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 #3. 이번엔 빨았어.
성장의 증거라고 해야 할까?
“초롱아 백만 볼...파이어!”
마루의 외침에 기다렸다는 듯 초롱이가 입을 벌렸고, 한 줄기 불길이 쭈욱 뻗어나갔다.
그 불길에 맞은 몬스터가 포효했다.
크아아아!
아직 꼬맹이의 불길은 화력이 부족한 터라, 성질 긁기에는 딱 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냥에 지분을 갖는 건 분명한 듯, 이어진 마루의 마무리는 초롱이를 환호하게 만들었다.
-와~! 오늘도 포식이다.
눈에 보이지 않은 무언가.
경험치 혹은 포스나 마나라고 부르는 걸, 마치 식사라도 하듯 입을 쩍 벌리며 받아들이는데, 실제로 트림까지 하는 모습을 봤을 땐, 의미 없이 하는 행동은 아닌 듯싶었다.
-꺽! 히히! 나 트림했어.
폴짝 뛰어올라 마루의 머리를 점령한 초롱이가 기분 좋게 꼬리를 흔들었다. 그게 자꾸 뒤통수를 때려댔지만, 굳이 언급해서 기분 상하게 만들진 않았다.
초롱이의 성장을 위한 사냥이었다. 그런 이유로 위험한 사냥보단 안정적인 경험치 파밍에만 집중하며, 초롱이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지분을 몰아주려 노력했다.
초롱이의 성장은 결국 그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기에, 이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았다.
이 와중에 흥미로운 건, 초롱이가 전투에 돌입할 때의 변화였다.
붉은빛!
앞서 전직 당시에 확인했던 그 모습이었다. 마치 일상과 전시를 구분하는 느낌이었다.
-나 이제 배불러.
그의 손 위로 올라온 초롱이가 그리 말하며 눈꺼풀을 껌뻑이는 게 보였다. 피곤하다는 증거였는데, 어느새 피부색도 초록빛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원 없이 사냥터를 돌며 하루빨리 성장을 시켜주고 싶었지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경험치나 기운에 한계가 있는 모양인지, 일정량의 파밍이 끝나면 이처럼 하품을 해 오는 것이다.
“그만 들어갈까?”
마루가 인벤토리를 열어주니, 초롱이가 그곳으로 훌쩍 뛰어들었다. 여의주 속으로 쏙 들어가는 게 보였다.
-호봇 할 때 깨워야 돼. 꼭이야.
그 와중에 남긴 메시지에 실소가 나왔다. 최근 초롱이가 푹 빠져있는 메카닉 프로그램이었다. 비슷하게 꼬봇이란 만화도 있었는데, 당연히 그것도 즐겨봤다.
“그래. 그래. 그러니까 푹 자라.”
아이를 재운 시점, 그 즈음부터가 본격적인 마루의 성장시간이었다.
[뭐하냐?]
메시지를 보냈고,
[버스 운행 해야지.]
쌍둥이가 소환됐다.
**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변화가 있었다고?”
마루의 물음에 임지현이 활짝 웃으며 이를 설명했다.
“몸속에서 요상한 느낌이 자꾸 올라오더라구요.”
마치 간질거리듯 살금살금 스쳐가는 감각이었지만, 꾸준히 거기에 집중한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캐치할 수 있었죠. 헤헤!”
스킬 재현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가능성을 점치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결과물이 나타나니, 마루 역시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척길동 가면이 아니었더라면, 그 당혹감이 고스란히 드러났을 터였다. 실로 다행스런 순간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교관인데, 훈련 성과에 당황하는 꼴을 보일 순 없잖은가.
이어지는 임지현의 설명도 마찬가지였다.
“그 묘한 감각이 포스가 꿈틀대는 거더라구요.”
스킬 동작 재현도가 높을수록 포스의 반응도 선명해졌다는 것인데, 그걸 완벽히 재현한다고 해서 스킬이 발동되는 건 아니었다.
이 부분은 예상했던 바였다.
‘내부 흐름 없이 완성될 순 없으니까.’
