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 / #23. 기지개.
몬스터 웨이브란, 한 때 인류의 생존을 위협했을 정도로 공포스러운 현상이었다.
대격변의 초창기부터 꾸준히 많은 사상자를 만들었던 만큼, 이제는 DNA 깊숙이 그에 대한 두려움에 새겨졌단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 만큼 모두가 한 마음 한뜻으로 힘을 모아, 최선을 다해 막아야 하는 ‘재난’인 것이다.
이면의 주민들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팔을 걷어붙이며 전장에 뛰어들기 일쑤였다.
숨겨왔던 정의감에 나서는 경우도 많지만, 웨이브를 방치했다간 그들 터전이 줄어들기에, 밥 그릇 지키기 위해 달려드는 경우도 상당했다.
어쨌든 그들도 한 팔 거드는 게 바로 몬스터 웨이브였다.
헌데, 그 현장에서 괴물이 아닌 동료를, 사람의 목숨을 노리는 무리들이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이면의 주민들도 동료여야 할 것이건만, 저들은 철저히 개별적으로 움직이며 살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쓰레기 중의 쓰레기들...”
마루는 몇몇 놈들과 눈을 마주치며 그리 중얼거렸다.
그가 가장 경멸하는 무리들이라 할 수 있었는데, 웨이브를 방치한다는 건, 한마디로 말해서 대규모 재해나 다름없었다.
이 물결이 밖으로 빠져나갈 경우, 무수히 많은 시민들의 목숨이 희생될 것이며, 이후로도 이 부근은 죽음의 땅이 되어, 서서히 마수지대로 돌변하게 될 터였다.
인간의 영토가 그만큼 줄어드는 거라고 봐야 했다. 앞서 언급했던 밥그릇이 위협받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분노가 차올랐다.
‘재활용도 안 될 새끼들!’
그 때문에 분리수거 없이 바로 시궁창에 던져버렸다.
타앙!
이 순간만큼은 자비고 뭐고 없었다.
퍼억...
놀랍도록 정확한 사격 솜씨와 말도 안 되는 파괴력의 조합으로 인해, 달려들던 놈들의 가드를 뚫고 미간을 박살내버렸다.
중후반을 위해 아끼고 있던 G-eye마저 꺼내든 결과였다.
이에 놀란 듯, 몇몇 움찔거리는 이들이 있었다. 주변 가득 넘실대는 몬스터의 광기로 인해,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던 습격자들을 솎아낼 수 있었다.
몬스터들의 광기 때문에 일부 흥분한 감도 있지만, 웨이브 속에서도 뒤통수를 노리는 이들이기에, 오히려 그 분위기에 휩쓸려줬다.
‘짐승은 잡아야지!’
자비 없는 사격이 전장을 갈랐다.
**
그야말로 하늘이 도왔다고 여겼다.
‘웨이브 덕분에 시간을 벌었네.’
카일리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촉박한 일정이라 여기며, 이 와중에도 이런저런 계획을 실행시켜야만 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마루의 암살이었다.
‘이런 상황이니까, 몰래 슥삭 하긴 딱이지.’
난전을 틈탄 암살은 기본 중의 기본이 아니던가.
단지, 웨이브를 이용한다는 게 살짝 걸리긴 했지만, 상황 가릴 처지가 아니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마루 하나쯤은 확실히 처리할 수 있겠지.’
그가 C급의 수준을 넘어선다는 기준을 잡은 채, 과감히 B급 수준의 암살자들을 움직였다.
‘일 시킨 나도 나지만, 넙죽 받아들인 그놈들도 참...’
최악이라 여기면서, 암살 이후도 머릿속으로 그렸다.
‘웨이브까지 방해하는 건 과한 것 같지만.’
비싼 돈 들여서 끌어들인 악질들이었다. 그들의 악의를 맘껏 펼칠 수 있는 판을 깔아줘야 했고, 그게 바로 혜성을 건드리는 거였다.
‘겸사겸사 직접적인 피해도 좀 주면 좋고.’
아쉬운 점이라면, 그 현장을 직접 살필 수 없다는 점이었다.
현재, 그를 비롯한 키홀의 요원들이 대기 중인 장소는 광호 길드가 담당하는 A급 던전 웨이브였다.
적당히 급수를 낮춰서 움직여도 됐지만, 굳이 이곳으로 온 건 저들과의 유대관계를 위한 조치였다. 제아무리 키홀이 유럽에서 잘 나간다지만, 결국 여기는 아시아며 한국이었다.
이곳에선 광호가 규칙이나 다름없었기에, 이 정도 맞춰주는 게 오히려 당연한 거였다.
