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여제. >
짧은 만남 강렬한 인상.
성녀와의 시간을 요약하자면 그러했다.
피로를 싹 씻어내던 축복.
그리고,
“크흠...큼...”
마루는 제 볼을 슬며시 쓰다듬었다.
한 때, 그의 핸드폰 바탕화면에 있던 여인의 두 번째 ‘접촉’을 떠올렸다.
[당신께 필요한 가호랍니다.]
성녀의 그림자에게 내린 것과 똑같은 가호라면서, 한동안 그의 존재감을 지워줄 거란 이야기와 함께, 왼쪽 뺨에 남기고 간 자그마한 흔적 하나.
‘두 번이 끝이려나?’
혹시 세 번째도 있다면?
‘첫 번째가 이마, 두 번째가 볼, 세 번째는...헤헤!’
묘한 기대감 뒤따르니, 다시금 그의 바탕화면에 레아의 사진이 올라오기에 충분했다.
“뭔 생각을 하기에, 귓불이 빨개?”
상념을 방해하는 음성에 급히 고개를 저었다.
“커험! 거, 아무것도 아냐.”
그러며 바라본 곳에는 허파is토스가 각종 무구를 주렁주렁 메고 있었다. 그녀가 질린다는 얼굴로 말했다.
“전직 때까지만 쓰라고 만들어준 장비를, 어떻게 70렙까지 쓸 수가 있냐.”
“제작자 솜씨가 워낙 좋아서 그렇지.”
거기다가 그의 기본 스탯이 워낙 높다 보니, 바꿔야 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한 것도 컸다. 당장 지금도 저 하위 무구를 찬 채, 무쌍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윽시 명장!”
굳이 이런 부분을 언급할 이유는 없기에, 슬쩍 그녀를 추켜 세워주는데 냉담한 반응만 돌아왔다.
“그렇게 아부해도 더는 안 깎아줄 거야. 거의 재료값에 주는 건데, 양심 좀 있어봐라.”
입맛을 다신 마루가 물었다.
“이거, 쪼렙 세트 되팔면...안 되겠지?”
“나한테 넘길 생각 말고, 그냥 경매장에다 맡겨라. 쯧! 귀찮게 굴지 말고.”
마루는 할 수 없다는 듯, 기존의 방어구를 벗어 인벤토리 창고로 집어넣은 뒤, 새롭게 제작된 장비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눈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S-M 방어구 세트]
“이름은 또 왜 이따군데?”
“슈퍼-몽크의 약자다.”
“......”
마루의 눈매가 얇아졌다. 의심스런 구석이 너무 많았지만 차마 따지지 못하는 건, 절대적 을의 입장이기 때문이리라.
“눈깔에 힘 빼라. 콱! 이대로 화로에 집어넣을까?”
“헤헤!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눈에 힘 줬다고.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캐릭터라서 그래. 오해야. 오해. 캐릭터 만들 때 색소가 진하게 들어가서 그런가 보다.”
“입 털긴, 눈깔에 색소를 쪽 뽑아버릴까 보다.”
마루가 눈치를 보며 급히 장비를 챙겨 입었다.
[S-M 방어구 세트 - 머리, 어깨, 상의, 하의, 신발]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5세트 방어구였다.
아이템 세트에도 등급이 있어서, 3세트는 하급이고 5세트는 기본, 7세트는 고급으로 분류되고는 했다.
‘7세트 아이템은 보기 어렵지.’
애초에 이 구간에서 7세트는 착용 불가였다.
5세트 아이템은 1차 전직 이후, 7세트는 2차 전직 이후부터 착용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열~! 희귀 등급이라니. 땡큐. 당케. 쒜쒜...”
시원하게 뻗어 나온 스트레이트에 턱주가리가 돌아간 뒤에야 입을 닫을 수 있었다.
[힘, 지능, 체력, 정신력, 민첩 +20]
기본 옵션에 [전 스탯 +5]이라는 세트 옵션까지 더해지며, 총 스탯 125짜리 희귀 아이템이 장착되었다. 기존의 50스탯에서 배 이상 올라간 스탯으로써, 단번에 15레벨 상승의 효과를 이뤄낸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특수옵션 : 가속]
비록 하급이지만 스킬이 붙어있었다.
