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성장. >
꼬봇과 돌리가 먼지가 되어 부스러졌다.
로그 아웃이었다.
갑작스런 반전 기습으로 인한 경직과 [순살]스킬의 급소검색에, [동력]스킬의 폭발적인 괴력이 만들어낸 치명타 연계의 시너지효과였다.
“역시, 카르마 경험치가 짭짤하네.”
일찌감치 시야를 조작해 경험치 바를 띄워놨던 듯, 마루는 차오르는 게이지를 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어우...PK깨나 하고 다녔네.”
그 시점에서 쿠크몽은 발각됐다는 걸 인정했다. 당연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알았지?”
“머드 오크에 환각초. 조합이 너무 조잡하잖아.”
“정석적인 사냥법인데?”
너무도 당연한 물음이지만, 마루 입장에선 아니었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라스달의 눈물? 사람한테 쓰는 환각초로 머드 오크를 잡는다고? 어디서 약을 팔아.”
“어떻게 그걸...”
“우리 직업군이 이래저래 억울한 면이 많단다.”
“...검사가?”
“비정석 파티잖니. 갑자기 순진한 척 할래?”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말도 안 돼!”
이곳에 이르기까지 자잘한 전투가 있었고, 거기서 마루는 완벽한 ‘검사’의 모습을 보여줬었다. 정체불문의 비정석 파티라지만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검사였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그러면서 여전히 머드 오크와 씨름 중인 탱커 호로로를 바라봤다. 상황이 뒤집혔음에도 섣불리 손을 뗄 수 없는 상황이라, 홀로 외로운 사투 중이었다.
라스달의 눈물이 머드 오크에게 안 통하는 건 아니지만, 효과가 한 급 떨어지는 면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시간이 흐를수록 호로로는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 놈, 펭귄 주둥이에 해독제 물고 있다는데, 내 부랄 두 짝 건다. 어때?”
아무것도 모르는 근접 딜러였다면? 열심히 머드 오크를 사냥하며 점차적으로 환각초에 취했을 것이고, 그 끝은 결국 깔끔한 뻑치기로 마무리됐을 터였다.
“1탱커 1근딜 3원딜이면, 모자란 환각초로도 아무 문제없이 잡았겠지만, 지금 상황이 그렇지가 않네?”
마루가 여유를 부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 모습은 마치 둘이서 잘 해보라는 것 같은 태도였다. 그러면서 따로 경고라도 하듯, 연신 검지로 검집을 두드려댔다.
[도망칠 생각 마라.]
쿠크몽이 입술을 짓씹으며 오크쪽으로 향했다. 일단 사냥은 마무리지을 생각인 듯 보였다.
“이런, 씨발!”
욕지거리와 함께 마력을 일으키는데,
스스스스스스...
그 모습에서 마루는 쿠크몽의 직업이 위장이 아님을 알았다. 진짜 마법사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단지, 일반적인 마법사와는 좀 달랐다.
‘흑마법사였나.’
주변의 수풀 사이로 그림자가 들썩였다.
‘늪지대로 온 이유가 있었네.’
음기 짙은 이 장소라면 흑마법의 위력도 배가 될 터, 여러모로 잘 짜인 무대였던 것이다.
‘저 놈 입장에선 재수가 없었네.’
설마하니 라스달의 눈물을 알아보는 이가 있을 줄이야. 감히 생각이나 했겠는가. 사실 마루도 초반부터 의심하며 관찰하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넘어갔을 부분이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상념에 잠시 빠져버린 사이, 쿠크몽이 움직였다.
“죽어!”
오크가 아닌 마루를 향해.
‘어째, 크게 한 방 준비한다 싶더라.’
전방으로 향한 건,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거리를 벌리고자 하는 의도이리라.
‘너무 빤하잖아.’
마법의 시전 시간이 길던 시점에서 이미 의심하고 있었다. 보기와는 달리 기습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긴장해야 할까?
흑마법사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여유가 늘어버렸다.
[셰이드 셰이크]
주변 수풀 속, 그늘들이 쭈욱 늘어지더니 마루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단숨에 마루의 그림자를 뒤덮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요란한 진동이 내부를 진탕시켰다.
“단숨에 죽여주마!”
저 앞으로 쿠크몽이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게 어찌나 얄밉던지, 마루는 더 지켜보기가 귀찮아져버렸다.
그래서 반전의 마침표를 찍어줬다.
[성호]
메달 하나를 꺼내 기본적인 신성 버프를 깔고,
[복음 양식]
거기에 메달 하나를 더 꺼내 입에 담은 뒤,
“나 여기에 신언을 읊노니.”
외쳤다.
“지금, 당장! 빛이 있으라.”
입안의 메달이 녹아내린다고 느낀 순간, 마루의 머리 위로 후광처럼 피어난 광채 하나.
주변 일대의 그림자가 밀려났다.
“허억!”
쿠크몽의 경악성이 들려오고, 창백하게 질린 안색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어떻...너...너...검사가...어떻게 성력을?”
마루가 어깨를 으쓱였다.
“순진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였네.”