참고로 몬스터 웨이브를 무시하는 건 생각하지 않았다. 이를 가지고 이런저런 흉계를 꾸미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 현장에는 나와야 했다.
범법자라 불리는 이면의 주민들이, 뭐 이렇게 성실하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나, 사실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불문율!
웨이브에 한해서는 이면의 경계 따위 구분 짓지 않는 절대원칙이 작용하는 것이다.
기왕 참여할 거라면, 광호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웨이브 시작 전 이미 구정국과 만나서 짧게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아쉽게도 길드장은 만날 수 없었다.
‘이 나라의 로열패밀리라고 했었지.’
태호 그룹이라는 거대 기업의 직계 혈통이며, 본인 스스로도 뛰어난 능력자이마 실력자였다. 콧대가 높을만 하다 여겼다.
팀장이라지만 결국 그는 일개 길드원일 뿐이었고, 그 때문에 구정국을 통해서 모든 대화가 이뤄지는 거였다.
제퍼드가 나선다면 길드장도 나오겠지만, 그럴 일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분도 자존심이 어마어마하니까.’
짧게 고개를 저어보인 그가, 슬쩍 주변을 돌아봤다.
하급의 몬스터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는 1차 웨이브가 마무리된 상황, 슬슬 중급 몬스터들이 밖으로 튀어나올 타이밍이기에, 마지막으로 팀원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다.
한줌 아쉬움이라 한다면, 현재 그들 키홀의 무리 속에 제퍼드가 없다는 점이었다.
‘존슨이나 이반나, 둘 중 하나겠지.’
그는 최대 관심사를 찾아 움직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키홀은 길드 내 최강자를 바로 곁에 두고도, 그의 가호 없이 이 험한 웨이브를 견뎌내야 할 터였다.
카일리는 전장에 들어가기 전, 팀원들을 모아놓고 이야기했다.
“위험하다 싶으면 어떻게?”
“튀어!”
“굳!”
바람직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뒤, 전장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2차 웨이브가 시작되고 있었다.
**
몬스터 웨이브? 불문율?
그딴 건 제퍼드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유럽에 있을 때야 길드장인 친형 때문에 반드시 참석했지만, 그곳을 벗어나는 순간 그는 고삐가 풀리는 것이다.
형이자 부모님과 마찬가지만, 길드장의 명령만 딱 수행하는 게 그가 길드를 위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때문에 중국의 사흑련까지 만나고 온 것이 아니던가.
어쨌든 그런 이유로 한국의 몬스터 웨이브를 거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존슨? 이반나?’
오직 단 하나, 그의 관심사만이 우선시 될 뿐이었다.
둘 중 누구에게로 향할까 고민하길 한참, 결국 선택된 건 존슨이었다.
‘지금 이반나를 보면, 바로 죽여 버릴 것 같으니까.’
승부야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이 불편한 심경으로 봤을 때, 주저 없이 달려들 확률이 높았다.
그런 이유로 존슨을 찾아 움직였고, 그러다가 눈에 담아버린 사내가 있었다.
“정마루...그래. 맞아.”
최근 맴도는 소문이 하나 떠올랐다.
‘제로원의 제자라는 이야기가 있었지.’
그게 아니더라도 상당히 가까운 사이라는 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한 달이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겠는가.
츄릅...
갑자기 군침이 도는 기분이었다.
원래 목적은 존슨을 관찰하러 온 것이건만, 어느새 그의 시선은 마루를 쫓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발견해 버렸다.
‘저것?’
갑작스런 암살자의 등장과 그로 인해 드러난 뜻밖의 움직임이 그의 시야를 사로잡았다.
“하...”
웃음이 나와 버렸다.
“...재밌군.”
딱 한 순간이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실력을 속이고 있었다니.’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그의 입 꼬리가 광대까지 쭈욱 올라갔다.
‘존슨의 재주인가?’
내심 기대가 됐다.
‘저걸 망가트리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심장이 뜨겁게 뛰었다.
**
혜성의 김연희가 직접 스카웃한 인재, 거기에다 달인 수준의 건가드 영상, 결정적으로 인디안 존슨과의 특별한 관계까지.
C급 A형 정마루!
그를 관찰하는 시선은 생각 이상으로 많았다.
“호...저게 정말 C급의 건가드라니, 우리 쪽에 교관으로 초청하고 싶군.”
“그나저나 저놈들은 또 뭐야?”
“웨이브 속에서 저런 개수작이라니.”
“하여간에 이면 놈들이란...쯧!”
등등의 반응을 보이면서, 여러 길드의 실력자들이 화제의 중고신인을 관찰 중이었다.
