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 / #10. 현무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자, 여기까지!”
존슨은 애초에 예고했던 것처럼, 정말 위험한 구역까진 들어가지 않았다.
‘여기도 충분히 위험하긴 한데.’
마루가 생각하기에는 이미 지나온 구역만으로도, 어지간한 마굴의 심처와 비견 된다 여겼다.
물론, 한라산의 전체적인 지형으로 봤을 때, 이제 막 중간 부분에 돌입한 정도일 뿐인지만, 그래도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는 소리에,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지리산도 살 떨렸는데, 여긴 더하네.’
마굴 초입부터 상위종이 등장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안전지대가 설치되는데, 이번에는 존슨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마석 여섯 개짜리부턴 좀 빡세거든.”
최대치가 여덟이라고 했는데, 대부분 마굴의 주인에게 도전하기 전, 만전을 기하기 위해 펼친다고 했다.
존슨의 위험천만한 모험정신을 생각해 봤을 때, 도전 대상이란 하나같이 이곳 한라산 급의 마굴일 거라 여겨졌다.
제법 시간이 흐른 뒤, 이마에 땀을 닦으며 존슨이 돌아왔다.
“이 안에는 생명체가 없다고 속이는 거니까. 몬스터가 튀어나와도 괜히 까불지만 않으면, 쉬는데 문제없을 거야.”
그러며 결계석의 소소한 팁이나 효능 들을 설명해 주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마루가 슬며시 의문을 드러냈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겁니까?”
“뭐, 세계 방방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까. 이래저래 접하게 되는 거지. 세상이 요지경인데, 그 속에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요상한 사람, 아주 넘쳐난다.”
“...요즘 가요도 듣습니까?”
“눈치 좋네. 한국에 왔으면 한국 문물을 즐겨야지.”
묘하게 가사 같은 느낌에 찔러봤더니 정답이었다.
“격변 이후로 세상만사 스킬이 전부인 것 같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거든.”
때론 아프리카의 원주민들 속에서, 언젠가는 저 대륙의 소수민족들 틈에서, 다양한 재주를 발견하고 체화할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만남도 여럿 있지, 개중 재미있었던 건 카지노에서 만났던 거지 영감이지.”
도박에 미쳐버린 탓에 그 동네를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건 온갖 구박을 다 받으며 살고 있건만, 사실 숨겨진 실력자라는 점이었다.
“뭐, 대단한 실력자는 아닌데. 그래도 인정할 수밖에 없더라고.”
이유인 즉,
“비각성자인데 C급 몬스터를 잡더라고.”
정말 우연찮은 발견으로써, 놀랍게도 어떠한 포스의 흐름도 느낄 수 없었다.
“순수하게 체술하고, 몽둥이찜질로 복날 개 패듯이 때려잡더라고. 당시 보여줬던 느낌으론 B급도 커버 할 것 같더라.”
한 수 배우기도 했다는데, 등급 여부와 무관하게 순수 체술의 경지가 높아, 여러모로 얻는 바가 많았다는 것이다.
내심 기대하는 마음으로 마루가 물었다.
“꿀꺽...혹시 거기가 어딥니까?”
“안 돼, 그 영감님 생각보다 부끄럼쟁이라, 발각되면 또 튀어버릴 걸. 세계는 넓고 도박장은 많으니까.”
어쨌든 그런 인연들을 통해 쌓이고 쌓인 공부가 현재의 인디안 존슨을 만들어냈단 것이다.
그렇게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존슨의 인생과 경험담 등을 들으며 안전지대를 즐기는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든 의문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날 샐 겁니까?”
평소보다 휴식 시간이 길었던 탓이다.
‘고생해가며 결계를 펼친 만큼, 좀 더 쉰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런 수준을 벗어날 만큼 시간이 흘러버렸다. 이에 존슨이 슬쩍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만날 사람이 있어서.”
“...여기서요?”
지금 이곳이 어디던가.
대한민국 최악의 마굴이라 불리는 한라산 마수지대가 아니던가. 어지간한 던전은 명함도 못 내미는 장소였다.
세계적으로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주변국에는 제법 명성을 떨치는 마굴이기도 했다.
헌데, 그 한복판에서 약속이 있다?
“드래곤이라도 만납니까?”
농담이라 생각하며 전설 속 동물을 소환해 보는데, 이게 웬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리 답하는 존슨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했다.
‘...설마?’
마루의 머릿속으로 자연히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초롱이 같은 존재가...또?’
남들에겐 농담이며 전설이지만, 그에게는 너무도 친숙한 존재가 바로 ‘드래곤’이지 않던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존슨을 살폈다. 그 때문인지 침묵이 길어지고 정적이 깊어지는 가운데, 문득 들려오는 음성이 하나 있었다.
“신기한 재주로군.”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존슨이 펼쳐놓았던 결계 밖으로 웬 노인이 보였다.
‘모시옷? 이 겨울에?’
