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레벨? <3권 시작> >
PP에서 조합에 쓰인 스킬은 목록에서 사라진다.
어차피 상위 스킬을 만들었기에, 굳이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물론, 다른 조합식을 위해 다시 익혀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미 한 번 익혔던 스킬이기 때문일까?
숙련 작업이 한층 수월해지는 혜택이 있었다.
활력의 춤 스킬도 마찬가지였다.
PP내에선 이미 홀리십 스킬에 흡수되어 사라져버린 것인데, 딱 거기까지가 활력의 춤 역할이다 보니, 굳이 따로 스킬을 재등록하진 않았다.
그런 이유로 현재 PP에는 활력의 춤이 없었다.
때문에 활력의 춤이 아닌 홀리십이 발동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여기가 게임 속이었다면, 이상할 게 없지.’
하지만 현재 그가 머물고 있는 장소는 ‘현실’이었다.
던전!
완전한 현실이라 하긴 애매한 부분도 있었지만, 분명한 건 게임 속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왜?
‘활력의 춤이 아니라 변형 홀리십이 발동되는 건데?’
현재, 현실에 구현 중인 건 일반 홀리십과 활력의 춤이었다. 둘 중 하나가 발동되는 게 정상이건만, 조합 스킬이 발동된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잠시간 멍청하니 넋을 놓고 있으려니, 어느새 10분간의 휴식 시간이 끝난 듯, 다시금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틈틈이 몬스터들이 등장하며 달려들었지만, 단합된 특수 1팀의 저력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부족한 장비로도 전차처럼 들이받으며 나아갈 뿐이었다.
갑작스런 던전 승급이 당황스럽긴 하나, 이런 외곽 지역에선 그들을 감당할 만한 몬스터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순식간에 던전 입구의 안전지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곳도 진지 구축을 다시 해야겠네.”
김연희는 그리 말하며 투덜거렸다.
B급 던전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안전지대다 보니, 승급으로 인한 여파를 감당하긴 어려울 터였다.
던전의 수준을 다시 측정한 뒤, 그에 맞는 새로운 안전지대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하...여기 말고도 다른 던전 지대까지 전부 같은 상황일 텐데, 이래저래 골치 아프게 됐네.”
한숨이 전염처럼 번졌다.
“하아...”
“한동안 뺑이깨나 치겠네.”
“후...다른 특수팀 불러야지.”
“A급 던전은 우리 전담이잖아.”
“젠장!”
팀원들의 투덜거림만 봐도, 앞으로의 일정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런 떠들썩한 주변의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마루는 현재 자신에게 닥친 돌발현상을 파헤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활력의 춤이 아니라 변형 홀리십이라고?’
그 부분을 꾸준히 들추길 한참,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스킬 하나를 발동시켰다.
[입치]
눈치코치 계열의 조합 스킬 중 마지막으로 익힌 것으로써, 미각을 끌어올리는 미식계열 스킬이었다. 이를 통해서 독의 감별도 가능하기에, 약초 채집으로도 자주 쓰이고는 했다.
최근 막 익히기 시작한 탓에, 숙련도가 최하급이었다.
‘당연히 현실에선 구현할 수 없는 스킬인데...’
헌데, 이게 웬일?
‘돼? 된다고?’
슬며시 올라오는 혓바닥의 열기와 한층 예민해지는 혀끝의 감각이 그 증거였다.
‘독이라도 하나 물어봐야 확실하겠는데.’
당장 여기서는 그런 걸 찾기 어려운 만큼, 혀끝의 감각 변화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실험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명안]
시야가 밝아진다.
[궁외]
외눈에 시력증가.
궁수들이 사거리를 높이기 위해 마련된 스킬의 연계기로써, 눈 하나를 감아 시력을 상승시킨 뒤, 밝아진 시야로 조준점을 제대로 잡아내는 것이다.
스킬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인지 저 멀리 산등성이 너머, 흐릿해야 할 비행 몬스터 한 놈을 선명히 포착했다.
