로 제 기능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녀는 새로운 교황이 탄생할 날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시대. 구태의연함을 벗어던진 서장.

하지만 그 전에 최종적으로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다. 페기는 집무실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수도사를 향해 다가갔다. 조금 전 접견실로 와 비올라의 재판 소식을 전해 주었던 수도사가 그녀를 발견하곤 허리를 깊숙이 숙여 보였다.

어쩌면 그녀가 저지를 마지막 기만.

“페기.”

그러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녀를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나랑 얘기 좀 해.”

차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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