무협으로 치면 내외공의 조화가 필요한데, 쌍둥이는 심법이 없는 외공만 알고 있는 상태였다. 스킬 자체의 완성도가 높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기운이 반응한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스킬로써 완성될 순 없었다.
내공 부분은 마루도 어찌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내면의 복잡한 흐름을 따로 정의하기가 어려운 탓이다.
어쨌든 그렇게 외형이나마 완벽하게 재현한 결과, 임지현은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정말 스킬이 발동됐으면 대박인데. 헤헤! 어쨌든 그 묘한 감각을 쫓아가니까. 포스 운용이 좀 더 수월해졌어요.”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지만, 본인만이 느낄 수 있는 미세한 차이가 있다며, 재현 동작이 효과가 있다는 걸 증명해줬다.
그 때문일까?
“에~이, 개소리 하지 마.”
처음에는 이렇게 부정했던 임수현 역시 반신반의하며 재현 동작에 매달렸고, 그 결과 믿기 어려운 성과를 확인하고야 말았다.
“맙소사!”
바로 그 순간, 벗겨졌던 콩깍지가 다시 씌워져버렸고, 마루는 자신을 바라보는 초롱초롱한 두 쌍의 눈동자에 묘한 부담감을 느껴야만 했다.
덕분에 교육이 한층 편해졌지만, 저 무한한 신뢰의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가슴 한편이 뜨끔만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끄응...양심통인가.’
저들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사실 그들 남매는 일종의 실험체로써 선택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킬에 대한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남매의 신뢰를 이용한 것이다.
‘목숨 가지고 장난 친 것도 아니고, 결과도 잘 나왔잖아.’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고개를 휘휘 저어버린 뒤, 남매의 다음 교육을 위한 교본을 꺼내들었다.
당연히 그 교본이란 건 스킬 북이었다.
이 와중에도 마루는 실험을 잊지 않았다. 이유야 어찌 됐건 가설대로 상황은 잘 풀렸기에 양심통은 일단 미뤄둔 채, 실험을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기초 스킬로 가설 증명과 안전성 둘 다 잡았으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갈 때였다. 이번에는 스킬의 연계성에 관한 부분을 살필 생각이었다.
“이걸 배우면 된다.”
남매는 건네받은 스킬을 확인하며 약간 의아한 듯 물었다.
“두 종류인가요?”
“각기 조합형과 개별형이군요.”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의 스킬은 현재 재현중인 스킬의 발전형이고, 다른 하나는 전혀 무관한 상위 스킬인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순수 체술 계열의 스킬로써, 재현 가능성이 높은 걸로 골라낸 거였다.
체술 중심이 되는 건, 자연계 혹은 이능계라 불리는 마법적인 스킬들의 경우, 오직 내부 기운의 조합으로만 발동되는 탓에,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었다.
“그 전에.”
마루가 손을 내밀었다.
“선 입금.”
버스 운행 시간이었다.
**
뜻밖이라고 해야 할까?
“15년 경력의 베테랑이라 이건가?”
목표물 주변의 경계망이 생각 이상으로 철저했다.
‘그레이 셰이드가 당했다기에 보통은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한층 주의 깊게 주변을 살핀 것이며, 이처럼 곳곳에 숨겨진 경계망을 눈치 챌 수도 있었다.
이 정도로 촘촘한 수준이면, 상대를 C급 수준으로 한정하기가 민망해질 정도였다.
‘직접 나서길 잘 했네.’
카일리는 그리 생각하며 안도했다.
자칫 수하를 시키거나 하청을 맡겼더라면, 방심 및 허술한 접근의 연계로 쓸데없는 경각심만 심어줬을지도 몰랐다.
제퍼드가 맡긴 일이기에 더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이미 경고까지 먹은 입장이다 보니, 매 행보마다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기도 했다.
주변을 쭈욱 훑어본 결과, 접근 방식을 달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돈 좀 들겠네.”
**
문득, 기이한 의문이 하나 들었다.
“네가 좀 친다며? 한 판 붙자!”