‘What the...’
하마터면 비명이 튀어나올 뻔 봤으나, 가까스로 이를 삼켜내며 주변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다른 비구현 스킬도 발동이 된다고?’
마루의 눈가에 옅은 경련이 일었다.
‘설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며, 던전의 풍경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좀 전과는 다른 의미로, 새롭고 또 색다르게 시야에 박혀드는 걸 느꼈다.
‘PP 그리고 던전!’
의심은 조금씩 확신으로 번져갔다.
**
좀 더 던전에 남아 이것저것 조사를 하고 싶었다.
“부상도 심하고, 등급도 안 맞으니. 밖에서 먼저 휴식을 취하도록. 긴급 소집에 응할 필요는 없으니까.”
팀장 이소희의 칼 커트에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던전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처럼 오우거와의 전투로 인한 후유증이 온 몸에 남아있었고, 거기에 더해 등급도 무려 2단계나 차이 나는 만큼, 그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실제 등급이야 어쨌든, 현재 그의 자격증은 C급 A형일 뿐이었고, 던전은 승급현상에 의해서 A급이 된 상태였다.
그로써는 비빌 건덕지가 없었다.
‘일단 확인한 건, 비구현 스킬이 발동된다는 거.’
거기에 추가로 한 가지 더,
‘인벤토리는 안 됐지.’
혹시, 가능하다면 회복약을 뽑아볼 생각으로 PP의 창고를 불러 본 것인데, 아쉽게도 거기까진 허락되지 않았다.
“아깝다. 거기까지 됐으면, 게임 장비도 불러오는 건데.”
그럴 경우 어마어마한 스탯 뻥튀기가 가능해진다.
“쩝...”
아쉬움에 입맛만 다셨다.
“그래도 일단 조커 한 장은 생겼네.”
현실에서도 던전 한정으로 능력치가 상승한다는 점이다.
‘스탯이야 장비가 없으니 다를 게 없다지만, 다양한 스킬 조합을 통한 전력 상승만으로도 충분히 땡큐지.’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아...민망하네.’
어느새 주차장에 이른 것인데, 한 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명품차들 사이로 남루한 바이크가 한 대 보였다.
‘아 놔, 이런 C...’
구석자리에 잘 숨겨놨건만, 기이할 만치 눈에 띄었다.
몇몇 헌터들의 시선이 등 뒤로 따라붙는 게 느껴졌고, 불쾌한 쑥덕거림도 들려왔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석양도 왠지 따갑게 느껴졌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며 오기가 솟았다.
‘남루한 거지, 비루한 건 아니잖아!’
그도 일단 혜성길드 특수 1팀이 아니던가.
어깨를 폈고 목도 빳빳이 세웠다.
부앙...부아아앙...
그의 마음을 읽은 듯, 바이크가 혼신의 힘을 다해 울음성을 토해냈다.
‘굿 보이!’
가볍게 바이크를 토닥여준 뒤, 액셀을 당겼다.
빠아아아아앙...
그렇게 CT-헌터는 석양을 진 채 멀어져갔다.
**
두 번째 던전 승급 현상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대격변인가?]
[대한민국에 발생하는 기현상의 정체는?]
[다시금 한국을 찾는 헌터들!]
[랭커들도 들썩?]
언론이 들끓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해외여행객 급증?]
[안전국가, 등급 하락?]
[정부의 대처는?]
[이번에도 혜성길드의 관할 던전!]
[왜 혜성인가?]
사건 발생과 동시에 이미 기사는 올라가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요 근래 이렇다 할 화젯거리가 없어 골머리를 앓던 찰나, 옳다구나 싶은 심경으로 벌떼처럼 달려든 것이다.
각종 포털 사이트 역시 들썩였다.
-또야? 또 던전 승급이야?
-왜 우리나라만 이러냐?
-누가 던전에 독 풀었누?
-이번에는 정말 해외로 떠야겠다.
-이민 간다!
