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7화 (327/328)

부드럽게 하강한 올빼미가 날개를 접으며 창틀에 내려앉았다. 예후르는 고개를 틀어 애정 어린 눈빛으로 올빼미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우리 둘밖에 남지 않았구나.”

몇몇은 죽고 몇몇은 잠들었다. 그러나 예리엘이 죽어 가는 와중에도 깨어나지 않은 것을 아직도 잠이라 불러야 할까. 예후르는 오래전 잠든 벗들이 다시 깨어나리라고 여기지 않았다. 깊은 잠은 때로 죽음과 다르지 않았다.

지상으로 함께 내려왔던 그 많은 동족들이 죄 사라지고 단둘이 남았다는 사실은 못내 서글픈 감정을 일으켰다. 예후르는 올빼미의 깃털을 만지작거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제 옛일을 함께 추억할 사람도 너밖에 없어.”

“아직도 추억할 거리가 남아 있던가.”

“오랜만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떠올랐거든.”

예후르의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뱀이 한창 이 땅을 지배하고 있었던 시절.

천사를 숭배하는 이 도시가 그때는 뱀이 들어앉은 향락의 도시였으며, 교회의 질서를 따르는 만백성이 그때는 뱀이 맘껏 베푸는 사치와 쾌락에 젖어 있었다. 혼돈의 시대. 무질서의 땅. 뱀이 다스리는 왕국의 이름은 로잔이었다. 그래, 지워진 역사 속 그 왕국에도 이름이 있었다.

“아주 호화스러운 궁전이 세워져 있었지.”

맑은 날 햇볕을 받거든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궁전이었다. 백방의 금은보화를 긁어모아 지붕 꼭대기까지 뒤덮었던 뱀의 궁전은 어제보다 오늘이 더 화려하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화려했다. 낮이면 햇빛에 반짝이고 밤이면 달빛에 번쩍이니, 그 시절 사람들은 태양과 달을 겸하는 것이 지상에도 있노라 수군거리곤 했다.

하지만 끝을 모르는 뱀의 사치는 누군가의 고혈을 빨아 가능한 것이었다. 뱀의 궁전에 보석 하나가 더해질 때, 변방의 그늘에선 누군가 배를 곯으며 죽어 갔다. 궁전이 화려해질수록 원성은 높아지고, 궁전이 빛날수록 증오는 쌓여만 갔다. 민심은 최악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 뱀에게 원한을 품은 누군가가 나타났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란 말도 있었고, 아직 덜 자란 어린애란 말도 있었지.”

아무도 얼굴을 보지 못한 그는 야음을 틈타 뱀의 궁전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궁전에 박힌 보석들이 뿜어내는 빛조차 닿지 못하는 가장 낮고 가장 추레한 담벼락 아래, 남모르게 씨앗 하나를 심었다.

그늘진 땅에도 비는 내리고 한 줌의 햇빛이 든다. 땅속에서 꿈틀거리던 씨앗이 마침내 연약한 싹을 틔우니, 우연찮게 새싹을 발견한 뱀은 그 여린 떡잎을 아주 귀여워하게 되었다. 사람은 자고로 제 발치에서 자라나는 연약한 것을 아끼게 되는 법이었다.

싹은 뱀의 애정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하룻밤에 한 뼘씩, 또 하룻밤에 두 뼘씩. 땅의 모든 영양분을 독점하는 것처럼 성장하던 싹은 어느덧 보석 박힌 궁전의 벽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제야 깨닫길, 아, 저것은 덤불이로구나.

“궁전의 정원사들이 손 쓸 틈 없이 자라난 넝쿨은 순식간에 궁전을 감싸 안았지. 뱀의 궁전에 들었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봐. 보석 박힌 오색찬란한 궁전과 가시 돋친 덤불. 나는 처음 보고 토악질을 할 뻔했어. 부조화가 너무나도 흉물스러웠거든.”

올빼미의 깃털을 쓰다듬던 예후르의 손길이 조심스레 부리에 가 닿았다. 오래된 기억을 더듬는 금빛 눈에 세월의 안개가 서렸다.

“당시 먼 곳에서 도망 다니던 우리에게도 가시 돋친 덤불이 징그럽고 궁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소문이 들려왔어. 하지만 뱀은 덤불을 포기하지 않았지. 글쎄, 애정이었을 수도 있고 애정으로 길러 낸 시간이 아까웠을 수도 있어. 혹은 자신의 선택에 반발하는 이들이 아니꼬워 고집을 부렸을 수도 있지.”

좌우지간 덤불은 그 누구도 건들지 못했다. 보석을 사랑하고 술을 사랑하고 경주를 사랑하고도 사랑이 넘쳐흐르던 뱀은 제 발치에서 태어난 흉물에게마저 사랑을 주었다. 가시 돋친 덤불이 궁전을 죄어 오기 시작했을 때조차.

“그날 뱀은 궁전을 탈출하지 못했어.”

도시가 불타오르던 그 밤.

“우리가 지폈던 성화가 덤불에까지 옮겨 가 궁전은 금세 불바다가 되었지. 만일 덤불을 버렸다면 도망갈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뱀은 그러지 못했어. 덤불을 살리고자 아주 애를 썼지.”

그 어리석은 선택으로 말미암아 뱀은 봉인되었다.

