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정수.
PP의 귀염둥이이자 마스코트이며 길잡이로 통하는 존재.
요정!
그 존재가치는 1차 전직이 지나면 급격히 떨어진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2차 전직과 함께 요정들 역시 새로운 기능을 각성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바로,
-오늘은 루미의 만물상을 이용해 주실 거죠?
걸어 다니는 ‘이동 마켓’이었다.
“안 사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루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기능이기도 했다.
-히잉...불쌍한 루미를 위해, 제발 하나만 사 주세욥!
“일반 상점가보다 2배는 비싼 걸, 내가 왜?”
이유인 즉, 너무 비쌌다.
“제일 싼 것도 쩜오는 더 나가잖아. 게다가 그런 건 죄다 하급 포션이나 저레벨 구간용인데, 내가 살 이유가 없지.”
하지만 장기 퀘스트나 사냥 등으로 필드를 벗어나지 않는 이들에게 있어, 요정들의 이동 마켓은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퀘스트의 클리어 여부가 요정들의 상점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과거, 마루 역시 장기 퀘스트를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피눈물을 삼키며 루미의 상점을 이용하고는 했다.
-이잇! 이 구두쇠. 못 됐어!
루미가 이처럼 발끈하는 이유가 뭘까?
“왜? 너한테 떨어지는 수수료를 못 챙겨서 아쉬워?”
-히잉...나도 멋지고 예쁜 드레스 좀 입고 싶은데.
마루가 루미의 상점창을 이용할 경우, 따로 커미션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인데, 이를 통해서 각종 아바타를 구입해, 루미 나름의 패션쇼를 하는 게 꿈이었다.
이전에도 가끔씩 이용되는 상점창의 수수료를 한푼 두푼 모아, 어렵사리 드레스를 하나씩 장만해 왔었는데, 하지만 이게 웬일?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발생해 버렸으니, 마루의 이전 캐릭터가 사라지면서, 루미의 드레스 룸도 봉인되어 버린 것이다.
마루의 레벨이 이전 캐릭과 동일시되기 전까진, 과거에 구입한 드레스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었다.
그렇게 워낙 짠돌이 주인을 만나버린 탓에, 꿈은 그저 꿈으로만 남아버렸다는 게, 이 전설의 슬픈 결말이었다.
-흑흑흑...
언뜻 우는 듯 보였지만, 손가락에 침을 묻혀 눈가를 적시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이를 무시하며 아이템 정리를 위해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 순간 초롱이가 밖으로 튀어나오며 외쳤다.
-사탕~! 사탕~!”
-꺅! 초롱이다.
-히익!
아무래도 루미가 있는 걸 몰랐던 모양인지, 뒤늦게 놀라며 다급히 도주로를 살피지만, 그 때는 이미 루미에게 덜미를 잡힌 뒤였다.
-누나 너무 슬퍼. 초롱이가 위로해 줘. 흑흑...
어찌나 열심히 침을 발랐는지, 정말 눈 주변이 촉촉했다. 그 모습에 속아 넘어간 듯, 초롱이가 당황한 얼굴로 도주를 멈추고 주춤거리더니, 이내 걱정스레 물어왔다.
-누...누나도 사탕 먹을래?
어찌나 들들 볶였던지, 이젠 알아서 누나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사탕?
루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이에 초롱이가 마루를 향해 외쳤다.
-건물주! 사탕, 사탕 보여줘.
“맡겨놨냐?”
마루는 그리 묻다가 생각했다.
‘맡겨놓은 게 맞나?’
-사-탕! 사-탕!
-사~탕! 사~탕!
저 단어가 꼭 ‘사탄’처럼 들리는 건 착각일까?
초롱이에 이어서 루미까지 재촉을 하며 시끄럽게 굴어대니, 아리송한 의문은 일단 뒤로 한 채, 현무의 신물 흑화한단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헤헤! 어때? 맛있게 생겼지?
그 말에 마루는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돌하르방이?’
이리보고 저리 봐도 돌이었다.
