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 #1. 왜아놔?
호위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도움을 주고자 나설 생각이었다. 그 타이밍에 날아든 문자 한 통이 발목을 붙잡았다.
[대기]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몸을 숨겼다. 이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마수지대에서 마루가 지닌 본연의 능력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정면 대결을 염두에 둔다면, 그녀도 자신할 수 없는 실력자이니 만큼, 돌발 변수를 염두에 두며 주변 경계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그리고 발생한 상황에 깜짝 놀라야만 했다.
‘결계석?’
설마, 단 한 방에 불청객들을 휘어잡을 줄이야.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거기에는 불청객의 방심이 결정적 역할을 했겠지만, 그 이상으로 놀라운 설계 역시 훌륭했다.
‘전부 의도한 거였어.’
포위망을 갖추고 좁혀오는 과정까지, 수다를 떨며 저들이 원하는 구도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이 함정이었다.
‘사각 후방 결계석!’
일회용이며 뒤통수를 보였을 때만 발동되는 등, 이런저런 제약이 붙어 가격은 싼 물건이지만, 그래도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단지, 여기서 의문이라면?
‘저건 몬스터 전용일 텐데.’
무릎을 꿇고 눈높이 교육 중인 불청객들을 봤을 때, 일종의 불법개조 버전임을 알 수 있었다.
**
주변을 경계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뒤통수를 맞아버렸고, 발탄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만 했다.
‘경력깨나 있는 놈이니까. 좀 더 경계했어야 했는데.’
사실, 그들 팀원들의 전력을 생각한다면, 가벼운 긴장감 수준이면 충분하긴 했다.
‘C급 총기류 각성자 따위한테.’
제대로 한 방 먹었다는 생각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차피 그 수준에서 구할 수 있는 결계석이야 뻔하지.’
과연, 예상이 틀린 건 아닌 모양인지, 포스를 끌어올리자 조금씩 몸이 들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A급에도 한 발 걸친 실력자답게, 결계석을 깨부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타앙!
그 순간 머리가 꺾였다.
“아니. 빡대가리니. 내가 가만히 내버려 둘 거라고 생각한 거야?”
마루가 그리 말하며 총구를 흔들었다.
“크흡...”
발탄이 신음성을 흘리며 뒤로 넘어갔다. 제대로 한 발 먹었건만, 다행히도 머리에 환기구멍이 생기는 일은 없었다.
이미 포스를 통해 머리를 보호 중이었던 탓이다. 그럼에도 핏물이 줄줄 흘렀다. 물론,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어떻게 알아챈 거지?’
은밀하게 기운을 끌어 올리며, 점차적으로 수위를 높여가는 중이었다. 기껏해야 C급 총기류 각성자가 감지할만한 운용이 아닌 것이다.
‘A급 정도 되면 모를까.’
놀라는 그의 얼굴이 재미있다는 듯, 마루가 총구를 흔들면서 말했다.
“눈칫밥만 15년이야. 딱 봐도 척이다.”
물론, 오감의 도움이 큰 것도 사실이지만, 원래 이렇게 말해야 심적 타격이 더 크게 들어가는 법이었다.
“까불었으니까.”
그 말과 함께 마루는 재차 방아쇠를 당겼다.
타탕!
“크아아악!”
양 다리에 한 발씩 꽂아줬다. 이번엔 포스를 둘러도 막을 수 없었다.
“너만 스킬 있니? 나도 있어. 다음에는 이걸로 대가리를 뚫어버릴 거야. 그러니까 까불지 마렴.”
그리고 이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해서, 이리저리 기회만 노리던 이들이 일제히 숨을 죽이게 만들었다.
일단, 발탄은 그들의 팀장이 아니던가. 머리가 당했다는 부분이 특히 큰 압박감으로 다가오며, 나머지 그레이 셰이드들을 조여 왔다.
**
구정국은 바람도 쐬고 담배도 필 겸 해서, 잠시간의 휴식시간을 이용해 회사 옥상으로 올라왔다.
이내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길게 뽑아내니, 숨 막히는 일정이 환기되듯, 가슴이 뻥 하니 뚫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한줌 여유를 즐기며 떨어지는 석양을 보고 있노라니, 업무와는 무관한 일들이 머릿속을 어지러이 스쳐갔다.
개중 유독 관심도가 높은 게 수면위로 올라오며, 그의 사고를 집중시켰다.
‘그레이 셰이드.’
흥미로운 일이었다.
‘설마, 그쪽에서 먼저 접근할 줄이야.’
이유도 재미있었다.
“한국 진출을 노린다니. 제 놈들 구역도 감당 못하는 것들이 욕심은 많아서는. 큭...”
짐작건대 승급현상 때문이리라.
