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 #17. What...the f...!
우습게도 첫사랑을 마주하고 나자, 그가 지난 과거라는 걸 알게 됐다. 그와 동시에 긴 세월 가슴에 맺혀있던 응어리가 씻겨나감도 느꼈다.
가슴에 비수처럼 박혀있던 첫사랑의 그림자가 어느새 옅어졌고, 또 흩어졌음을 알게 된 것이다.
묘한 내용이었던 탓인지, 이선이 잠시 침묵했다.
그 모습에 이반나가 웃었다.
“너도 네 죄를 알긴 하나 보구나?”
“그렇게 물으면 할 말이 없긴 합니다.”
이선 역시 과거를 떠올렸다.
한 때, 그녀와 썸을 타면서 연인의 거리로 걸어가던 사이였다. 하지만 그게 사랑은 아니었다.
적잖은 시간 함께 부대끼며 ‘익숙해’ 진 탓에, 그녀와 함께 보내는 미래도 나쁘지 않겠다고 여겼다. 좋은 ‘파트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가오는 걸음에 맞춰줬을 뿐이다.
그러다가 이선희를 만났고, 어느 순간 빠져버렸다.
첫사랑이었다.
“내가 빠져줬으면 잘 되기라도 하던가. 뭐한다고 미국으로 넘어가서는...쯧!”
문득, 찌르고 들어오는 이반나의 이야기에 이선이 쓰게 웃었다. 그 말처럼 그녀는 둘의 관계를 지켜보기 어려워, 결국 한국이란 나라를 떠나버렸다.
미워할 수 없고, 또 미워하기 싫었기에 내린 선택이었다. 좀 더 빨리 떠나고자 했지만, 김연희의 자립도 지켜봐야 했기에, 제법 쓰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김연희가 이선을 싫어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떠난 사랑에 슬퍼하던 이선희의 눈물만이 아니라, 이런 스승의 상처까지 가까이서 지켜봤던 탓에, 이래저래 이선을 좋아하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냥...시기가 안 맞았던 거죠.”
이선은 그리 말하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차마, 그녀가 떠나며 남긴 죄책감으로 인해, 이선과 이선희가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하게 됐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이런저런 사건에 얽혀 결국 멀어져버렸다는 것까지, 굳이 그녀에게 언급하고 싶진 않았다.
“이젠, 과거니까요.”
묘하게 씁쓸한 음성이었고, 이반나는 거기서 눈치 챘다.
‘넌 여전히 현실이구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멍청이는 뭘 하려나?’
웃긴 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
인디안 존슨을 잡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자유로운 인간을 얽매는 건 하나 뿐이죠.”
제퍼드는 그리 말하며 한 인물을 입에 담았다.
“이반나 크라포드!”
러시아를 대표하는 랭커 중 한명이었다.
“그렇다면 이반나를 잡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에 카일리는 생각에 빠져드는데, 애초에 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던 듯, 한 호흡의 텀을 두고 제퍼드의 입이 열렸다.
“그녀의 지인을 건들면 되죠.”
마침, 이곳 한국은 이반나가 헌터 기반을 세운 곳이다 보니, 깊고도 진한 인연을 맺은 이들이 상당했다.
“김연희. 그녀의 제자라고 하더군요.”
그 말에 카일리 역시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별명이 성난 괭이였던가?’
스승을 따라간다는 느낌이었다.
“이소희라는 헌터 역시 이반나와 인연이 깊더군요.”
그리고 이 둘은 전부 혜성의 일원이었다.
답은 나왔다.
“광호를 엮으면 됩니다.”
따로 루트를 잡을 것 없이, 이미 깔려있는 레일에 올라타는 게 가장 간단하면서도 깔끔한 방법이었다.
아쉬운 거라면?
“데스워치가 있었더라면, 절대적인 우위를 잡고 ‘지휘’할 수 있었겠지만, 이젠 그들과 ‘거래’를 해야 할 테니...맘에 안 드는군요.”
그럼에도 결국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
앞서, 2차 전직 당시처럼 뭔가 어마어마한 변화가 있는 건 아니었다.
‘살짝 기대하긴 했는데...’
마루는 입맛을 다시며 일말의 아쉬움을 털어냈다. 그래도 전혀 변화가 없진 않았는데, 일단 눈이 좀 더 밝아졌으며 아주 미세하지만 시야가 더 높아졌고, 결정적으로 포스의 움직임이 한층 선명해졌다.
‘가성비를 파고드는데 도움이 되겠어.’
그러며 한 차례 거울을 바라봤다.
“이제 보니, 피부도 좋아졌네.”
솔직한 말로다가 그는 잘 생겼다고 하긴 어려운 외모였다. 그럭저럭 볼 만한 수준이라 여기지만, 눈에 띌 정도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그는 묘하게 빛이 났다.
‘와...피부발이라는 게 사실이구나.’