헌데, 루미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마...맛있겠다아~!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원하는 눈치였다. 이에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아니, 이게 뭔 줄 알고?”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건만, 연달아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당연히 알죠.
“...안다고?”
해서 그에 대해 물으니,
-왕의 정수잖아요.
“왕?”
-정령왕이요.
3연타였다.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벙벙한 얼굴로 루미를 보고 있노라니, 이 자그마한 요정은 안달하는 눈치로 슬며시 물어왔다.
-하...한 번, 아니 두 번만 씹어보면 안 되나요?
그게 또 황당했다.
‘초롱이야 저걸로 성장이라도 한다지만...’
루미가 저러는 이유가 뭘까?
그 이유가 황당했다.
-당연히 성장을 위해서죠.
이렇게 4연타가 이어졌다.
“너도?”
눈을 동그랗게 뜨니, 루미의 시선이 초롱이에게로 향했다가 떨어졌다. 마루의 반응에서 초롱이가 효과를 보고 있음을 읽은 것이리라.
루미의 성장이란 어떤 것일까?
문득,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 이상으로 드는 의문도 있었다.
성장시킬 필요가 있나?
초롱이 같은 경우에는 일단 현실에서도 도움이 될 거란 확신이 있고, 여의주에 숨겨진 이런저런 정보들의 락을 풀기 위해서라도, 그 성장에 남다른 의미가 있다지만, 루미는 오직 게임 속 존재이지 않던가.
다채롭게 변화하는 마루의 눈빛 속에서, 그 복잡한 심경을 일부 읽어낸 듯, 루미가 다급하게 외쳤다.
-저...저도 성장하면 도움이 될 거에요.
“어떻게?”
한참 궁리하던 루미가 가까스로 쓸 만한 내용을 하나 꺼내들었다.
-저도 공격이 가능할 걸요?
의문으로 끝나는 게 의심스러웠지만, 어쨌든 5연타가 휘둘러진 건 확실했다.
“네가?”
마루의 눈이 제 자리를 찾을 틈도 없이, 연달아 동글동글 원형을 그렸다.
-아...아마도요?
“삐-! 감점. 불안정한 음성, 낮은 옥타브, 진실성이 50프로 깎였어.”
-아니, 그게...이 부분이 약간 락이 걸려있어서, 저도 확답을 하기가 어렵단 말이에요.
“약간?”
-애매한 것들은 락도 좀 애매하게 걸려있어요. 어쨌든 분명 주인님께 도움이 될 걸요. 그러니까...저...저도 쬐끔만...헤헤!
루미가 애교를 부렸고, 그 곁으로 초롱이도 합세했다.
-건물주 내가 허락하겠다. 이 누나 불쌍하다. 두 번만 맛보게 해 주자. 나는 세 번으로 만족하겠다.
“넌 원래 세 번만 줄 생각이었어.”
-으으...안 넘어가네.
초롱이의 잔머리를 격침시키고 고민하길 한참, 결국 결정을 내렸다.
“좋아! 일단 한 번 맛 좀 보자.”
그렇게 기대감 어린 얼굴로 루미의 성장을 기다리는데, 이게 웬일?
-헤헤...겨우 두 번 가지곤 안 되나 봐요.
당했다는 느낌이 팍 들었다.
그와 동시에 두 번 정도가 아닌, 그 배의 배는 더 맛보게 해 줘야 한다는 느낌도 빡 왔다.
-기왕 시작한 거 끝은 봐야죠. 헤헤! 오늘은 두 번이 한계라서, 나중에 또 기대할게요. 뿅!
그러며 후다닥 도망치듯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 역시 충격이라면 충격이라서, 6연타로 마루를 실신시켜버렸다.
“허...”
꼬맹이한테 당했다는 생각 때문일까?
하늘이 노랬다.
‘아...노을이구나.’
해가 지고 있었다.
* * *
어쩌다 보니 제자로 받아버린 임시안의 여동생, 라시아와는 게임 속에서 종종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친화력이 남다른 라시아 덕분에 이뤄지는 관계이긴 하나, 어쨌든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는 건 사실이었는데, 과거에 나눴던 대화 대부분이 게임 내부의 공략법에 관한 대화였다면, 최근에는 화제의 대상이 크게 바뀐 상황이었다.