대부분은 화제의 신인이란 관점에서 보고 있다면, 몇몇 눈썰미가 남다른 이들의 경우, 그 이상의 시선으로 마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졌던, 아주 특별한 한 번의 움직임을 캐치한 까닭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들켰겠는데.”
김연희와 이소희 역시 그런 무리들 중 하나였는데, 워낙 짧은 순간인지라, 꾸준히 주시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놓쳐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움직임이었다.
“등급을 속이고 있는 건 확실하네.”
김연희의 말에 이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던전에서 오우거를 상대하던 것 때문에, 마루의 등급을 의심하고 있었기에, 그녀들의 놀람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의심하고 있던 것도 떠올렸다.
“총기류 각성자가 아니거나, 특수 각성자일 확률이 높겠어.”
좀 전의 몸놀림은 분명 강화계의 단련자들이나 보여줄 법한 반응 속도였다. 김연희가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마루 주변을 쭈욱 훑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것보다 저 놈들은 대체 뭐야?”
마루를 자주 살피다 보니 알아챌 수 있던 것으로써, 그를 습격하는 일단의 무리가 눈에 띄었다.
암살 계열의 전문가들인 듯, 주시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눈치 채지 못했을 터였다.
“웨이브에서 저 지랄이라니.”
맘 같아선 당장 뛰쳐나가서 도와주고 싶었지만, 일단 길드와 함께 움직여야하는 위치였고, 추가적으로 마루 혼자서 잘 막아내고 있는 탓에, 나설 필요성이 그리 크진 않아보였다.
게다가 막상 나선다고 해도 잡을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하필이면 최후방이냐.’
일단, 기본적으로 1선과 이곳 후방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전문가들이야.”
그 말에 이소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암살 계열 스킬을 각성했다는 의미로써, 몸을 숨기는 게 너무 능숙했다.
“난전이라서 포스 확인이 어려워. 언니가 보기엔 어때?”
김연희의 남다른 눈도, 이렇게 다양한 포스가 어우러지는 웨이브 속에서는 제대로 된 목표 포착이 어려웠다.
“난전을 잘 이용하네. 나도 순간순간 놓치고 있어.”
제대로 각성한 암살 계열이 분명했다.
만약, 지원을 위해 접근할 경우, 저들은 완전히 발을 빼버릴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난전은 끼어들기는 쉬워도 나오기는 어려운 법인지라, 일단 대기하며 지속적으로 상황을 살필 뿐이었다.
“신입이 잘 버티고 있어서 다행이네.”
만약 마루가 감당하기 어려운 모양새였다면, 앞 뒤 가릴 것 없이 달려들었을 것이나, 누가 봐도 여유가 느껴지는 모습에서, 굳이 끼어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곧 다음 웨이브다.”
이소희의 말에 김연희의 시선이 통로 방향으로 향했다.
1차 웨이브에서 굳어버렸던 통로가 다시금 확장을 하며 크기를 넓혀가는 게 보였다.
중급 몬스터들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였다.
**
2차 웨이브가 시작됐다.
그 때문일까?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마루는 자신을 쫓아오던 살기가 더는 느껴지지 않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전장에 집중할 수 있었다.
‘맘 같아선 싹 쓸어버리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다.
2차 웨이브부터는 중급 몬스터들이 튀어나오는데, 워낙 강건한 놈들이 넘쳐나다 보니, 암살자들도 괜한 위험을 감수하기 보단, 한 걸음 물러나는 걸 선택한 것이다.
언제 또 습격해 올지 모르기에, 완전히 안도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한숨 돌렸다는 게 중요했다.
‘대부분 B급에 A급도 섞여있는 암살자라...누군지 모르겠지만, 돈 깨나 썼겠네.’
처음 그의 뒷덜미를 노렸던 습격자 역시 A급이었다. 암습 특화였던지, 잡히고 난 이후 급격히 힘을 잃어버렸었지만, 분명 예리한 일격이었다.
그 때문일까?
‘...역시 들켰겠지?’
마루는 자신이 생각 이상으로 주목받고 있음을 알았고, 바로 그 부분에서 자신의 실력이 발각됐음을 직감했다.
첫 습격은 그만큼 위협적이었다.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생명의 위기에 본능적으로 본신 능력이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물론, 암습의 특성상 정말 짧은 한 순간이었고, 이를 제대로 알아챈 이는 몇 없겠지만, 마루에게는 바로 그 몇 명이 문제로 작용할 터였다.
등급에 대해, 승급에 대해 의심한 여지를 제공해버린 상황이었다.
짧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슬슬 기지개 좀 펴 볼까?’
그러면서 저 한편의 존슨을 시야에 담았다.
‘변명거리도 충분하고.’
차각...차가락...차각...
권총을 돌리는 손짓이 한층 날렵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