“이런, 미친! 성직자라고? 설마, 성기사?”
흑마법사 최악의 상성이 바로 성직계열이었다.
“아니.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농도 짙은 성력이라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마루를 바라보는데, 압도적 스탯의 뻥튀기 효과니 뭐니, 굳이 설명을 해 주진 않았다.
그저 한 마디면 충분했다.
“너 족 됐어.”
히쭉 웃어 보인 마루가 훌쩍 거리를 좁히더니,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고는 그대로 내질렀다.
[검결지-변형]
“엿 먹어.”
푸욱!
피하려는 노력이 허무할 만치, 너무도 쉽게 꿰뚫고 들어오는 손가락에 쿠크몽은 숨통이 콱 하니 막히는 걸 느꼈다.
폐부를 찌르고 들어온 것이다.
“두 번 먹어.”
푸욱!
반대쪽 폐부마저 정확히 관통하고 나온 순간, 상태이상 알람과 함께 경직이 걸려버렸고, 거기서 마루가 손날을 세웠다.
[날치기]
한 호흡에 이뤄졌다 믿기 어려울 만큼, 무수히 많은 참격이 손끝에서 펼쳐지고, 연쇄 치명타가 터지면서 마법사의 낮은 체력 바를 단숨에 갈아먹었다.
‘빌어...머...글......’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걸 확인한 마루가 최후의 생존자를 바라봤다.
“후욱...후욱...훅...”
호로로는 이젠 완전히 정신을 차린 머드 오크와 육체적 대화를 나누느라 바빠 보였다. 그 뜨거운 힘겨루기가 제법 볼 만 했던지, 마루는 가까운 바위 위에 엉덩이를 걸친 채, 잠시간 무료로 숲트리트 파이트를 관람했다.
“크아아아~! 죽어엇-!”
일찍이 우위를 점했던 덕분인지, 가까스로 머드 오크를 제압하려는 찰나, 슬며시 다가간 마루가 슬쩍 엿을 먹였다.
푸욱!
깔끔한 막타로 오크를 정리한 뒤, 허망함에 너부러진 호로로를 내려다봤다. 교차하는 시선 속에서 모든 걸 놓은 눈빛이 보였다.
“살려줄까?”
그래서 슬쩍 물어보는데,
“조까.”
“알았어.”
바람직한 반응에 깔끔히 ‘거기’만 까줬다.
“크아아악!”
푸슥...
비참하고 잔인한 최후였다.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호로로를 뒤로 한 채, 이번 사냥의 전리품들을 챙겼다.
“짭짤하네. 경험치도 템도.”
흡족한 미소 속에, 남아있는 환각초의 양을 확인했다. 거의 다 꺼져가고 있는 게 보였다.
“두어 마리 정도는 더 잡을 수 있겠네.”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땅굴 속에서 새로운 머드 오크 한 마리가 기어 나오는 게 보였다. 두 눈이 풀린 게 약발이 제대로 돌고 있었다.
“안녕!”
마루가 활짝 웃으며 손님을 맞았다.
“안녕...”
그리고 떠나보냈다.
**
검귀에 대한 새로운 소문이 추가됐다.
[성기사라더라.]
[검귀 땜에 뻑치기들 빡쳤대.]
[뻑치기 역관광 풀코스 돈다면서?]
[못 다루는 검이 없다네.]
[손가락으로 검기도 쏜다며?]
등등, 마루는 나날이 귀지를 채워 넣는 이야깃거리 앞에 수시로 귀를 후벼야만 했다.
탈곡기 길드를 피하려다 시작된 비정석 파티였다.
파티 정체성이란 게 아무래도 직업 및 정체를 감추기 위한 목적으로 형성된 거다 보니, 지난 쿠크몽 파티와 같은 뻑치기 팀과 엮이는 일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이전이라면 조금만 의심가도 다른 파티로 넘어갔을 것이나, 빠른 성장을 위해 저들의 경험치에도 눈독을 들여 버린 탓일까?
본의 아닌 역관광이 시작되었다.
자연히 저들과의 마찰도 잦아졌고, 이로 인해 다양한 이야깃거리도 제공하면서 나날이 소문을 부풀리게 된 것이다.
그 때문일까?
“어째, 요즘 들어 나바가 늘었네.”
“벌레들이 너무 많다.”
“어우...”
꾸준한 관심은 인지도를 끌어올렸고, 필드 내 캐릭터 가면 점유율마저 조정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호로로가 압도적 1위지.”
“검색순위는 넘사벽이잖아.”
“18대 1은 레전드니까.”
“난 어제도 돌려봤다.”
“90탄은 영상 하나 잘 찍어서 제대로 노났네.”
마루는 사람들의 쑥덕거림에 귀지를 파다가 슬쩍 웃었다.
‘나도 노나긴 했지.’
그 덕분에 흥한 영상이다 보니, 90탄과 따로 만남을 취한 바 있었다.
[초상권 침해. 골드로 내 놔.]
[드...드리겠습니다.]
하는 짓이 얄미운 거지, 프로 의식은 확실한지 90탄은 순순히 그의 지분을 인정했다.