그가 지니고 있는 스킬이지만, 장비 옵션 스킬과 기본 스킬은 별도로 적용되다 보니, 중첩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매번 말하는데, 가격 깎아주는 건 이번까지야. 다음부터는 얄짤 없으니까. 지갑 두둑이 챙겨서 와.”
그 말에 마루가 슬쩍 손을 비볐다.
“기왕이면 악세사리도 할인 좀...”
“한 대로는 부족했냐?”
“......”
마루를 합죽이로 만든 허파is토스가 새로운 장비를 건넸다.
[S-M 악세사리 세트 - 귀걸이, 목걸이, 반지]
장비 이름은 동일하지만, 이는 허파is토스가 만든 게 아니었다. 친분관계를 통한 외주제작으로써, 악세사리는 전공이 아니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앞서 [오류난 쪼렙 귀걸이 세트]가 특수한 경우였다.
“희귀등급 부터는 내 관할 아니야.”
그러며 외주를 맡긴 탓에, 악세사리는 제값을 치르고 구입해야만 했는데, 그래도 연줄을 통해 제작한 만큼 완성도는 높았다.
[귀걸이 - 지능 : 10] [목걸이 - 정신력 : 10]
[반지 - 체력 : 10]
[세트옵션 - 민첩 : 10]
[특수옵션 : 차력]
이를 증명하듯 끝자락에 붙은 스킬이 그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희귀등급 세트 아이템이라 해도 ‘3세트’라면 스킬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최하급의 차력 스킬이지만, 중첩을 생각한다면 이마저도 감지덕지였다.
힘을 제외하고 각기 10스탯씩 추가였지만, 차력 스킬로 힘 스탯의 부족함을 커버할 수 있을 터였다.
“요즘 접속률 높더라. 어째? 게이트는 접었어?”
돈주머니를 챙기던 허파is토스의 물음에 마루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말만 휴가지. 제대로 쉰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이참에 좀 쉴까 해서. 그런데 막상 쉬려고 보니까 할 게 없더라고. 그래서 결국 이렇게 게임만 하게 되네. 하핫!”
감시망이나 스킬구현을 밝힐 수 없기에, 적당히 둘러댈 뿐이었다.
“그런 놈 치고는, 요상한 주문들이 많던데.”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 들어간 주문이었다.
“거 참, 아저씨는 비밀로 해 달라니까.”
허파is토스, 강하나의 단야 대장간이 아닌, 그녀의 부친을 통해서 별도 주문을 한 상태였다. 대장간 왕좌에서 쫓겨난 뒤, 집 마당 창고에서 소일거리를 하고 있는데, 거기다가 별도 주문을 한 것이다.
“말 돌리지 말고. 누가 또 귀찮게 하는 거냐?”
이번에도 적당히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알잖아. 이 바닥 생활 13~5년이면, 이래저래 얽힌 놈들 많은 거.”
“그래서? 인간 사냥이라도 하게?”
“겸사겸사 준비하는 거지.”
정말 최악의 경우를 상기하며 일반 무장을 강화하는 정도였다. 그 정도는 강하나가 아닌 그녀 부친의 실력으로도 차고 넘치기에, 뒤로 몰래 주문을 한 것이건만, 결국 걸려버린 모양이었다.
“아저씨 용돈벌이 좀 시켜드린 거니까. 괜한 걱정 할 필요 없어.”
불필요하게 말이 길어지다 쓸데없는 말이 나오는 걸 피하고자, 거기까지 말한 뒤 도망치듯 대장간을 벗어났다.
“야!”
뒤로 허파is토스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마루는 멀리 골목길로 접어드는 상황이었다.
“나중에 보자고.”
인사말은 짧게 끝냈다.
**
[다음에 다시 만나요~!]
[짧은 휴가를 마치며, 떠나는 그녀.]
