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로그인 더 헌터!
몬스터 웨이브 덕분에 작게나마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참 모자란 게 사실이었다.
애초에 그 시간을 벌기 위해 사용된 장소가 계획과 닿아있는 ‘광호’ 길드의 던전 지대가 아니던가. 그들 관할에서 웨이브가 발생했던 만큼, 광호 역시도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이 계획하고 있는 건 광호와는 무관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광호의 역할을 마냥 무시할 수 없는 만큼, 온전히 시간을 벌었다고 하긴 어려웠다.
그 때문일까?
‘이제 죽었구나.’
카일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제 목을 닦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게 웬일?
“흐흥...흐흐흥...”
웨이브 사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결 기분이 좋아진 그의 모습에서 묘한 여유가 느껴진 것이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화분까지 돌보는 모습에선 의아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잘 해결해 보세요.”
작게나마 여유 시간도 허락되었다.
‘이게, 뭔 일이야?’
일단은 다행이다 싶었다. 어쨌든 당장 목이 붙어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안도하는 한편, 여유가 생긴 틈을 타 지난 웨이브 사태에 대한 복기도 다시 해 보게 되는데, 이는 당시 사건을 통해 광호에게 좀 더 목소리를 내려 했던 계획도 있던 만큼, 여러모로 더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혜성 길드를 제대로 물 먹일 수 있었는데.’
물론, 당시 관할이 광호의 던전이었던 만큼, 웨이브를 막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애초에 웨이브를 뒤집는 건 불가능했지.’
혜성 길드는 이곳 한국에서 손에 꼽히는 세력이었고, 거기에 존슨까지 자리하고 있던 장소였다. 차후 영상으로 봐서 알 수 있었지만, 존슨의 존재감은 절대적이었다.
‘괴물이었지.’
A급 던전 웨이브의 보스 몬스터를 농락하는 영상이란, 다시 봐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전율적이었다.
제퍼드가 그런 괴물과 동일선상에 있다는 걸 깨닫자, 그에 대한 두려움이 한층 더 커지며, 목 언저리가 서늘해짐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변수가 됐던 건, 최초의 목표물이었던 사내였다.
‘정마루의 실력이 그 정도였을 줄이야.’
크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생각과 함께, 나름의 복수를 다짐하게 만들었다. 계획이 성공했다면 제퍼드에게도 면이 살기에, 명줄은 연장시킬 명분이 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시간은 벌었으니까.’
다행히도 그와 무관하게 상황이 풀린 듯하여, 크게 안도할 수 있었다.
앞서 촉박한 상황 속에서 발악을 한 덕분인지, 상당부분 진행이 되어 있었고, 덕분에 이젠 오히려 여유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일 뿐, 정말로 한 숨 돌리려 했다가는 영원히 호흡을 돌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상황이 맞아 떨어진다고 해야 할까?
‘혜성 길드도 내부적으로 좀 복잡해 보이고, 지금 시기에 작업 걸긴 딱이지.’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혜성은 현재 외부를 제대로 살필 겨를이 없어보였다.
짐작건대 지난 웨이브 사태에서 별다른 이득을 보지 못했던 게, 그들 내부를 소란스럽게 만든 게 아닐까 싶은, 개인적인 추측을 해 볼 뿐이었다.
최근의 사건이라 한다면, 그 정도밖에 없기 때문에 가장 가능성이 높기도 했다.
‘일이 풀리려 하니, 또 이렇게 풀리네.’
막힐 땐 완전히 꽉 막혀서 골머리를 썩이더니, 한 번 해결되고 나니 그야말로 순탄대로였다.
* * *
“끄응...끙...으음...”
마루는 연신 앓는 소리를 하며 침대에 누워있었다. 존슨과의 대련으로 인해 발생한 후유증으로써, 정말 무자비하게 그를 두드려 팬 까닭이었다.
현재 몸 상태가 어느 정도인고 하니,
[컨디션 : 4]
최악이었다.
언제 습격자가 쳐들어올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곤죽을 만들어 놔도 되냐고 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문제가 아니었다.
[이거 하나면 깔끔히 해결 돼!]
대련을 시작하기 전 존슨이 보여줬던 건, 현실 속 포션이라고 불리는 기적의 물약이었다.
그 중에서도 최상급의 물건으로써, 존슨도 아주 급박한 상황에서만 사용하는 희귀품이라 했다.
특히, 더 고가로 거래되는 이유라 한다면, 이게 사람들의 손에서 제작된 게 아닌, 던전에서 나온 특수 아이템인 까닭이었다.