그런 의문을 느끼는 것도 잠시, 몇 차례 결계를 두드리며 파문을 일으킨다 싶더니, 마치 벽을 통과하듯 경계를 넘는 것이 아닌가.
‘저게, 저리 쉽게 뚫리는 게 아닌데...’
마루는 직감적으로 그가 존슨이 기다리던 존재라는 걸 알았다.
‘...드래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사람처럼 보였다.
물론, 이런 장소에서 마주쳤다는 점에서 비범을 증명하긴 하나, 어쨌든 인외종으로 여겨지는 외형은 아니었다.
의문을 느끼고 있는 찰나, 존슨이 입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그가 한국식으로 머리를 숙여 보이자, 노인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좀 늦었지?”
“아닙니다. 게다가 제가 잔재주를 부려놔서, 좀 걸리실 줄 알았습니다.”
평소 봐 왔던 동네 바보 형 이미지는 어디로 간 건지, 존슨이 이전과는 180도 달라진 진중한 모습으로, 노인을 상대하고 있었다.
마루가 놀라는 와중에도 숨죽이며 둘의 대화를 지켜봤다.
“흘...확실히 쉽게 찾진 못 했어. 잔재주라고 할 수준은 넘는 것 같구만. 자네 품에 든 물건이 없었다면, 좀 더 시간이 걸렸을 게야.”
그러면서 슬쩍 주변을 돌아봤다.
“여긴 일부러 찾은 겐가?”
“이전에 만났던 장소라서,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어쩌려 그랬나?”
존슨이 제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냥 돌아갔겠죠. 요 녀석과 무관한 분이란 거니.”
가슴팍에 숨겨진 물건을 뜻하는 것으로써, 앞서 노인이 말한 것도 그것이었다.
“히말라야인가?”
“예.”
“기껏해야 잠깐 만난 정도일 텐데, 제대로 기억하나 보군.”
“너무 대단한 물건을 받았으니까요. 가끔 꿈도 꿉니다. 하핫!”
실제로 당시 히말라야 일정은 숨 막히게 힘겨울 나날로 가득했고, 그 때문에 간간히 악몽처럼 꿈에 등장할 때가 있었다.
“앞전에도 느꼈지만, 자넨 참 영혼이 맑은 것 같아. 히말라야의 그 친구가 물건을 맡긴 이유가 있어.”
“기왕이면 한 번쯤 더 만나 뵙고 싶었는데, 그 이후로는 도통 모습을 보여주지 않더군요.”
그 말에 노인이 묘한 표정으로 존슨을 바라봤다.
분명, 초면이나 다름없기에 처음 보는 표정과 눈빛이건만, 기이하게도 존슨은 그 생각을 읽어버렸다.
“...아!”
뒤이어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건, 유품이군요.”
“흘...나나 그 친구나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았으니까. 적당한 타이밍에 자네 같은 인물이 등장해 줬으니, 맘 편히 물려주고 떠났을 거야.”
거기까지 이야기한 노인이 고개를 돌려 마루를 바라봤다.
“왜 왔는지는 알고 있네.”
갑작스런 지목에 마루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나...?’
설마,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걸까?
‘이렇게 광산 노예...아니, 이게 아니지...’
한 차례 정신이 튀어나가려는 걸 붙잡은 뒤, 존슨을 돌아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What?’
‘Calm down!’
진정하라며 손짓까지 하는 그의 모습에, 일단 호흡을 가다듬으며 당혹감에 흔들리는 심장을 달랬다.
‘믿자!’
뜬금없이 진지한 모습이 낯설었지만, 보름이 넘도록 함께 생활하며 지켜본 그의 영웅이었다. 충분히 신뢰할 만한 ‘형제’였다.
그의 표정변화를 쭉 살펴보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고, 그 순간 마루는 등허리를 강타하는 전율을 느껴야만 했다.
“푸른 신수의 의지를 잇는 분이여, 잘 오셨소.”
노인은 청룡을 아는 존재였다.
**
초롱이가 현실로 넘어오기 위해선 마루의 소환이 필요하지만, 현실에서 PP로 돌아가는 건 스스로의 힘으로 가능했다.
그 때문일까?
[오늘 하루는 맘껏 놀다가, 해 떨어지면 돌아가는 거야.]
마루가 그리 이야기하며 아이를 밖으로 꺼내준 것이다. 주변에 인기척이 느껴져도 돌아가야 한다는 조건이었지만, 여차하면 도마뱀 연기도 할 자신이 있었다.
드래곤의 자존심이건 뭐건, 장기간 밀렸던 여러 시리즈들을 생각해 본다면,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 즐겁게 만화를 즐겨보던 중, 문득 기이한 느낌이 초롱이의 감상을 방해했다.
-머지? 멀까?
저 어딘가, 어쩌면 바다 건너 어딘가의 섬을 향한 고갯짓이 이어지는데, 생각은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Go! GO! Let's go! 호봇~!
새 시리즈가 막 시작한 참이었고, 다른데 한눈 팔 틈이 없었다.
**
“나는 정령이라네.”
노인은 자신을 그리 소개했다.