[뒤태가 예뻐.]
[빠까. 이반나!]
[다스비다니야!]
러시아의 랭커가 긴 휴가를 끝내며 드디어 한국을 떴다.
그로 인해 한국의 많은 길드 및 헌터들은 적잖은 안도감과 함께 어깨의 힘을 뺄 수 있었다.
휴가니 뭐니 했지만, 초인이 머문 자리는 결국 태풍의 핵과 같아서, 그 주변이 요동치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건 그녀와 친분을 가진 이들도 다를 게 없었다.
이소희와 김연희.
남다른 인연으로 인해, 더더욱 조심해야 하는 부분마저 있을 정도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그들 둘의 ‘특별한 정보’였다.
[무지개빛 아우라의 주인]
이반나는 친분을 앞세우며 심심할 때마다 찾아왔다.
그 때문에 함께하는 시간이 상당했다. 그 와중에 그녀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챌까 싶어, 일부러 목표물에 대한 접촉을 자제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난 지금, 더는 그 같은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가자.”
“예. 언니.”
그렇게 오랜만에 찾은 목표물의 거처.
이소희는 그 주변을 쭈욱 돌아보더니, 살짝 굳어진 표정으로 뜻밖의 명령을 내렸다.
“철수해.”
갑작스런 소리에 김연희가 의문을 내비치는데, 이어지는 이야기가 놀라웠다.
“감시망 들켰어.”
“...장난?”
“진짜.”
“레알?”
“트루.”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안 믿을 수도 없고.’
아직 A급에 머물고 있다고는 하나, 발 하나 정도는 S급에 비비고 있는 게 바로 얼음여제의 현 위치였다.
보통 각성자라면 피하기 어려운 게 현대문물의 감시망이지만, 랭커 수준에 이르면 충분히 커버하며 커트하는 게 가능했다.
“감시망을 역으로 지켜보고 있네.”
그리 말한 이소희는 몇몇 포인트를 짚어줬고, 김연희는 숨겨진 소형 카메라들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하...”
나직한 탄성에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괜히 카메라 건들지 말고, 조용히 감시팀만 물려.”
이소희의 명에 김연희는 바로 무전을 날렸다.
“확실히...보통 D급은 아닌 모양이네.”
잠시 숨을 고른 뒤에야 김연희의 말문이 트였다.
“하긴, 아우라가 심상찮긴 하더라.”
랭커의 감각 못지않게 특별한 눈을 지닌 그녀의 말이었다.
“와~! 그럼 요즘 들어서 집 밖으로 안 나오는 게, 감시망이 들켜서 그런 거야?”
그녀의 물음에 이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게다가 전혀 나오지 않은 건 아닐 거다.”
이소희는 그리 말하며 역감시망의 포인트를 눈짓했다. 김연희의 감시팀을 속이며 이리저리 외출을 했단 증거가 저기 있는 까닭이었다.
거기서 한 차례 의문을 품어봤다.
“그런데, 역감시. 저거 마루 그 사람이 한 거 맞나?”
워낙 믿기 어려운 상황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리 묻고 만 것인데, 이에 대한 이소희의 답변은 심플했다.
“알아봐야지.”
“어떻게?”
“만나서.”
“직접?”
뜻밖의 대답에 놀란 듯, 김연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차피 만날 생각이었어.”
던전 사태의 정리 및 이반나의 활갯짓 등만 아니었다면 일찌감치 움직였을 터였다.
“쓸데없이 시간 끌 필요 없잖아.”
그리 말한 이소희가 핸드폰을 들었다.
**
“크아아아아아~!”
“워어어어~!”
성난 외침과 함께 달려드는 대형 몬스터들을 바라보며 양 손의 검을 꾸욱 움켜쥐었다.
“수상한 가호!”
등 뒤로 쏟아지는 버프와 함께 알람이 떠올랐다.
[랜덤 축복이 발동합니다.]
[낮은 확률로 회복력이 증가됩니다.]
‘꽝인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훌쩍 전장 속으로 몸을 던졌다.
촤좌좌좌좌좍...