게임이 아닌 현실적인 부분으로 대화가 옮겨간 것인데, 그 중심에 있는 건 그들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는 존재, 임시안이었다.
“오빠는 잘 하고 있어요?”
라시아의 물음에 마루가 실소했다. 아닌 듯 연기하지만 제 오라비는 걱정하는 눈치가 제법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럴 법도 했다.
‘곤죽을 만들어 놨었지.’
존슨에게 당한 게 억울해서 화풀이를 한 게 아니다. 정말이다. 그렇게 최면을 걸어대며, 이야기했다.
“원래 초반부가 빡센 거야. 기초 체력을 잘 쌓아놔야, 현장의 생존력이 늘어나는 법이니까.”
실제로 임시안의 수련 중 대부분은 체력 단련으로 보내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틈틈이 건가드의 기본동작이나 몇몇 이론 교육이 병행될 뿐이었다.
어쩌다 보니 동기나 다름없이 그의 교육부에 입학한 막둥이 정다솜의 경우, 각성이라는 특수 케이스다 보니, 체력 단련에 좀 더 여유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런 이유로 임시안만 죽어나는 중이었다.
“그래서...가능성은 좀 보여요?”
라시아의 물음에 마루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어버렸다.
“엉망이지.”
슬쩍 울상이 되는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막둥이 정다솜이 떠올랐다. 제 오라비를 걱정하는 마음과 얼굴이란, 대개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저 마음이 왠지 와 닿아서, 소녀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약간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려줬다.
“뭐, 나보다는 괜찮은 스타트니까. 아주 최악은 아니야. 어쨌든 쓸데없이 시간 허비할 일은 없으니까.”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경우에는 아카데미에 떨어지고 난 뒤, 과감히 몬스터 부대에 입대했고, 그렇게 2년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던가.
솔직히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공부란, 밖에서 반년이면 해결할 수 있는 부분들이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뭐로 채운 것일까?
‘사체 처리법 따위...킁!’
헌팅과는 무관한 능력이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도축 하나는 수준급이 됐고, 지금에 이르러선 달인경지에 이르렀지만, 굳이 이 정도 수준까지 이를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물론, 말과는 달리 임시안에게도 도축수업을 할 생각이었다.
‘여차하면 밥벌이는 있어야지.’
만에 하나의 사태까지 고려하는 것, 그게 진정한 스승 아니겠는가.
‘암암!’
고개를 끄덕이며 내심 자화자찬을 하고 있노라니, 라시아가 슬며시 물어왔다.
“혼자 뭐 해요?”
민망함에 적당히 대화를 끝냈다.
“크흠! 내가 약속이 있어서, 더 궁금한 거 없으면 이만 빠이빠이 하자.”
물론, 라시아는 쉽게 놓아주지 않았고, 결국 파르페를 비롯한 몇몇 간식거리를 더 사주고, 제 오라비에 대한 이야기도 좀 더 풀어낸 뒤에야 해방될 수 있었다.
* * *
쌍둥이 남매는 문득 깨달았다.
“이거 이러다가...”
“우리 곧, A급 되는 거 아니야?”
“아깝다. 1년만 빨랐으면, 우리도 여제 언니처럼 20대 A급인데.”
마루에게 배우는 가르침이 그들로 하여금 나날이 성장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던 것이다.
“구현동화 효과 끝내준다!”
임지현의 감탄성에 임수현이 태클을 걸었다.
“스킬이겠지.”
“그거나 이거나.”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젓는 동생의 모습에, 냅다 달려들어서 한 차례 투닥거리던 것도 잠시, 약속시간이 다가옴에 따라서 자세를 바로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잠시 후, 그들이 기다리던 인물, 마루가 등장했다.
“그동안 뭐가 또 얼마나 변했는지 한 번 알아볼까?”
시작부터 본론으로 들어가는 그의 모습에, 임지현이 활짝 웃으며 지난 과정이나 변화들을 일일이 입에 담았다.