-랭커들 소식 들음?
-또 온다네.
-이반나 U턴!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
-전번에 왔던 각설이 또 왔누?
-성녀 소식은 없냐?
핸드폰으로 이런 반응들을 살피던 이소희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폰을 내려놨다. 옆으로 김연희 역시 비슷하게 한숨을 쉬다가 입을 열었다.
“참 나, 일 터진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상황이 맞물렸어.”
“어휴~! 반응들 참, 빠르기도 하지.”
던전 승급에 지대 전체에 비상을 걸고, 긴급소집까지 이뤘지만, 결국 아무런 위험이 없단 결론이 나왔다.
그 덕분에 혜성 특수 1팀도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그 아줌씨 또 온다네.”
“러시아 입장에선 이반나가 최선일 테지.”
이반나는 오랜 유학 생활만이 아니라, 한 때는 한국에서 헌터로 활동하던 경력까지 있었다.
이래저래 이쪽에 인연이 널려있는 것이다.
“골 아프게 됐네.”
당장 그들도 이반나의 인연 중 하나가 아니던가.
“혹시 모르니까. 신입 잘 숨겨둬.”
“그렇잖아도 이번 일에서는 뺄 생각이야. 마침 등급도 부족해서 명분도 딱 맞더라고.”
A등급 던전에 C급 헌터는 참여할 수 없었다.
“그 아줌씨 생각하면, 아예 휴가를 줘버려야지.”
그녀처럼 아우라를 보는 능력도 없건만, 귀신같은 촉으로 비슷한 효능을 내는 게 이반나의 육감이었다.
신체계열의 랭커들 중에서도 특히 손꼽히는 감각을 지닌 탓에, 한편에서는 짐승의 피가 섞였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그나저나, 오우거를 잡는 C급이라...”
“깜짝 놀랐다니까. 피어를 들었을 땐, 여기가 내 묏자리구나 싶었는데, 혼자서 맨투맨으로 까버리잖아.”
시력이 온전치 않아, 그 전투를 제대로 관람하지 못했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자기 말로는, 어린놈인데다가. 어디서 부상깨나 입고 와서 상태가 메롱했다는데, 내 느낌상 반만 진실이고, 나머지 반은 거짓이이라고 봐.”
전투가 끝난 이후로도 시력은 흐려 제대로 보긴 어려웠다.
그 때문에 따로 격전지를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승급현상으로 인해 당장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 상황으로 봤을 때, 벌떼처럼 몰려든 몬스터들에 의해 이미 해체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결국, 신입의 이야기를 확인하긴 어려웠다.
“진실하고 거짓, 나눠봐.”
“일단, 어린놈이라는 건 진실일 거라고 봐. 나중에 시야 좀 회복하고 봤는데, 그 덩치가 성체는 아니었어.”
흐릿했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확인할 수 있었다.
“부상으로 상태가 메롱했다는 건, 거짓!”
등장 전, 분명히 피어를 들었다.
“어린놈이 부상까지 입고 피어를 토했다고? 한 번까진 이해하는데, 전투 시작 전에만 이미 두 번이고, 이후로도 몇 차례 더 피어를 쐈는데, 여기서 구라라는 느낌이 뽝 왔지.”
이소희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서 결론은?”
“C급 A형이라고? 그거 구라야.”
추가적으로 한 가지 더,
“총기류 각성? 그것도 구라고.”
김연희가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딴엔 밑밥 좀 깐다고, 틈틈이 총도 쏘고 그러던데, 신입이 들고 있던 총기로 오우거를 잡는다고? 왜? 비비탄으로 전차를 전복시킨다고 하지?”
산탄권 스킬을 착각한 것이지만, 그래도 맥락은 제대로 짚고 있었다.
“웃기긴 했는데, 그래도 일단 속아줬어.”