저 따위 대사를 지껄이며 찾아드는 이들의 수가 생각이상으로 많다는 것이다.
마루는 자신의 손속이 너무 자비로웠는지 고심했고, 이내 고개를 저으며 이를 부정했다.
‘알까기면 충분하지.’
그렇게 터져나간 노른자가 얼마던가.
제아무리 생각이 없는 놈들이라도, 이쯤 되면 적당히 눈치를 보며 발길을 끊는 게 정상이었다.
“C급 A형 정마루. 명성을 넘겨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날파리들이 찾아왔다.
‘이거, 설마...?’
의문 속에서 의심의 싹이 피었다.
‘확인할 필요가 있겠네.’
다행히도 그에게는 이 방면으로 믿을만한 전문가가 함께하고 있었다.
“죽어라! 정마루.”
언제나처럼 문제아가 달려들고,
타앙!
“으아아악!”
노른자를 깐 뒤, 돌려보냈다.
“부탁 좀 할게.”
그리고 레베카를 움직였다.
이틀 뒤,
“키홀에서 붙었더군요.”
그녀는 믿음을 증명했다.
‘설마?’
순간, 마루의 머릿속의 북한산에서 얽혔던 일들이 스쳐갔다.
‘...들켰나?’
그에 대한 의문은 이어진 설명으로 해소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앞전 그레이 셰이드와의 마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키홀 측에서 그들과 접촉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주변에 깔아놓은 경계망을 눈치 채고, 사람을 쓰고 있더군요.”
요 며칠 꾸준히 찾아오는 불청객도 키홀에서 부린 거였다.
‘일단, 다행인가.’
확실히 북한산 전투보단 이쪽이 더 가능성이 높아보였기에,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 뜻밖의 이야기가 더해졌다.
“이건, 아직 확신하기 어려운 정보이긴 한데...키홀의 괴물이 한국에 들어와 있는 것 같습니다.”
마루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 행방에 대해선 조사 중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나선 것이라면, 마루님은 미끼고 실제는 혜성을 목표로 움직였을 확률이 높습니다.”
상대는 길드를 논할 정도의 거물이었다.
**
성난 뿔곰!
이반나를 칭하는 별명으로써, 능력을 발휘하면 이마 위에 뿔이 솟아나는 탓에, 자연히 그쪽으로 별명이 개발된 것이다.
러시아의 대표동물인 불곰을 섞어서 만든 말장난으로, 그녀의 초기 활동지가 한국이다 보니, 자연히 이쪽에서 만들어간 별명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작정하고 능력을 발휘하니, 소문의 성난 가시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뿌드득...쁘득...
주변 공기도 함께 일변하며, 거센 파동이 근방을 휩쓰는데, 마치 태풍이라도 온 모양새였다. 랭커급 각성자가 내비치는 기세란 실로 무시무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가 몸서리를 치며 물러났다.
“이거 참, 반응이 너무 격한 거 아닌가요?”
이반나가 서늘한 안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글쎄, 오히려 이 정도가 적당한 것 같은데.”
“후후...매번 느끼지만 너무 격렬해서, 쥐어짜고 싶게 만드신다니까.”
“나야말로 네놈 면상을 구겨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제퍼드!”
뜻밖의 대면이었다.
안과 밖의 랭커가 한 자리에 모여 버린 것인데, 무난히 모르쇠로 지나칠 수도 없는 게, 하필이면 둘 사이가 악연으로 엮인 사이라는 점이었다.
“여기까진 어인 행차신지? 아주 궁금해 죽겠네.”
이반나의 물음에 제퍼드가 웃으며 답했다.
“이 나라에서 잘 나가는 길드가 어떤 건지, 구경 좀 왔죠.”
그러며 저 한편에 보이는 혜성 길드의 건물을 바라봤다. 당연히 이반나의 표정은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저 안에는 그녀의 제자나 다름없는 김연희가 있고, 또 아끼는 동생인 이소희까지 있지 않던가.
마침, 오늘도 그 둘을 만나러 오는 길이었다.