‘이래서 소문이 무서워.’
최근, 이 바닥에 떠도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던전을 승급시키는 기물이 있다더라.]
그게 한국에 있고, 그 때문에 이 나라에서만 다섯 번의 승급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가정일 뿐이지만, 만약 그 이야기가 사실이고, 정말로 기물을 손에 쥘 수 있다면, 어지간한 길드도 단숨에 두어 단계 이상 도약하는 게 가능할 터였다.
그저 상상일 뿐이지만, 광호 수준의 길드도 거기에 포함됐다.
세계적인 진짜배기 탑 클래스 길드 역시 한 단계 이상 뛰어오르는 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뒤를 봐달라며 접근을 해 온 것인데, 왜 하필 광호를 찾은 것인지도 모르지는 않았다.
‘나 때문이겠지.’
그로 인해, 광호가 이면의 여러 단체들에겐 제법 긍정적인 이미지를 지닌 까닭이었다. 당연히 불법적인 의미였기에, 대외적인 관점에서 봤을 땐,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다.
‘우리도 미국 시장을 생각하면, 다리가 많으면 좋지.’
먼저 손을 내미는데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제법 괜찮게 이야기를 끝낸 뒤, 기분 좋게 악수를 나누던 시점이었을 것이다.
[마침, 저희가 공통적으로 얽혀있는 문제가 하나 있더군요.]
그러더니 인연의 증표로써, 이를 해결하는 걸 서비스 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정마루.’
그 공통의 문제를 떠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깔 순 있어도, 네가 깔 순 없는 거야.’
어느새 필터까지 빨아버린 꽁초를 던지며 휙 하니 발길을 돌렸다.
다시 업무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김연희는 황당한 얼굴로 굴비처럼 엮여있는 문제아들을 바라봤다. 하나같이 몸뚱이에 총알자국을 박아놓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이 많은 숫자를, 혼자 잡았다고?’
새삼스레 마루라는 사내에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작년에 있었던 오우거 사냥을 통해, 그가 최소 B급이며 어쩌면 A급일 가능성도 열어놓고 있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만한 수를 홀로 잡는 건 이야기가 또 달랐다.
특히, 남다른 눈으로 관찰할 수 있기에,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B~C급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조합이었는데, 그 숫자가 무려 20명이나 됐다. 게다가 몇몇은 A급에 한 발씩 걸친 걸로 보였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마루의 이야기에 김연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광호인가요?”
“일단, 아니라고는 하는데. 촉은 그쪽으로 기우네요. 관련한 조사는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맡겨주십시오.”
김연희는 아주 제대로 파헤칠 생각이었다. 아직 괜찮을 거라 판단했던 날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민망함에 거센 채찍질을 할 각오가 섰다.
이걸 빌미로 광호 측에도 한 소리 할 수 있을 터였다.
‘저 놈들이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달렸지만.’
그레이 셰이드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매섭게 빛을 발했다.
“고생하십시오.”
그리 말하며 발길을 돌리는 마루의 모습에 김연희가 급히 물었다.
“가드가 함께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괜찮습니다.”
이전과 같은 대답에 김연희는 묘한 아쉬움을 느꼈다. 마루의 대답이나 태도에서 묘한 거리감이나 경계심을 읽은 까닭이었다.
첫 만남에서 감시자들로 인해 적잖은 점수를 깎아먹은 탓인지, 그녀에 대한 신뢰도가 높지 않다는 걸 느꼈다.
‘이래서 사람은 첫 이미지가 중요해.’
그래도 이소희의 인상은 나쁘지 않은 듯해서 다행이었다. 짐작건대 정상급 헌터가 하위 헌터에게 과감히 머리를 숙여보이던 태도 덕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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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셰이드의 처리를 놓고 적잖은 갈등을 했다.
‘죽여? 말어?’
마루가 내린 선택은 결국 길드 호출이었다. 놀랍게도 김연희가 직접 차량을 끌고 달려왔고, 덕분에 맘 놓고 문제아들을 넘겨줄 수 있었다.
무려 20명이나 되는 탓에, 제대로 된 실력자가 아니고서야 선뜻 넘기기 애매했던 것이다.
‘점혈을 해 놓긴 했지만.’
2차 전직 후 새롭게 조합해 낸 스킬로써, 무협지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바로 그 스킬이었다.
‘아직 현실 숙련도가 낮아서, 얼마나 갈지 모르겠네.’
그 때문에 김연희의 등장이 반가운 것이기도 했다.
굳이 저들을 살려둔 이유라면?
‘날 노리고 온 거니까.’
행선지가 너무 빤했다.
‘어쩔 수 없지.’
만약, 저들을 처리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내가 잡은 걸 뻔히 아니까. 그레이 셰이드 본체가 다이렉트로 날아왔으려나.’
