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마트료시카. >
구정국은 웃으며 제안했다.
“그냥 말로만 하면 잘 믿기지 않을 테니, 가벼운 성의를 먼저 보이도록 하죠.”
그러면서 꺼내든 카드가 제법 놀라웠다.
“저희가 관리중인 던전의 이용권입니다.”
몇몇 제한이 걸려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매력적인 미끼였고, 마루는 결국 낚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찾아온 던전이었다.
‘C급 던전인 게 아쉽네.’
이용권에 걸린 제한 중 하나가 등급 제한이었다.
‘하긴, B급까지 바라는 건 너무했나.’
스스로가 생각해도 양심이 없단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그의 등급 자체가 C급이지 않던가. 구정국도 그 이상은 허락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했다.
던전 경험치는 레벨과 스탯으로 나눠서 분배되다 보니, 한동안 찾을 생각이 없었지만, 그래도 공짜 이용권이 아니던가.
“기간제만 아니면, 나중에 쓰는 건데.”
이 역시 이용권에 걸린 제한 중 하나였다.
일주일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게 던전 이용권이라는 걸 상기한다면, 체험용으로는 차고 넘치는 시간이기도 했다.
게다가 광호길드의 하급 던전의 경우, 몇몇 특수 구역을 제외하고 전부 이용할 수 있었다.
‘어째, 대우가 상당히 과한 것 같긴 하지만.’
공짜라는 걸 상기하며 부담감은 뒤로했다.
따로 조치를 취해 놓은 것인지, 이용권을 앞세우니 짧은 절차만으로도 던전에 들어설 수 있었다.
“안쪽에 안내원이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체크 끝났습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익숙한 감각과 함께 던전의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잠시 잠깐 초롱이를 불러볼까 하는 마음이 뒤따르긴 했다.
‘애기 놀랠라.’
던전의 공기에 경기를 일으키던 걸 상기하며,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 있는 장비들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안내원은 그리 말하며 창고를 오픈했다.
‘서비스가 끝내주네.’
이 역시 구정국이 준비한 선물로써, 이용권에 상당한 권한이 부여되어 있던 것이다.
장비창고의 내용물도 훌륭했다.
총기와 특수탄부터 시작해서, 보호구 및 각종 보조 장비까지, 그 퀄리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오늘 하루는 자신의 장비를 사용할 생각이 없던 터라, 마음껏 창고를 들쑤셨다.
‘공짜니까!’
창고에서 가장 비싼 총기를 선택했다.
“기어이 브레스-5를 사용해 보네.”
과거, 블록 길드를 통해 던전 첫 경험을 할 때, 짧게 접촉만 해 봤던 물건이었다.
B급 특수탄도 사용할 수 있는 물건으로써, C급 총기류 각성자라는 기준에서 봤을 땐, 절묘하게 오버클럭의 경계에 끼어있는 물건이었다.
‘내 등급에는 이게 딱이긴 하지.’
실소를 하며 장비 점검을 마쳤다.
“출발하시죠.”
마루의 이야기에 대기 중이던 던전 가드들이 움직였다.
이곳 던전은 완전한 정리가 끝난 뒤, 본격적인 관광사업까지 펼쳐지는 공간이었다.
그 때문에 내부 관리에 고위 헌터들이 자리하기 보단, 던전 등급에 딱 맞는 수준의 경계조 헌터들이 가드를 담당하고 있었다.
마루의 안내원 역시 가드의 일원이었다.
부르르릉...
도로를 잘 닦아놓은 까닭인지, 차량 이동 중에도 별다른 굴곡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완벽하게 정비가 된 던전이구나.’
새삼스레 이용권을 잘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일주일이지만 그 기간을 최대한 활용한다면, 던전에 대한 경험도 한층 쌓일 것이고, 시야나 이해도 역시 넓어질 터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도 차량은 이동을 거듭했는데, 정비가 끝난 던전이다 보니 외곽이 아닌, 저 깊은 안쪽에서도 사냥을 할 수 있었다.
외곽에도 몬스터가 살아가지만, 철저히 정해진 구역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통제 중이고 수도 제한되며, 수준 자체도 높지 않다 보니, 그들의 사냥감으로는 여러모로 부족했다.
그 때문에 안쪽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다.
‘던전 중심부는 이번이 처음인가.’
이용권의 가치를 재차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
던전 승급은 여태껏 단 두 번만 발생했다. 희귀할 만큼 적은 횟수의 기현상이건만, 오직 혜성 길드의 던전 지대에서만 사건이 터졌다.