“쓸데없는 관심은 사절하고 싶은데.”
“호...혜성에 제법 인연이 있다더니, 가벼운 사이가 아니군요.”
제퍼드의 눈이 초승달마냥 휘어졌다. 그는 혜성에 대한 관심도가 한층 솟구치는 걸 느꼈다.
‘오늘은 사전답사차 온 건데.’
생각지도 못한 만남으로 즐거움이 배가 됐다.
“이거 뜻밖의 상황이라 꽃도 준비 못해서 어쩌죠?”
“네 머리를 대신 따다 주면 되겠네.”
“후후...”
슬슬 제퍼드도 기세를 일으키는 듯, 주변의 대기가 한층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반나가 강화계의 신체변형 능력자라면, 제퍼드는 이능계열의 자연조작 능력자로써, 얼음여제 이소희 역시 여기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었다.
단지, 그들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이소희의 경우 외적으로 현상 조작을 드러낸다면, 제퍼드는 내적인 현상조작을 유도한다는 차이가 있었다.
본인 스스로를 조작의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써, 자연계 대부분이 외적발현인 것과 달리, 그는 내적 발현으로 강화계의 특징을 지닌 것이다.
희귀하기로 손꼽히는 강화계와 이능계의 혼성 능력자였다.
그 때문일까?
“오랜만에 한 판 화끈하게 어울려 볼까요?”
거리감을 중요시 하는 여타 자연계와 달리, 그는 과감한 접근전을 선호하고는 했다.
이반나가 제퍼드의 발밑을 살폈다.
정확한 스킬명은 알지 못했으나, 그간 수차례 부딪친 덕분에 알게 된 건, 제퍼드가 대지의 기운을 끌어다가 자신을 강화한다는 점이었다.
‘공중에 띄워놓기만 하면.’
두 랭커의 기세 때문일까?
혜성 길드는 때 아닌 비상이 걸린 채, 1급 경계령이 발동 중이었는데, 당연히 이소희와 김연희 역시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당장에 이 주변만 해도 수많은 헌터들이 숨죽이며 두 랭커의 대치를 훔쳐보는 상황이 아니던가.
그야말로 세기의 대결이 시작되려던 찰나, 제퍼드가 돌연 미간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넘실대던 기세를 가라앉혔다.
“이거 참, 아쉽게 됐네요. 간만에 당신의 그 야들야들한 살결을 살포시 어루만져 드리고 싶었는데.”
그러며 한 방향을 바라보니, 어느새 도착한 것일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로 원!”
인디안 존슨이 저 한편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제로 원!
그것은 그에게 붙은 이명이기도 했다.
만약,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미국의 첫 번째 영웅으로 대표됐을 사내이지만, 스스로 모든 걸 내려놓은 탓에, 그리 불릴 수 없었다.
하지만 많은 시민들이 그를 잊지 못했고, 그 때문에 미련을 담아 0순위 영웅이라 표현하게 되니, 이를 합쳐서 제로 원이란 이명이 만들어진 것이다.
“어, 그래. 간만이다. 중국에 있단 소식은 들어서, 이쪽으로도 올 것 같긴 했는데, 정말 왔네?”
주변의 헌터들이 의문을 내비쳤다.
‘누구지?’
‘누구야?’
등장만으로 무대의 주도권을 잡아가는 사내였다. 당연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 좀 전 제퍼드가 뱉은 명칭을 상기하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로 원?’
‘설마, 인디안 존슨?’
‘...저게?’
주변의 이런 분위기를 읽은 듯, 이반나가 이를 갈며 말했다.
“내가 사준 옷은 어디다 버려두고, 꼬라지가 그 따위야?”
이에 존슨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옷인데.”
“...뭐?”
다시금 살펴보니 그녀가 사준 옷이 맞았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것인지, 색상이나 모양새가 빈티지 리폼 수준으로 달라졌을 뿐이었다.
‘아니, 며칠이나 됐다고?’
매서워지는 눈초리에 존슨이 거북목이 돼선 말했다.
“그래도 이번엔 빨았어.”
세탁으론 답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