신입, 마루가 숨기고자 하는 듯싶어, 일단 넘어가 준 것인데,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반나 이 아줌씨 생각하니까. 속아주길 잘 한 것 같네. 괜히 자격증 심사 다시하자고 우겼다가 승급이라도 하면, 결국 출근시켜야 하잖아. 상황 진정될 때까지는 무조건 C급 A형으로 고정시켜 놔야지.”
일찌감치 한국행을 택한 이반나를 떠올려 봤을 때, 꼭꼭 숨겨놓을 필요가 있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이소희가 물었다.
“네 생각은 어때?”
“뭐가?”
“신입 등급.”
그 시점에서 김연희는 잠시 침묵했다. 이미 생각하는 바가 있음에도, 쉬이 입 밖에 내기가 어려웠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결국 토해내야 했다.
“...A급!”
**
마루는 집으로 귀가 후, 활력의 춤으로 피로를 씻고 샤워까지 마친 뒤, 하루의 마무리를 위해 PP에 접속했다.
그리고 또 한 차례 놀라야만 했다.
{레벨 : 81}
{힘 : 126+5(+25)} {지능 : 120(+35)}
{체력 : 120+2(+35)} {정신력 : 117+5(+35)}
{민첩 : 120(+35)}
{스탯 : 5}
눈을 비비고 또 비볐다.
‘81레벨이라고?’
그럼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레벨이 올랐어?’
앞서 접속했을 때까지만 해도 80레벨이었다.
‘게다가 스탯도 올랐다고?’
힘과 체력 정신력에 각기 1, 2, 2씩 더해진 것이다. 게다가 레벨 상승으로 인한 추가 스탯까지? 어찌나 놀랐던지 손이 덜덜 떨렸다.
‘아니. 스탯이야 그럴 수 있지. 이건 이상한 게 아니니까.’
이전에도 게이트나 마수지대 사냥을 통해 스탯 상승을 경험한 바 있지 않던가.
하지만 레벨 상승은 처음이었다.
이는 게이트나 마수지대에 투입됐을 때 역시 마찬가지로써, 게임 속 성장 게이지도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그게 갑자기 달라졌다?
‘너무 놀라서 대가리가 안 돌아가네.’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왜? 어떻게? 어째서?’
하나밖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던전!’
이어지는 의문 하나.
‘전에는 왜 안 올랐지?’
블록 길드와 합을 맞췄을 때를 떠올렸다.
계약을 맺긴 했지만 자유 용병으로 싸인을 했고, 한동안 육성에 빠져있느라 이후 일정도 없었기에, 당시의 기억만으로 상황을 살펴야 했다.
열심히 머리를 굴린 결과는 하나였다.
‘잡몹이라 그런가?’
블록 길드와 함께했던 던전은 D급 던전이었고, 사냥도 가벼운 몸 풀기 수준으로 돌았을 뿐이었다.
그 상황을 PP의 활동이라 가정하며 계산해 봐도, 겨우 그 정도 사냥으로는 레벨에 영향을 주긴 어렵다 결론이 나왔다.
‘혹시, 그때도 성장 경험치에 변화가 있었을까?’
일일이 확인하는 게 아니다 보니, 당시에는 모르고 넘어갔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선, 미미하게라도 성장 게이지가 올랐을지도 몰랐다.
직접적으로 레벨이 오른 이유를 찾았다.
[오우거!]
무려 레이드 클래스의 상위종이었다.
PP를 기준으로 한다 치더라도, 지금 레벨에는 만날 수 없는 몬스터가 아니던가.
“2차 전직은 해야 볼 수 있지.”
그마저도 바로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오우거는 2차 전직 이후에도 필드를 거치며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놈이었다.
당연히 그만큼 받는 경험치도 많을 것이다.
“꿀꺽...”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PP에선 2차 전직 전까지는 상위종을 볼 수 없지만, 현실의 던전이라면?’
만약, 이 경험치를 레벨로 받는다면?
‘...꿀꺽!’
목구멍이 꿀렁거렸다.
< #1. 레벨? <3권 시작> > 끝
ⓒ 주작(朱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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