그 때문에 혜성에서 모종의 실험을 하다 사단이 난 게 아니냐는 의심도 돌고 있었다.
각국에서 모여든 헌터들이 유독 자리를 뜨지 않는 건, 바로 이런 부분에 대한 감시도 겸하는 거였다.
그 때문에 혜성 길드는 행동마다 적잖은 제약이 걸릴 수밖에 없었는데, 구정국의 뒷공작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도, 그런 요소가 일부 작용한 까닭이었다.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너무 많다보니, 어쩔 수 없는 공백이 생기는 것이다.
“미치겠네. 뭔 날파리들이 이렇게 많은 거야.”
“이면 놈들 시선이 특히 거슬리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일으킨 걸까?”
“비밀 실험실이 있다던데, 사실일까?”
당장에 혜성 길드 내부에서도 이런 이야기들이 나올 정도였다. 안팎으로 입단속을 해 가며 관리하려니 진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아...이면 놈들 찝찝해서 못 살겠네.”
“이러다 정말 던전 승급 또 발생하는 거 아니야?”
“설마, 또 우리일까?”
“재수 없는 소리 마!”
“발생하더라도 다른 길드면 좋겠다.”
“기왕이면...광호 길드가 딱인데.”
혜성 길드 누군가의 바람이 먹힌 것일까?
[비상! 비상!]
경보가 울리고,
[측정 이상 발생.]
무전이 전파됐다.
[던정 승급. 세 번째 현상 확인.]
혜성 길드 주변에 진을 치고 있던 수많은 헌터들이 일제히 귀를 기울였다.
[광호 길드 던전 지대.]
뒤이어 목적지까지 전파된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헌터들이 우르르 일어났고, 본격적인 대이동이 시작됐다.
**
던전 중심부까지 들어오기는 했지만, 결국 C급 던전일 뿐이었다.
‘가뿐하네.’
마루는 총질 한 번에 한 마리씩 처리하며, 거침없는 저격 실력을 보여줬다.
이번 사냥에선 본연의 능력 없이, 장비의 순수 능력치에만 의존하기로 결정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역시, 브레스-5!’
네임드 넘버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넘버인 만큼, 격이 다르다는 이야기가 과언이 아니었다.
기본 C급 특수탄에 개체 변화에 맞춰 B급 특수탄을 교체해가며 장전하는데, 재미있는 건 교체 속도였다.
차각. 탕!
순식간에 교체 사격이 이뤄졌다.
이는 브레스-5의 특수한 설계 때문이었는데, 브레스-5는 탄창 2개를 동시에 꼽을 수 있게 제작되어 있었다.
그렇게 각 탄창에 다른 종류의 탄환을 꽂아서, 상황에 따라 다른 탄환을 발사할 수 있는 조치가 취해져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교체 사격의 텀이 거의 없었다.
이미 B급을 이뤘고, 현장 능력은 거기서도 한 등급 이상 나아간 까닭일까?
“미쳤네!”
“쩐다!”
마루가 보여주는 실력은 지켜보는 가드들로 하여금 전율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현재 그들은 팀이라기보다는 지원의 역할로써 마루를 보조하는 만큼, 저격 포인트 주변만 호위하는 상태였고, 덕분에 더더욱 상세히 그의 실력을 지켜볼 수 있었다.
“백발백중이라니.”
“정확도 계열 스킬일까?”
“상황 판단도 지리네. 오버클럭 한계치를 정확히 알고 있어.”
“몬스터 도감을 얼마나 꿰고 있는 거야?”
가드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구정국!
그의 지시사항을 상기했다.
[최대한 잘 살펴봐라.]
이용권은 순수한 의미로 건넨 게 아니었다.
현재 마루 주변을 호위하는 이들의 경우, 하나같이 감시의 역할로써 마루를 관찰 중이었는데,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파악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냥반이 보낸 이유가 있네.’
‘촬영 잘 해!’
개중에는 비싼 던전용 촬영 장비를 착용한 가드까지 있었는데, 소형 카메라인 탓에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던전용 무전기와 마찬가지로 제작 자체가 어려운 물품이다 보니, 그 크기가 작아질수록 가격도 어마어마해지는 물건이었다.
사실, 이 부분 때문에 마루가 총기에 의존하는 것이기도 했다.