쌍검이 유려한 춤을 추지만, 이쑤시개 같은 검광은 거대 몬스터의 몸부림 한 번이면 자취를 감추기 일쑤였다.
“탱커! 늦잖아. 차지! 차지!”
뒤쪽에서 급히 오더가 따라오며 지원이 들어오지만, 전장 깊숙이 파고든 검사의 춤사위와 어울리며 리듬을 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파팍! 파파팍!
궁수의 센스 있는 속사가 그나마 사이사이 운율을 더해주며, 검광 속에 바운스를 심어주는 정도였다.
한 눈에 봐도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한 무희의 몸짓에도 불구하고, 팀원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몇 차례 합을 맞춰보면서 겪었던 광경이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끄어어어어...”
몬스터 한 마리가 무릎을 꿇는 게 보였다.
큼지막한 도화지 위로 빼곡한 빗금을 칠해놓은 듯, 이쑤시개 같던 검광이 어느새 전신 가득 검흔을 새겨놓은 것이다.
마지막 숨을 헐떡거리며 꾸역꾸역 몸뚱이를 일으켜보려 하지만, 준비된 사수의 묵직한 한 방이 관자놀이를 꿰뚫으며 숨통을 끊어놓았다.
“미쳤네!”
결국, 오더를 내리던 파티장이 탄성을 내질렀다. 이는 다른 파티원들 역시 비슷한 심경이었다.
“허...소문이 정말이었어.”
근래에 떠도는 소문 하나가 있었다.
[검귀가 떴다.]
[쌍검술을 한다더라.]
[경갑에 가면을 쓰고 다닌데.]
파티장은 마지막 소문을 상기하며 입을 열었다.
“나바 가면을 쓴 검귀!”
애벌레들의 시트콤 애니메이션.
호로로처럼 21c 초반에 히트하던 만화로써, 그곳의 주요 캐릭터 가면을 쓰고 있다면? 한 번쯤 의심해 보라는 소문이었다.
그 때문에 되도 않는 쌍검을 보며 겉멋이라 비웃고 의심하는 한편, 혹시나 하는 일말의 마음으로 파티에 받은 것인데, 설마설마 하던 잭팟이 터져버렸다.
“투귀 호로로에 검귀 나바라...”
“만화 같네.”
“요즘 이 동네가 미쳐 돌아가나?”
하위 필드가 들썩이고 있었다.
**
방어구를 바꾸며 스탯을 올린 덕분일까?
‘역시, 숙련도는 쌍검이지.’
기본 검형이 아니라 쌍검형을 취하는 게 가능해졌다. 이전에도 쌍검을 들 수야 있었지만, 둘 모두를 컨트롤하기엔 일말의 부족함이 있었다.
“흐흐..”
마루는 쑥쑥 올라가는 스킬 숙련도를 보며 입 꼬리를 올렸다. 이는 일종의 편법으로써, 하위의 검술 스킬은 이런 식의 양손 단련을 통해 숙련도 뻥튀기 작업이 가능했다.
‘곧 손날검으로 조합할 수 있겠네.’
문득, 그에게 따라붙은 별명 하나가 떠올랐다.
[검귀!]
비각성 헌터로써 다양한 무예를 배운 바 있고, 검도 역시도 제법 몸에 익혀놨지만, 저런 칭호가 어울릴 정도는 아니었다.
‘이래서 게임은 스탯빨이라니까.’
압도적인 능력치로 좀 더 빠르고 좀 더 강하게 두드릴 수 있다 보니, 자연히 저런 반응들이 뒤따르게 된 것이다.
옅은 실소와 함께 VR기기를 벗으며 자리를 정리하던 때였다.
우웅...웅...우우우웅...
핸드폰이 울었다.
‘누구?’
게이트 관리부에는 한동안 쉰다고 연락을 취해놨기에, 어지간하면 연락 올 곳이 없었다.
의아한 마음으로 확인하는데,
[얼음여제 이소희]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떠있었다.
< #17. 여제. > 끝
ⓒ 주작(朱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