덤불은 한 줌의 재가 되었고, 그토록 호화스럽던 궁전은 모조리 불타 흔적으로만 남았다.

“궁전 담벼락 아래 씨앗을 심었던 사람은 훗날 자신이 뱀의 발목을 잡게 될지 알았을까? 나는 그때 뱀을 비웃었던 것 같아. 그깟 아둔한 도둑을 죽이기 위하여 고향을 포기하고 신념을 포기하게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 수호해야 하는 불씨를 삼켜 뱀과 같은 진창으로 떨어졌다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어.”

“…….”

“하지만 나도 똑같은 신세가 되어 버린 거야.”

그저 여린 싹인 줄 알았던 그녀.

보살피고 돌보아 주다 보니 생겨 버린 애정.

나를 죽일 독초임에도 차마 베어 내지 못하여 함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이슬라.”

“…….”

“나는 그 애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

결국엔 뱀이 되어 버리고 만 천사가 말한다. 경고조차 달콤하게.

“그러니 너도 소중한 너의 아이를 지키려면 무슨 짓이든 해야 하지 않겠어?”

올빼미는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완전히 질려 버린 것처럼 금빛 눈에 초점이라곤 없다.

“너의 오해다. 차라는 그저….”

“그래, 비올라를 살리고 싶었겠지. 아니면 그저 호기심이었을 수도 있어. 하지만 너는 잘 알 텐데. 답을 찾아 심연 속을 헤매는 구도자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태생부터 어둠에 가장 가까웠던 심연의 천사는 늘 빛을 찾아 걷는다.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내내 그러했다. 처음에는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나 지금은 모르겠다. 그는 그저 걸어왔다. 천사와 인간을 막론하고 진리를 향한 탐구의 자세는 언제나 그랬었다.

순식간에 올빼미의 날개가 불어났다. 위협적으로 날아오른 올빼미의 눈알에서 바짝 약이 오른 독기가 번들거렸다.

“뱀에 대한 정보라면 이미 차단했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아이를 위해서.”

“…….”

“그러니 차라는 건들지 마라.”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금빛 안광이 형형했다. 예후르는 고개를 꺾어 올린 채로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숨겨진 비밀을 찾아 헤매는 탐구욕은 한 번의 실패로 그치지 않지.”

“…….”

“앞으로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거야. 네가 선택한 그 아이를 해치고 싶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노여움을 대변하듯 올빼미의 날개깃이 파르르 떨렸다. 곧이어 거칠게 퍼드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올빼미가 먼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멀어지는 뒤꽁무니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예후르가 손바닥에 턱을 괸 채로 가만히 눈을 내리떴다.

남은 천사는 하나.

남은 뱀도 하나.

천사도 뱀도 아닌 것이 하나 더.

그러나 인간은 이토록 많다. 어쩌면 그들도 뱀으로 쳐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뱀의 승리인가. 먼 옛날 최초로 불씨를 탐했던 나의 동족은 이런 결말을 원했을까. 이제는 아무도 닿지 못할 아득한 나의 고향에서 태초의 불은 아직도 타오르고 있을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무수하다.

한때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부했던 천사는 이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 눈앞의 길은 여러 갈래로 나뉘고, 시야를 가리는 희부연 안개는 여전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하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렇다면 나는 이 무수한 길 중에 어느 것을 택해야 하는가.

네가 서 있는 길이면 나는 될 것 같다.

아무래도 모르겠을 다른 것들은 이제 상관없다.

그는 눈을 떴다.

달은 지고 태양은 떠오른다.

모든 것이 불확실해진 세상에서도 자연의 흐름만은 규칙적으로 흘러간다. 여름이면 낮이 길어지고, 겨울이면 밤이 길어지는 것처럼. 깊어 가는 가을날의 날씨는 청명하다. 그렇게 또다시 밤이 찾아오고 아침이 시작된다.

그렇게 하루.

그렇게 또 하루.

지는 해를 등지고 그녀는 성 나르세스 광장을 가로지른다. 붉은 하늘, 타오르는 태양. 그녀의 등 뒤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다. 아직도 들려오는 소식이라곤 없다. 초조함을 껴안은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순례자들이 떠나간 광장에 사람이라곤 없다.

어제 그러했고 엊그제 그러했듯 그녀는 오늘도 성 예리엘 대성당으로 들었다. 촛불 하나 켜지 않은 어두운 사위에 성화만이 영롱하게 타오른다. 성당에는 그녀뿐이다. 숨소리조차 고요하게 잦아드는 장내. 천사가 죽었어도 천사를 숭배하는 성당은 변함없이 엄숙했다. 만백성의 염원이 싸여 다져진 거룩함이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달이 뜨고, 별이 뜬다.

숨 막히는 기다림의 시간은 계속된다. 사방은 어둠으로 잠식되었으며, 눈에 닿는 빛이란 저 멀리 자리한 성화뿐이다. 바람결에도 흔들리지 않고 기름 없이도 타오르는.

그런 성화가 어느 순간 꺼져 버렸다.

세상은 순식간에 빛이 닿지 않는 저 지하처럼 어두워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빛이 없는 길을 헤매어 기어이 제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이번에도 주저하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의연하게 발을 내디딘다.

그리고 손끝에서 타오르는 불씨.

페기는 빈 성화대에 불을 붙였다.

인간의 불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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