제아무리 아시아 방면엔 영향력이 없다지만, 그래도 작정하고 움직이면 충분한 입김을 넣을 수 있을 터였다.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건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저들의 목숨 값으로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동시에 우위를 점할 명분도 취하는 것이다.
‘게다가 한둘도 아니고, 무려 스물이니까.’
직접 처리하는 건 아무래도 부담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이유로 길드를 통하기로 한 것이다.
“그나저나...앞으로 피곤해지겠네.”
상황이야 어찌됐건 그는 혼자서 20명이나 되는 그레이 셰이드의 문제아들을 사로잡았고, 이는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길드도 그의 요청에 의해 나름대로 숨기려 노력하겠지만, 결국 드러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나마 다행이라 한다면, 정면대결이 아니라 뒤통수를 쳐서 잡았다는 점이었다. 실력이 부각되진 않을 거란 점이었다.
“너무 골 아프게 굴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한숨을 푸욱 내쉬는 찰나, 주머니가 떨었다.
우웅...
핸드폰 진동음에 열어서 확인하니,
[왜아놔?]
초롱이의 문자였다.
이제 막 그 조막만한 손으로 적응하는 중이다 보니, 이렇게 오타가 자주 발생하고는 했다.
왜 안 오냐는 문자에, 가는 길이라 답장하며 후다닥 달려갔다.
‘밥시간이 지나버렸네.’
그래도 손에 쥔 두툼한 투 플러스 특급 한우라면, 충분히 달랠 수 있을 터였다.
**
흥미로운 소식이었다.
“호...그레이 셰이드가 철수한다고요?”
제퍼드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바다 건너에서 활약하는 문제아 집단이다 보니, 그저 이름만 아는 정도였는데, 그래도 일단 머리에 담아둔 집단인 만큼, 그들 소식에 눈을 빛낼 수밖에 없었다.
“예. 아무래도 광호와 손을 잡고 이쪽에 자리 좀 잡아보려 했던 것 같은데, 혜성에 찍혀서 커트 당한 모양입니다.”
카일리의 대답에 제퍼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물었다.
“광호와 혜성이라...둘은 라이벌 관계였죠?”
“앙숙이라고 해도 될 겁니다.”
재미있다는 듯 관련한 내용들을 쭈욱 읽어나갔다.
“겨우 C급 헌터 한명 때문에 이런 상황이 발생하다니. 이거 참 재밌는 사람이네요. 그러고 보니, 최근에 화제가 됐던 건가드 영상도 이 분 거였죠?”
“예. 화제성 부분은 따로 작업자의 손길이 느껴지지만, 그래도 영상은 진짜입니다.”
“보통 솜씨가 아니던데, 확실히 재밌네요.”
그러던 중, 돌연 화제가 전환됐다.
“헌데, 그건 어떻게 됐나요? 아이언슈트.”
“...죄송합니다.”
“이쪽에서 맺은 인연도 총동원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실망이네요.”
“죄송합니다.”
연달아 고개를 숙여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북한산에 깔려있는 ‘마기’가 생각 이상으로 짙은 탓이었는데, 그로 인해 추적 및 탐지 능력자들을 동원하고도,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낼 수가 없던 것이다.
“하긴, 자그마한 나라의 마굴 치고 퀄리티는 상당히 높았으니, 아무래도 쉽진 않았겠네요.”
말은 저리 이해한단 분위기였지만, 결코 방심해선 안 된다. 등허리를 쭈뼛 서게 만드는 이 감각은 거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퍼드는 물을 떠오라 시킨 뒤, 물맛이 이상하단 이유만으로 클랜원의 팔을 뽑아버린 사내였다.
그런 그가 이처럼 양보하는 이유가 뭘까?
“형님이 아끼는 분이라서, 저도 아껴드리고 싶은데, 자꾸 저를 실망시키시면, 재미없을 거예요.”
그 순간 뻗어 나온 거센 압력에 카일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실로 찰나에 치고 나간 기세였지만, 뇌리에 각인되기엔 충분했다.
포스를 거둔 뒤에도 여전히 떨고 있는 카일리의 모습이 만족스러운 듯,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제퍼드가 읽어나가던 보고서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 친구, 한 번 조사해 보세요.”
“...예?”
“그레이 셰이드도 속만 끓고 있을 텐데. 이참에 빚 하나 지워두면 좋을 것 같네요. 아무래도 미국 시장에 마인 좀 깔아둬야겠어요.”
그 말에 카일리는 사흑련과 WHA를 떠올렸다.
“겸사겸사 광호에도 한 발 뻗어두면 좋겠죠.”
자리를 피하기 위함인지, 일이 늘어난 까닭인지, 카일리는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급히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