조금 부족한 얼굴이라도 피부가 살아있으면, 자연히 광이 난다더니만, 지금 그의 외모가 딱 그랬다.
이 느낌은 뭐라 해야 할까?
“샤워하고 나왔을 때 삘인데!”
대부분 남성들의 자신감이 극상승하는 타이밍, 그 시점의 외모 평점이 일상으로 옮겨온 느낌이었다.
괜히 쓸데없는 포즈를 취하고 있노라니, 문 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죙일 이빨 닦냐? 잇몸 나가! 나 급하니까 빨리 나와. 안 나오면 싱크대에 싼다!”
존슨의 외침에 한껏 업 되던 기분이 뭉개졌다. 마루가 인상을 찡그리며 가글을 마쳤다.
“급할 땐, 앞에 공원으로 좀 가라니까.”
“멀어!”
그 말과 함께 존슨이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콰콰콰콰...
일상의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감미로웠다.
**
띵~동!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벨?’
존슨을 내보내고 막 PP에 접속하려던 찰나, 뜬금없이 벨이 울리는 것이 아닌가.
‘방문 판매?’
어쩌면 그를 귀찮게 하는 불청객들이 드디어 집까지 찾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의 영역 중에서도 가장 민감한 곳, 그야말로 그만의 던전이라 할 수 있는 공간에 찾아든 거라면?
비각성자 시절이라더라도, 감히 자신하건데 B급까지는 커버할 정도로 단단한 방비가 되어있는 공간이 아니던가.
‘어떤 놈이려나.’
만반의 준비를 한 채, 외부 모니터를 켰다.
“누구세요?”
그러며 묻자,
-저 로렌입니다.
뜬금없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
실로 벙찌는 순간이었다.
길어지는 침묵에 모니터 너머의 소년기가 남은 청년이 말했다.
-저기, 라시아 오빠인데...기억 안 나세요?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나.
최근 까지도 라시아와는 자주 귓말을 나눴고, 파티 플레이도 간간히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오라비인 로렌의 아이디도 수시로 언급되었으니, 그를 모르는 게 더 어려웠다. 다시금 모니터를 살핀 결과, 확실히 게임 속 얼굴이 남아있었다.
겨우겨우 말문이 트였을 땐,
“What?”
어찌나 놀랐던지 영어가 튀어나왔다.
짧고 강한, 본토 발음이었다.
**
KHA 직원으로써의 사명감을 확실히 탑재하고 있던 것일까?
“안 돼!”
김나연은 임시안의 부탁을 쉬이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보면 알겠지만, 마루씨는 자신의 정보 보호를 신청했고, 혜성 측에서도 개별적으로 커버하고 있는 상황이야. 나 같은 일개 직원이 파헤칠 만한 급이 아니야.”
이에 임시안이 부탁했다.
“KHA가 아니라, 삼족오 길드의 후계자로 좀 알아다 주면 안 돼?”
그녀, 김나연의 부친이 이루고 키운 삼족오는 혜성이나 광호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대 길드였다.
특히, 삼족오가 더 대단하게 여겨지는 이유라 하면, 대기업을 모태로 두고 있는 다른 대형 길드들과 달리, 삼족오의 경우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에서, 순수하게 능력과 실력 그리고 실적을 쌓아올리며, 그들 명성을 스스로 일궈냈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한 때는 타 길드에게 견제를 받는 경향이 더 심했지만, 이제는 단단히 기반을 다진 탓인지, 감히 그들을 건드리려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대형 길드들 중에서 규모 자체는 가장 작은 편이지만, 투쟁 속에서 성장한 탓인지, 실속만큼은 단연 돋보이는 집단이었다.
“안 된다면, 안 돼!”
김나연이 딱 잘라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시안은 그녀에게 매달렸고, 그 간절함에 밀린 것일까?
“힌트만 줄게.”
직접적인 답을 건네주진 않았는데, 그 힌트의 방향성이 또 의외였다.
“수미한테 찾아가 봐.”
사돈 관계라고 해야 할 사이지만, 김나연과 진수미는 몇 차례 인연을 맺은 바 있었다.
이는 임시안의 부모님이 친가와 외가에서 각기 장남과 장녀다 보니, 다른 친척들이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그럴 때 마주치며 친분을 나눈 것이다.
거기서 힌트를 얻어 진수미를 찾았고, 귀찮을 만큼 문자를 보내고 쫓아다녔다.
이에 질린 듯, 진수미도 힌트를 던져줬다.
“영상을 잘 봐.”
그 말 그대로였다.
화제의 건가드 영상, 그 속에 많은 정보가 담겨있던 것이다.
돌발 게이트!
그 영역 내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상황 발생 지점에서, 일정 거리의 헌터들에게 호출이 간다는 걸 생각해 봤을 때, 영상 속에는 거처에 대한 힌트도 담겨있는 것이다.