“저기 저 친구는 눈치가 좋은 건지, 감이 좋은 건지, 일찌감치 눈치 챈 것 같은데, 난 사람이 아닌 정령이라네.”
그 말에 마루는 결계 바깥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둘 만의 비밀스런 대화를 위해, 존슨은 잠시 자리를 피해 준 것인데, 덕분에 한층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마루는 과감히 물었다.
“청룡을 아십니까?”
이에 노인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라도 내게서 답을 원한다면, 미안하지만 들려줄 수 없다네. 흘...나 역시 그분을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거든. 단지, 자네가 품은 게 그분이 남긴 거라는 것 정도는 알지.”
“아...”
내심 초롱이에게선 들을 수 없는 것들을 기대하고 있었건만, 어쩌면 많은 걸 기대하긴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노인은 이야기했다.
“아주 오래 전, 눈을 뜨고 기억이 시작되던 무렵엔, 나를 ‘빚은’ 존재에 대한 어렴풋한 이미지와 사명만 남아있었지.”
거기에 기대 긴 시간을 존재해 왔다. 그건 실로 아득하리만치 기나긴 세월이었다.
수백? 수천 년? 아니다 만 단위를 아득히 상회했다.
“뭐, 매일 깨어있는 건 아니고, 대부분은 잠만 잔다네.”
단숨에 1~200년씩 잠들어 버리는 게 일상이었다.
“가끔 주변에 요란한 소동이 발생하면, 잠깐 잠깐씩 깨어나는데, 그렇게 잠시 일어나 기지개를 펼 때면, 민간 신앙이니 뭐니 하면서, 번거로운 일들이 종종 발생하긴 했지.”
그렇게 간간히 깨어나 활동하는 사이, 조금씩 조금씩 세월의 주름이 쌓여나가더니, 어느새 백발이 성성한 노년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흘...그러다 최근, 세계가 크게 격변하면서, 본의 아니게 새우잠만 자는 신세지. 이젠 나도 나이가 있다 보니, 피로가 장난이 아니야.”
가수면 상태로 지난 수십 년간을 지내 온 건데, 특히 이 주변이 마수지대로 변하고 농도 짙은 마기에 휩싸이면서, 그 잠자리는 더욱 불편해 질 수밖에 없었다.
“에잉~! 이 망할 몬스터 놈들이 내 집터를 죄다 부숴놓으니, 제대로 잘 수가 없어.”
돌하르방에 깃들어 잠을 청해왔건만, 이젠 그마저도 얼마 남지 않아서, 머잖아 자는 시간보다 깨 있는 시간이 길어질 거라 여겼다.
“그러던 참에 저 친구가 찾아왔더군.”
노인이 존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깜짝 놀랐지 뭔가.”
그러면서 조금은 슬픈 눈빛을 했다.
“몇 없는 친우의 유품을 지니고 있었으니...”
아마도 모든 거처를 잃어버리면, 노인 역시도 비슷한 과정을 밟게 될 터였다.
“마침 딱 적당한 시점에 찾아온 것 같군.”
노인은 그리 말하며 마루에게 말했다.
“만약 시기가 맞지 않았다면, 자네를 모른 척 했을 거야.”
당연히 존슨 역시 모른 척 했으리라.
“이전에도 저 친구 앞에 나타날 생각은 없었다네. 위험한 상황만 아니었으면 그냥 강 건너 불구경 좀 하다가 끝났겠지.”
그 말에 마루는 새삼 존슨이 대단하단 생각을 해버렸다.
‘아니, 그러면서 여길 다시 왔다고?’
정말로 위험했던 장소를 재방문 한다는 건, 어지간한 용기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돌아가는 상황만 놓고 본다면, 왠지 그를 위해서 옮긴 걸음인 듯싶었다.
‘아...정말...’
묘한 감동을 주는 재주가 있었다. 때 아닌 외부 보초를 서게 된 존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노인의 이야기에 다시금 귀를 기울였다.
“자, 이쯤에서 내 소개를 제대로 해야겠군.”
조금은 늦은 통성명이었다.
“나는 특정한 이름은 없다네. 정령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존재이기에, 고정된 형태로써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지. 하지만 굳이 정의하라고 한다면.”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현무암(玄武暗)이라고 부르시게나.”
“...네?”
눈이 동그래지는 소개가 이어졌다.
“북쪽을 관리하는 사방신인 현무의 어둠 속에서 태어난 정령으로써, 긴 세월 푸른 신수의 사명을 지켜온 파수꾼이라네.”
그러며 물었다.
“자네 현무의 신물이 필요하지 않나?”
“아...”
그 순간 마루는 2차 전직의 순간이 스쳐갔다.
‘...설마, 그게?’
PP내에서 해결하는 거라 여겼던 ‘퀘스트’가 하나 떠올랐다.
[사신 변환 스킬을 완성하라!]
수호자의 직업 전용 퀘스트였다.
‘이런, 미친! 현실용이었어?’
뒷목이 뻐근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