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 / #13. 어부바!
순간적으로 빛이 사라지고, 소리가 사라지고, 심지어 세상마저 사라지는 것 같단 그런 느낌을 받았다.
덜컥!
그렇게 무릎이 풀리는 순간,
번쩍!
사라졌던 모든 것들이 다시 눈앞에 나타나듯, 거대한 섬광과 함께, 산자락이 무너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맙소사!’
마루는 그 전율적인 광경에 몸서리를 쳤다.
‘데스워치는?’
그는 어떻게 됐을지 궁금했다.
‘...살았다고?’
저 강대한 일격 속에서 살아있었다.
그것도,
아주 멀쩡하게!
**
솔직히 깜짝 놀랐다.
‘너무 멀쩡한데?’
존슨으로써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찌어찌 버텨낼 수는 있을지도 모르나, 저렇게 멀쩡한 몰골로 서 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러다 뭔가를 발견하곤 깨달았다.
‘저 눈빛...’
표정 속에서 언뜻 현무암의 모습이 스쳐갔다.
‘...설마?’
마치, 모든 걸 내려놓은 듯, 너무도 편안한 얼굴이었다.
“역시나 감이 좋구나.”
그 순간 데스워치가 입을 열었다.
잠깐 경계태세를 갖춰보는데, 이에 데스워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승부는 났다. 내 패배다.”
그러면서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아주 잠시, 대화할 시간만 벌어 놓은 거라, 전투까진 할 수 없어.”
스킬을 통해 과거를 붙잡아 놨을 뿐, 실제는 좀 전의 일격으로 모든 게 끝난 상황이었다.
뭔가 생각하는 듯, 제 몸뚱이를 내려다보길 한참, 돌연 목례를 해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한국식이 아닌, 서양식으로 경의를 표하는 Bow를 보인 것으로써, 이 한 번의 동작 속으로 지난 과거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한 거였다.
생각보다 깊게 오래 숙여보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오랜 시간 도망만 다니던 놈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건, 역시 들은 게냐?”
“...예.”
“폐암이라니. 담배도 안 피는데, 웃기는 일이야.”
“......”
존슨이 그간 미뤄왔던 승부를 허락한 건, 더는 미룰 수 없는 사정이 생긴 까닭이었다. 데스워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던 것이다.
헛웃음을 흘려보내던 것도 잠시, 데스워치가 분위기를 전환하며 입을 열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것일까?
“제자 녀석의 심보가 고약하단 걸, 나 역시 모르지 않았지.”
깜짝 놀랄 이야기에 존슨의 두 눈이 커졌다.
“하지만 고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어.”
“...내칠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그럴 수 없었다. 클레어의 아들이거든.”
“아...!”
과거, 함께 어울리던 무렵, 몇 차례 들었던 적 있는 이름이었다.
‘스승님과 함께 좋아했다던 분...’
형제의 우정을 생각하며 스스로 떠났다고 들었다.
“아마, 형님도 알고 있었을 게야. 그러니 제자 놈의 심성을 알고서도 참아 넘겼겠지.”
데스워치를 생각하는 마음만으로 놈을 봐줬던 게 아니었다. 클레어란 여인을 향한 배려까지 담겨있던 것이다.
“그렇게 참고 참던 형님이 그 녀석의 목숨을 직접 거뒀으니, 다 그만한 사건이 있었겠지. 후...”
서로서로 다 알면서 쉬쉬하던 이야기였다. 존슨은 제자이며 제 3자의 입장이라 온전히 알 수 없는,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하나 둘 풀려나왔다.
“그래도 참을 수가 없었다. 내겐 정말로 아들 같은 녀석이었으니까. 복수하고 싶었다. 형님을 괴롭히고 싶었어. 그래서 널 선택했지.”
“...거 참, 다른 놈도 있는데, 왜 하필 저를 찍었습니까?”
그보다 더 알려지지 않았지만, WHA의 2대 회장 역시도 초대회장 마르코의 제자였다.
“첫째에다 수제자는 네 역할이니까. 게다가 그놈은 왠지 재수 없어서 내가 싫다.”
“끄응...”
“게다가 너만큼 단단하지도 못하고.”
흘흘 웃어버리는 데스워치의 모습에 결국 헛웃음이 나와 버렸다.
“미안하다!”
문득, 데스워치가 웃음기를 지우는 게 보였다.
“마지막 날...내가 형님을 찌르지 않았더라면...”
대격변의 무렵, 초대회장 마르코는 데스워치와 한 차례 격전을 치렀었다. 동생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준 뒤, 그렇게 부상을 입은 몸으로 전장을 나섰다.
“...형님은 죽지 않았을 거야.”
그 말에 아주 잠시, 존슨의 표정이 구겨졌지만, 이내 무거운 한숨과 함께 털어냈다.