게임 속 포션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아니 어쩌면 더 대단할 만큼 뛰어난 물건이었다.
지니고 있다가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그 때 넘기면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게 아니더라도 거처 주변에 쫙 깔아놓은 경계망을 생각한다면, 이 와중에도 제 한 몸을 피해낼 자신이 있긴 했다.
게다가 레베카의 존재까지 상기한다면, 사실 이 물약을 받을 이유는 없었지만, 어쨌든 주는 거니까 받아놓고 봤다.
공짜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게다가 최고 중에서도 최고인 탓에, 목구멍에 넘기는 즉시 모든 고통에서 해방된다고 하는데, 그걸 보고 있노라면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팔면 얼마나 할까?’
불순한 욕심이 자꾸 생기는 탓에 시야에서 치워버려야 했고, 그렇게 아공간 깊숙이 처박혔다.
“으으...그래도 마지막 1할은 남겼네.”
존슨과의 대결에서 비장의 카드를 꺼내긴 했지만, 전부 내비친 건 아니었다.
[태세전환 - 울프]
오직 그 하나만 선보인 것인데, 모든 전환기를 전부 사용했다가는 4가지 색의 아우라를 전부 보일 수 있었고, 자칫 PP와의 연관성을 들킬 수도 있는 까닭이었다.
‘싸가지 있는 놈, 이건 너무 유명하니까.’
태세전환은 별명 중 하나로써, 4가지 아우라를 돌려가며 내비치는 탓에 생겨난 별명이었다.
4가지 - 사가지 - 싸가지
대충, 이런 식의 발상으로 볼 수 있었다.
몽크의 대표적 스킬 중 하나이기도 한 탓에, 이래저래 전부를 내비치는 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어차피 근접 박투가 아니던가.
“울프 하나면 충분하지.”
터틀의 방어력과 버드의 회복력이 좀 아쉽기는 하지만, 순수 체술만 놓고 본다면, 울프만으로도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염력 계열의 스킨은 굳이 언급할 이유가 없었다.
‘근접전에 장풍 쓸 일은, 별로...’
그런 이유로 대충 1할 가량은 숨겼다고 여겼다. 애초에 그의 근간이 근접전이니 만큼, 어쩌면 1할보다 작을지도 모르지만, 연계기로 인한 전환의 부가 효과를 생각한다면, 1할로 맞춰도 될 듯싶었다.
‘으으...좀 더 했으면, 정말 작살이 났을지도 모르겠네.’
이반나의 데이트 연락 덕분에 살았다며, 마음 속 깊이 그녀에게 감사인사를 올렸을 정도였다.
몸살 나게 두드려 맞기만 한 대련이었지만, 그래도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구경하면서 얻는 것도 상당했는데, 역시 몸으로 부딪치는 게 최고구나.’
직접 겪으니 눈으로만 봐선 알 수 없던 것들을 느낄 수 있었고, 덕분에 당시 상황을 더욱 상세히 복기할 수도 있었다.
당장 이 고통을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했다.
PP에 접속하면 되는 것인데, 굳이 그렇게 하지 않은 채 통증은 온몸으로 만끽하는 이유가 뭘까?
‘복기하는데 도움이 되니까.’
두 눈을 감고 가만히 이를 되새기고 있노라면, 타격 부위의 통증이 생생히 느껴졌고, 대련의 현장감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걸 느꼈다.
이를 뇌리에 온전히 박아 넣기 전까진, PP로 피난을 갈 생각이 없었다.
“끄응...흐윽...으윽...”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입 꼬리가 살살 올라가는 건, 복기 과정에서 밀려드는 깨달음과 그로 인한 묘한 쾌감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 몰골은 상당히 기괴해, 만약 누군가가 봤더라면 분명 질색을 할 모습이었다.
‘으음...’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누군가가 봐버렸다.
‘어째, 모습이...실수했나?’
레베카는 마루의 상태가 워낙 안 좋아서, 따로 챙겨줄 거라도 없나 싶어서 몰래 찾아왔다가, 왔던 것처럼 조용히 빠져나와야만 했다.
* * *
마루가 본격적으로 기세를 드러내고, 감춰진 3할을 내비친다고 여길 즈음, 존슨은 앞서의 격돌과 새롭게 비쳐지는 액션 속에서, 당혹스럽게도 한 얼굴을 떠올려버렸다.
존 실버!