“스킬의 발동 시간도 줄어들고, 포스 소모량도 팍 깎였어요. 이제는 초기에 비해서 반절 가량은 당겨진 것 같더라구요. 솔직히 요즘 기분이면, 굳이 특수 장비를 안 입어도 기존 전력에 비빌 수 있을 것 같아요. 게다가...”
따발총처럼 다다다다 밀어 붙이는 누이의 모습에 임수현이 쓰게 웃어버렸다.
마루에게 흠뻑 빠져있는 걸 알기 때문인데, 최근 들어서 거기에 묘한 변화가 발생했음을 느끼는 중이었다.
‘저쪽이 너무 철벽이니.’
Love라는 건 변함없지만, 그 부분이 약간 노선을 달리하고 있다고 봐야 할까?
따로 마루와 현실적인 만남 및 약속을 정한다거나, 게임 속에서 오붓한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았음에, 점차적으로 ‘연애’에서 ‘연예’로 변해가고 있던 것이다.
마치, 동경에서 팬심 쪽으로 번져가는 느낌이었다. 일찌감치 그런 흐름을 포착했기에,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구도였지만, 그래도 이런 현상을 눈앞에서 직접 목도하는 건,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미우나 고우나 남매가 아니던가.
특히, 쌍둥이로써 평생을 함께 해 온 사이다 보니, 입맛이 쓰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중에 치킨이나 한 마리 쏘지 뭐...’
지난 변화를 전부 전해 듣고 난 뒤, 마루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슬슬, 현실에서도 볼 때가 됐지?”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프라인 만남을 제안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임지현의 환호성이 남달랐다.
“꺄아아아아악! 정말요? 정말, 밖에서 만나 주시는 거예요? 어디서 만날까요? 몇 시에? 식사는 어떻게 하실 거죠? 술도 한 잔?”
어찌나 뜨거운 반응이었던지, 말을 꺼냈던 마루만이 아니라, 제 누이에게 익숙하다 자부하던 임수현 마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일단 진정하고, 스킬 때문에 만나는 거긴 한데, 식사라...그래. 한 끼 정도는 쏴도 되겠지.”
마루는 이번 웨이브 사태로 돈 깨나 만진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들 남매는 그의 불순한 의도를 모른 채, 순수하게 실험체가 되어주고 있지 않던가.
나름 그들의 안전을 배려해서, 이리저리 궁리하고 고려한 뒤에야 스킬 목록을 뽑아온다지만, 그래도 기본 의도가 순수하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밖에서 만나는 것 역시도 그런 과정의 연장이지 않던가. 그런 이유로 밥 한 끼 정도는 먹여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꺅~!!”
“오오!”
이번만큼은 임수현 역시 제법 감정을 드러내며 환호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마루는 생각했다.
‘간만에 솜씨 좀 발휘해 볼까?’
쌍둥이들이 고급스런 외식을 상상할 때, 마루는 야생의 피크닉을 계획하고 있었다.
* * *
카일리는 드디어 계획의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살았다!’
그 덕분에 안도할 수 있었다.
적어도 제퍼드 앞에서 목을 씻어낼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철저하게 준비를 한 만큼, 성사 여부도 나름 자신이 있었다. 이를 위해서 광호의 구정국 역시 최선을 다해 지원하지 않았던가.
이제 남은 건 하나 뿐이었다.
“시기만 잡으면 되는 건가.”
물고기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이전의 제퍼드였다면 그로 하여금 몰이사냥을 하라며, 억지로 모이게 만들었겠지만, 일부분 여유가 생긴 덕분일까?
[시간을 드린 만큼 확실히 할 거라 믿겠어요.]
혹시, 이게 채찍과 당근 작전인가 싶을 정도로, 자비를 베풀어주고 있었는데, 어쨌든 그로 인해서 괜히 무리하다가 계획에 차질이 생길 일은 없어보였다.
‘광호에서 연락이 오기만 기다리면 되겠군.’
그 때문인지 자꾸만 폰에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