“후우우...그건 그 영감이 멍청했던 거죠. 아니, 어떻게 그 위험한 장소를 혼자서 뛰어 들어가?”
그가 전 세계적인 영웅으로 칭송받는 이유였다.
“혼자서 대격변을 막을 생각을 한 것 자체가, 미친 짓이지.”
당시 그가 남겼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희생은 나 하나로 족할 뿐!]
실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당시엔 지금보다 랭커도 부족하고 실력자의 수도 모자랐기에, 그로써는 미래를 기약하는 최선의 선택이기도 했다.
네크로맨서!
데스워치가 과거의 기억을 내던진다면, 그는 과거의 망자를 휘두르는 사자였다.
그런 이유로 일인군단이라 불리기도 했었다.
이후로도 몇 차례 더 대격변이 발생했고, 수많은 랭커들이 모여 가까스로 이를 막아냈는데, 당시 발생한 희생도 상당했다.
그로 인해 초대 회장의 명성이 한층 높아지기도 했다.
데스워치도 그가 했던 행동이 얼마나 무모하며, 또 멍청한 짓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모습이 상처를 짊어졌던 뒷모습이기에, 가슴에 비수처럼 박힐 수밖에 없었다.
특히, 격변을 막아낸 뒤, 그 현장에 남아있던 초라하고 볼 품 없던, 너무도 비참했던 마르코의 시체로 인해, 지난 기억은 화인처럼 남아 매 순간 가슴을 불살랐다.
제자에 대한 분노, 스스로에 대한 후회, 풀어낼 수 없는 울분 등등, 그 모든 걸 해소할 길이 없어서 홀로 미쳐갔다.
“네겐 미안하고...고마울 뿐이다.”
미쳐가던 그를 붙잡아 준 게 존슨이었다. 자신을 미끼로 던져 그의 불길을 쏟아내게 만들어 준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도통 보이질 않아서, 좀 답답하긴 했지.”
“그때부턴...삼촌...이 원하는 게 보였거든.”
죽고 싶어 했다.
분노가 사라진 자리 위로, 간절히 죽여주길 소망하던 눈빛이 새롭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피하고 도망쳤다.
마침 히말라야에서 받은 신물이 몸을 숨기는데 도움이 됐다.
“삼촌이라...그리운 호칭이야. 흐흐...”
잠시 웃어보이던 그가 물었다.
“마지막에 그 일격, 그건...형님을 뛰어넘은 거냐?”
“에~이, 그런 구닥다리 노땅, 진작 넘어섰지. 지금은 내가 두어 수는 위라고.”
“푸하하하!”
시원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목이 터져라 웃어대길 한참, 데스워치가 존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키메라가 내게 제안을 하더구나.”
뜬금없는 명칭이 튀어나온 탓인지, 존슨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키메라는 제퍼드의 이명이 아니던가.
“네가 쫓아다니던 아이, 이반나를 같이 잡자고 하더구나. 그러면 넌 알아서 딸려 올 거라며. 함정을 파고 기다리자고.”
“으득!”
존슨의 두 눈 위로 불꽃이 튀었다.
“푸핫! 정말 웃기는 이야기야. 네 주변인을 잡자니.”
데스워치가 재차 폭소했다.
“너야말로 내 목표물의 주변인이건만, 거기서 다시 주변인을 잡자는 거야.”
그 말처럼, 존슨은 초대회장 마르코의 주변인이기에 그의 목표물이 된 것이다. 거기서 다시 주변인을 잡으라니, 어찌 웃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꼴이 우스워, 잠시 어울려 주긴 했는데, 조심하는 게 좋을 게야. 지켜보니 그놈 몸뚱이가 생각보다 커졌더구나.”
키홀이란 단체 하나만을 짊어진 상황이 아니었다.
“중국의 무림처럼, 유럽에서도 사건이 하나 터질 모양이야. 그 중심에 키메라가 있으니, 시류를 잘 읽으며 대처해야 할 게다.”
그 즈음 데스워치의 신변에 변화가 발생했다.
“...삼촌?”
존슨이 깜짝 놀라 바라보는 가운데, 데스워치의 몸이 조금씩 먼지가 되어 부스러지는 게 보였다.
“시간이 된 모양이다.”
그의 스킬로 유지되던 과거의 잔상이 막바지에 이른 것이다.
“언더페이커 형님께 한 소리 들으려나...”
상황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그 말에 잠깐 웃어버렸다.
과거, 미국의 유명 레슬러 중 장의사 포지션으로 유명하던 선수가 있었는데, 마르코의 별명이 그 짝퉁이라 해서 언더‘페이커’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관 하나를 짊어지고 다니기도 했는데, 거기에는 언제나 몬스터의 시체가 하나씩 담겨있었다.