증명이야 어렵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따로 촬영하진 않았지만, 기본적인 플레이 녹화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유저 시점에서 찍히는 것이기에, 증명은 간단했다.
“화질은 구리지만.”
물론, 말처럼 몹쓸 정도는 아니었다. 일반 화질로써 눈요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90탄 입장에서는 새로운 관점에서 전장을 풀어내는 것이기에, 관련 영상 2탄도 준비할 수 있었다.
‘90열이 덕분에 골드 수급도 됐고.’
주머니가 빈곤하던 시점과 잘 맞물렸다.
‘기특한 놈!’
덕분에 통장 쪼갤 일은 없어보였다.
그가 장관장이라는 걸 알았다면 어땠을까? 차후에 이걸로 놀려보는 건 어떨지, 이를 생각하니 재차 웃음이 나왔다.
‘그나저나...슬슬 이 가면도 벗어야겠네.’
검색어 순위권에만 안 올랐을 뿐, 하위 필드 내에서는 충분한 유명세를 자랑하는 터라, 점차적으로 번거로움이 늘어나고 있었다.
범법 유저를 사냥하며 경험치를 뻥튀기 시킨 건 좋았지만, 그것도 정도껏 해야 할 일이었다.
“귀찮게 시비 터는 놈들이 너무 많네.”
그러면서 나바 가면을 벗었다.
가면을 새로 구입할 필요는 없었다. 뻑치기와의 마찰 중, 전리품으로 얻었던 물건에는 가면도 있었다.
아무래도 캐릭터가면이 유행이다 보니, 이미 그의 인벤토리에는 다양한 가면들이 구비되어 있었고, 얼마든지 새 신분을 위장할 수 있었다.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마루는 가면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하며,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레벨 : 78]
[힘 : 115+5(+25)] [지능 : 120(+35)]
[체력 : 118+2(+35)] [정신력 : 115+5(+35)]
[민첩 : 120(+35)]
[스탯 : 0]
이어진 계산속에서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정확하네.’
드디어 600스탯을 채운 것이다.
기본 스탯과 칭호 스탯이 더해지며 만들어진 스탯으로, 조금이라도 더 스탯을 채우기 위해 현실에서도 꾸준한 훈련을 아끼지 않았었다.
‘아공간이 개꿀이었지.’
무게 게이지 오버를 통한 육체 압박을 사용한 것인데, 지금 게임에 접속 중인 와중에도 아공간의 무게 게이지 오버로 신체를 단련 중이었다.
[수면신공!]
그가 붙인 명칭이었다.
과하게 할 경우 육신이 망가질 수 있기에, 딱 게이지 1만 넘겨서 적당한 부담감만 끌어내고 있었다.
“어후...두근두근하네.”
널뛰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황급히 게임을 종료했다.
“엔트라네!”
[정마루 - 수호자]
[각성등급 : C]
[컨디션 : 6]
[스킬 : 오염된 여의주] [#] [*] [@]
아직은 별 변화가 없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전에도 한숨 자고 난 뒤에 승급했었지.”
그런 기대감으로 애써 자리에 눕고 잠을 청했다. 콩닥대는 심장 때문에 VR기기의 수면 유도 시스템까지 활용하고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마루 - 수호자]
[각성등급 : B]
[컨디션 : 7]
[스킬 : 오염된 여의주] [#] [*] [@]
고대하던 승급이었다.
**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바로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김연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벌써 보름째라니.”
설마하니 얼음여제에게 두 장의 명함을 받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줄이야.
혜성 길드 특수 1팀!
대한민국 내에서 Top10에 꼽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팀의 스카웃 제안이건만, 이런 냉담한 반응이 나온다?
‘나 때문인가?’
그녀가 붙인 정보팀이 괜한 경계심을 높여서 이런 결과로 이어진 것 같았고,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다.
‘찾아가? 말아?’
갈등이 깊어갈 즈음,
우우우웅...
[정마루]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
새로이 깨어나던 날,
첫 계시를 받았다.
이를 쫓아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했고,
두 번째 계시를 받았다.
그렇게 ‘그’를 찾아 마주한 날,
세 번째 계시를 받았다.
마치 잠든 듯 바른 자세로 침대에 누운 그를, 마루를 바라볼 때, 이미 해야 할 일을 알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그에게 필요한 걸 전했다.
‘존재감을 감춰드렸으니, 한동안은 괜찮겠지.’
그렇게 짧은 만남을 끝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그림자를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그녀가 자리를 비웠다는 걸 몰랐다.
그 덕분에 레아는 교황청으로 복귀한 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기존의 일상과 다를 것 없는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 기다렸다.
“곧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거야.”
이미 마루의 주변으로 변화의 물결이 들이치고 있었다.
‘그 날을 대비해야겠지.’
굳은 결심 속에서 그녀의 입이 열렸다.
“레베카.”
“예.”
“한국으로 가 주겠니?”
그렇게 자신의 그림자를 내보냈다.
< #19. 성장. > 끝
ⓒ 주작(朱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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