저들은 발각되지 않았다 여기지만, 이미 그들의 의도를 눈치 채고 있었고, 그 때문에 순수 총기 능력만으로 사냥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는 저격 능력을 보여주는 이유는 간단했다.
스탯!
더 멀리보고 더 정확히 살피며, 한층 정밀하게 계산할 수 있게 된 까닭에, 저격의 퀄리티 역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차각, 탕! 차각...타앙...
순조로운 사냥이었다.
**
맨 처음 이상을 알아챈 건, 차량 보조석을 지키던 통신병이었다.
[치직...직...즈즉...]
갑자기 발생한 잡음에 귀를 기울였다.
드물지만 간간히 발생하는 부분이다 보니, 초반에는 큰 이상을 느끼지 않았다.
“어후, 또 언놈이 안테나 건드렸나 보네.”
군데군데 박아 놓은 중계기를 지나던 몬스터가 칠 경우, 이런 잡음이 발생하는 것이다. 깊이 잘 묻어놨음에도 불구하고, 간간히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는 했다.
[쯕...쯔즈......]
하지만 그 시간이 길어지고, 오래지 않아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게 될 즈음, 묘한 불안감이 피어나며 주변을 살피게 만들었다.
대개 하나의 통신기가 장기적인 이상을 일으킬 시, 다른 루트를 통해 무전의 기본 알람이 전달되게 조치를 취해놨기 때문이다.
불길한 예감에 차량 후미에 담아둔 물건을 꺼내들었다. 최근 발생하는 이상사태로 인해, 규모가 있는 길드라면 필히 준비시키는 물건이었다.
측정기!
이를 꺼내고 소형 발전기를 돌리는 모습에, 함께 대기 중이던 운전병이 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
통신병이 입술을 짓씹으며 답했다.
“무전이 안 돼. 기본 신호도 끊겼고.”
“그게 왜? 몬스터가 밟은 거 아녀?”
“중계기가 한 둘이냐. 어떻게든 돼야 하는데도 안 돼.”
그 시점에서 운전병은 측정기로 시선을 돌렸다. 짐작 가는 게 있는 까닭이었다.
“장거리 통신장비에 이상이 발생하는 경우는 하나 뿐이야.”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단어가 떠올랐다.
던전 승급!
기껏해야 두 번이지만, 그마저도 집요하게 파헤친 덕분에 적잖은 소득이 있었다.
그렇게 알아낸 정보 중 하나라면, 외곽지대라면 모를까. 이런 중심지대는 통신장비가 먹통이 된다는 점이었다.
이유가 실로 놀라웠다.
[지형변화!]
생태계의 변화만 발생하는 저 외곽과 달리, 중심부는 전체적인 지형에도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잠시 후, 측정기에 불이 들어오고, 지켜보던 둘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됐다.
**
다행이라면 장거리 통신과 달리, 단거리 무전은 잡음이 일부 끼더라도 무리 없이 작동 됐고, 덕분에 마루 일행은 빠르게 복귀 루트를 탈 수 있었다.
쿠구구궁...
차량에 탑승하고 이동을 시작했을 즈음, 거대한 땅울림과 함께 승차감이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간 조사를 통해 중심부의 변화에 대해서도 알게 됐지만, 이처럼 직접적으로 경험해 본 적은 없기 때문인지, 일행은 하나같이 두려운 마음으로 운전병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밟아!”
“으아아앗!”
“아슬, 아스라닷!”
“제로의 영역!”
가드들이 반쯤 정신줄을 놓은 채, 열심히 그를 응원했다.
그 와중에 마루의 시선이 차량 밖, 중심지 주변부를 쭈욱 훑었다.
놀이기구라도 탄 듯 강대한 지진이 발생했지만, 실제로 지형에 큰 변화가 발생하진 않았다. 곳곳에 땅거죽이 들썩이는 현상이 보이긴 해도, 지도가 달라질 만큼 거대한 변화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땅울림은 무엇일까?
‘지하...’
마루는 발밑을 내려다보며 정보를 떠올렸다.
대외적으로 언급되진 않았지만, 현재까지 조사된 바로는 중심지에 새로운 ‘길’이 열리고, 이는 지하로 연결된다는 정보였다.
말인 즉, 저 지면 아래 새로운 생태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아는 이들 사이에서 떠도는 명칭이 떠올랐다.
‘던전 속의 던전!’
발밑으로 던전이 형성되고 있었다.
< #15. 마트료시카. > 끝
ⓒ 주작(朱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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