영웅으로 추앙받은 이후로는 들어본 적 없던 터라, 간만에 듣는 별명에 실소가 나와 버렸다.
이에 데스워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웃어라! 앞으로도 그렇게 웃는 거야...즐겁게...”
그게 마지막 말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초인의 최후였다.
**
멀찍이서 관전 중이던 비밀 게스트, 현무암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흘...저래서 저 친구를 선택한 건가.”
데스워치의 죽음 속에서, 히말라야의 문지기가 존슨을 고른 이유를 알게 됐다.
“그래, ‘과거’를 먹고 깨어나는가.”
존슨의 맑은 영혼 때문에 그를 선택한 것도 있겠지만, 그에게 묻어있던 ‘시계’의 흔적이 문지기를 불렀으리라.
특히, 데스워치와의 잦은 마찰로, 그의 몸 구석구석 묻어있던 시간의 흔적이 문지기를 깨운 것이다.
히말라야의 신물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불사의 불꽃!
저 시린 냉기 속에서 겨우 불길을 잡고 형태도 갖췄지만, 너무 오랜 시간을 냉기에 갇혀있었다. 이를 깨우기 위한 소스가 필요했던 것이다.
‘과연...과연......’
데스워치의 죽음 속에서, 과거를 표현하는 기운이 존슨에게로 흘러가는 게 보였다. 좀 더 정확히는 그의 품 안에 있는 신물에 흡수되는 중이었다.
오직 그의 눈에만 보이는 영적인 현상으로써, 이번 사건을 통해 신물은 한층 완전해질 터였다.
두근...
그에게만 들리는 신물의 박동소리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
눈살이 찌푸려지는 소리였다.
“...다시 말해 보세요.”
제퍼드의 물음에 카일리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게, 아무래도 데스워치께서 존슨을 쫓아간 것 같습니다.”
“하...”
웃는 모습에 긴장감이 빡 들었다. 분노가 섞여있음을 짐작한 까닭이었다.
“목적지가 어디죠?”
“제주도인 것 같습니다.”
그의 표정이 결국 구겨지는 게 보였다.
“으득...”
짜증이 치미는 듯, 번들거리는 안광이 주변을 훑었다. 카일 리가 숨을 죽이는 가운데, 터져 나오는 비명성이 있었다.
“끄아아아아악!”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불행이라 해야 할지.
마침, 함께하고 있던 수하의 팔이 뽑혀나가는 게 보였다. 그게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데 안도하는 한편, 수하들 중 수위에 꼽히는 실력자가 망가졌다는 부분에서, 카일리는 복잡한 심경이 돼버렸다.
**
털썩...
데스워치가 먼지가 되어 흩어지고, 그렇게 상황이 종결됐을 때, 기다렸다는 듯 존슨의 육신이 무너져 내렸다.
“형님!”
마루가 화들짝 놀라며 달려들었다.
“으으...온몸이 부서질 것 같다.”
신음성과 함께 존슨이 연신 앓는 소리를 했다.
“부상이 심한 겁니까?”
걱정 어린 마루의 물음에, 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부상이라면 부상이지. 마지막 일격, 그게 아직 감당하기가 어렵거든. 반동이 너무 심해! 끄응...”
데스워치 때문에 생긴 부상이 아닌, 그 스스로 만든 고통이었다.
“어우, 죽겠다! 브라더 나 며칠 더 숙박해도 되냐?”
존슨의 물음에 마루가 헛웃음을 흘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며 물었다.
“마지막에 그건 뭡니까?”
“왜? 감동 먹었냐?”
“...예!”
솔직한 심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율적인 일격이며 광경이었고, 그만큼 인상적으로 기억될 장면이었다.
“브라더가 이 형님의 매력에 뿅 갔구나.”
“...헛소리만 좀 줄이면 참 좋을 텐데.”
“그게 내 매력 포인트야.”
“감점 요소겠지.”
흰소리로 농을 늘어놓던 것도 잠시, 존슨이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벽을 넘은 거다.”
“...설마?”
“그래. 등급 외, 굳이 급을 매기자면, SS급이라고 해야겠네.”
“맙소사!”
“이제 겨우 한 발 내딛은 거야.”
일격에 망가져버린 몸뚱이가 그 증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충격적인 이야기여서, 마루는 전율하며 존슨을 바라봤다.
“뭘 그렇게 뿅 간 얼굴을 하냐.”
물론, 그 감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짜게 식은 마루의 표정에 존슨이 실소를 하다, 그 진동으로 인한 고통에 울상을 지었다.
그가 말했다.
“히잉...브라더 나 어부바!”
“귀여운 척은 좀...”
타박하면서도 결국 업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