혹시나 하고 영상의 장소를 찾고, 그 주변을 탐문하길 한참, 고대하고 고대하던 영상의 주인공을 찾아낸 것이다.
거기에는 오랜 친구 강건의 도움도 컸다.
게임 명 ‘아스트라~이크’로써, 그 역시 마루와 인연이 있는 친구였다.
“그래도 바로 옆 동네라서 다행이네.”
강건의 이야기에 임시안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구역을 더 넘어갔더라면, 그만큼 수색 범위도 넓어지는 탓이었다.
구역 하나 차이지만, 범위는 수십 배 이상 늘어나는 것이다.
그나마도 이름을 알고, 얼굴까지 알기에 가능한 수색이었지, 그런 정보가 없었더라면 그들로써는 불가능에 가까웠을 탐문이었다.
그렇게 마루의 거처를 찾았고, 벨을 눌렀다.
**
골 때리는 상황이었다.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이른 아침부터 머리 검은 짐승이 찾아오더니, 대뜸 무릎을 꿇고 대가리를 들이미는 것이 아닌가.
“허...”
마루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시꺼먼 사내놈을 바라보다가 그 옆의 다른 놈도 살폈다.
‘아크.’
게임 명 아스트라~이크가 거기 있었다. 캐릭터 변형의 거의 하지 않았는지, 얼굴이 많이 남아있어서 바로 알아 봤다.
그는 친구를 도와주려 찾아온 것인지, 따로 무릎을 꿇고 있지는 않았지만, 비슷하게 머리는 숙이고 있었다.
멋진 우정이다, 좋은 친구야.
그렇게 대할 수 있는 광경이지만, 상황의 중심에 그가 서 있다 보니,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맘 같아서는 문도 열어줄 생각이 없었지만, 하필 그 타이밍에 라시아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간 것이다.
아주 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제법 인연을 맺은 아이였고, 그런 만큼 소녀의 오라비를 마냥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한숨과 함께 문을 열어준 결과가 이거였다.
“미안한데. 제자 같은 거 키울 생각 없다.”
최대한 단호하게 잘라내는 것, 그게 라시아와 눈앞의 청년을 위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당장 내 코가 석자다.”
그러며 손을 휘휘 저은 채 쫓아냈는데, 골 때리게도 상황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
여느 때처럼 해가 떨어진 뒤에야 집에 돌아온 존슨이 물었다.
“집 밖에 꼬맹이는 누구냐?”
이에 마루가 한숨을 푹 내쉬며 답했다.
“온라인 게임의 폐해라고 해 두죠.”
그 아리송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것도 잠시, 존슨이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내 팬이라면서 눈물을 질질 짜기에 싸인도 한 장 해 줬다.”
“...형님을 알아봅디까?”
“어? 당연하지.”
마루가 황당하단 얼굴로 존슨을 바라봤다. 언제나처럼 거지같은 몰골의 거렁뱅이가 눈앞에 서 있었다.
‘저걸 알아봤다고?’
그처럼 순도 높은 빠돌이란 느낌이 왔다.
그와 동시에 상황이 한층 복잡해졌다는 것 역시 직감할 수 있었다.
**
“맙소사!”
임시안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그토록 동경하던 세계적인 영웅과 악수를 한 손이었다.
한동안 이 손은 밀봉하고 다닐 생각이었다.
뿐만 아니라 싸인을 받은 그의 핸드폰 케이스도 따로 진열해 놓으려, 조심스레 포장 중이었다.
‘인디안 존슨이라니...’
너무나도 추레한 몰골이었지만 결코 몰라볼 수 없었다. 진정한 존슨의 팬들은 그의 멀쩡한 모습보다, 엉망인 몰골을 더 사랑했다.
영웅적 행보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세계적인 영웅이 찾아갈 정도의 인물, 그게 바로 정마루라는 C급 A형의 헌터였다.
그 순간 기존 등급은 의미를 잃었다.
“스승님!”
각오가 단단해지는 순간이었다.
**
절대, 결코, 제자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쌍둥이 남매 역시 제자라는 개념 보다, 일종의 실험체적인 의미가 더 강하지 않던가.
특히, 그들은 퍼펙트 플레이라는 게임을 통해 맺고 있는 인연이다 보니, 언제든 끊어낼 수 있는 관계이기도 했다.
하지만 임시안은 전혀 달랐다.
‘현실에서 제자라니.’
안 될 말이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띠리리리...
하지만 한 통의 전화가 그의 생각을 바꿔버렸다.
정다솜!
막내 여동생의 연락이었다.
“어이구, 우리 막둥이가 웬일이야?”
기분 좋게 받았고,
-오빠! 나 각성했어.
고막에 총알이 박히는 경험을 했다.
“...What?”
-헌터, 직업으로 어때?
“...the f...!”
현실판 실험체, 아니 제자가 필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