퍼펙트 플레이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개발자로써, 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WHA의 초대 협회장이자 세계적인 영웅인 마르코 더글라스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와 관련된 대부분의 정보에는 최상급의 락이 걸려 있었는데, 이는 협회장 사후 2대 회장 무렵에는 더욱 철저해졌고, 3대로 넘어갈 즈음엔 어쩐 일인지 그 대부분이 파기되면서, 이제는 제대로 알 길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오로지 아는 이들의 기억 속에만 그 정보가 살아있을 뿐인데,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인디안 존슨은 바로 그 소수의 몇 몇 중 한명이었다.
워낙 오래 전에 흔적이 사라져버린 탓에, 이제는 거의 잊혀져버렸다고 여긴 얼굴이건만, 그의 얼굴이 너무도 선명하게 떠오르며, 망막에 잔상처럼 맺힌 것이다.
그리고 몇 차례 더 대련이 이어지고, 드디어 마루의 반격이 시작될 즈음, 그는 갑자기 실버가 생각난 이유를 깨달았다.
‘스킬?’
마루의 동작 속에서 느껴지는 그의 흔적.
‘퍼펙트 플레이!’
기겁하게 만드는 현상이었다.
게임 속 숨겨진 비밀을 일정부분 알고 있기에, 더더욱 마루의 몸짓에 담긴 세세한 변화와 의미 등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가능한 일이었어?’
존 실버 박사가 꿈처럼 이야기하던 게 떠올랐다.
[PP는 각성자의 새로운 미래가 될 거야!]
두 눈을 몽롱하게 물들인 채, 꿈을 꾸듯이 이야기하던 그 모습이 너무도 선명했다.
그렇게 한 번 기억을 하기 시작하니, 그 모든 것들이 생생히 그려지면서, 실버가 했던 망상들이 하나 둘 리플레이 되기 시작했다.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일정 부분은 받아들인 점도 있었다.
긴 세월동안 PP를 통해서 깨우친 것도 상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루는 그가 상상하던 걸 훌쩍 뛰어넘는 수준으로,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현실로 끌어와 버린 듯 보였다.
몸짓 하나 숨결 하나, 그 모든 동작 하나하나에 은은하게 묻어있는 PP의 흔적들에 전율했다.
깨닫고 보니 말 그대로 PP의 결정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궁금증이 치솟았지만, 차마 물을 수는 없었다.
현무의 신물을 비롯하여 그의 품 안에 있는 신물까지, 마루에게는 알 수 없는 비밀이 있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기로 한 상태였다.
직감적으로 마루의 몸짓에 담긴 의미도 비밀과 연관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때문에 호기심은 애써 삼켜내야만 했다.
물론, 관련해서 이반나와 상의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녀도 실버 박사에 대해서 일정부분 알고 있는 관계인 까닭인데, 최초 인연은 존슨 덕분에 이어졌다.
[마이 달링입니다!]
그렇게 소개했다가 실버 박사가 보는 앞에서 복날 개처럼 쳐 맞았고, 실버 박사는 박장대소하며 그녀를 초대했다.
이 날을 기점으로 이어진 친분 덕분에, 이반나 역시 어느 정도는 박사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지금 알려진 것만 해도 말도 안 되는 거긴 한데, 거기서 더 말이 안 되는 게 현실화 한다고?”
당장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들만 늘어놔도 어마어마했다.
현실의 몬스터들을 게임 속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거, 그리고 이를 통해 가상공간에서 훈련을 한다는 점, 완벽한 가상현실이라는 점은 제외하더라도, 당장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것만 해도 상당했다.
PP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격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등장 이전과 이후, 헌터업계가 겪어온 변화만 봐도 충분히 증명 가능한 부분이었다.
던전이나 마수지대 등의 경험이 부족한 헌터들의 경우, PP를 통해서 모의 훈련을 하며 어설프게나마 실전 감각을 쌓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 덕분에 초심자들의 현장 생존률이 대폭 상승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들을 비롯한 여러 랭커들은 게임 내에 숨겨진 또 다른 요소들도 발견하며, 은연중에 실버 박사의 대단함을 칭송하기도 했다.
당장 알려진 것과 비밀스럽게 알려진 것들, 이것만으로도 PP는 이미 놀라운 가치가 있는 게임이었다.
그런데, 만약 거기서 더 나아갈 수 있다면?
“실버 박사의 이상향이 그대로 실현될 수 있다면...”
존슨은 말끝을 흐렸고, 그 뒷내용은 이반나가 받아줬다.
“세계는 또 다른 대격변을 맞이하게 되겠지.”
두 사람은 언제고 실버 박사가 이상향을 언급하며, 망상처럼 입에 담았던 외침이 떠올랐다.
[로그인 더 헌터!]
지금 이 순간, 마치 환청마냥 너무도 생생하게 그들 귓전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