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1년.
#15. 1년.
계획은 나쁘지 않았다.
승급 던전이란 굴속으로 미끼들을 몰아넣은 뒤, 설계도에 따라 목표물들을 사로잡는 것이다.
그 와중에 ‘몬스터 버블’이란 대괴수용 환각제를 사용해서, 던전 내부의 상위종들을 몰아넣은 뒤, 목표물들의 힘을 빼놓는 것까지, 계획은 완벽했다.
마무리를 위한 이면의 실력자들도 잔뜩 마련되어 있었고, 만에 하나 발생할지 모를 변수를 통제하기 위해. 무려 이면의 랭커인 핌프까지 초빙했다.
하지만 이게 웬일?
말도 안 되는 변수가 연달아 발생하는데, 그 첫째가 한국에선 절대 볼 수 없을 거라 여겼던 미국의 3번째 히어로, 피닉스 이선의 등장이었다.
그리고 소소하게 두 번째라 한다면, 혜성 특수 1팀의 팀워크를 비롯한 실력이 예상보다 뛰어나단 점이었다.
대량의 레이드급 몬스터들을 풀었건만, 그 속에서 단 한 명의 피해도 없이 살아남을 줄이야.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각 저격 포인트로 보냈던 요원들도 소식이 끊긴 게 불안했는데, 짐작건대 전부 타깃을 확보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아 보였다.
그리고 세 번째 변수라 한다면?
생각지도 못한 초인의 등장이라 할 것이다.
이선희!
잔뜩 준비해 놨던 이면의 문제아들이건만, 시작부터 기가 죽게 만드는 변수로 작용하며, 판을 크게 흔들어 버린 것이다.
다행이라면 뒤집을 정도까진 아니었단 점이었다.
“할 수 있다!”
“초인 그까이꺼, 별거 없어!”
“다 됐어. 밀어붙여. 푸시해 푸시!”
개중 목소리가 가장 큰 라브라의 외침에 맞춰, 차륜전 형식으로 이선희를 중심으로 빙빙 돌면서, 포위망을 새롭게 채워 가며 격돌을 이어 갔다.
이러한 연계가 가능한 건, 이선희가 벽을 넘은 지 얼마 안 돼서 미숙한 탓도 있지만, 포위망을 구축한 이들이 이면에서 제법 알아주는 실력자라는 부분도 적잖은 작용을 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꾸준한 피해가 발생하는 탓에, 점차적으로 포위망의 빈틈이 늘어 가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대감을 놓치지 않았다.
바로 특수 1팀의 팀원들의 기세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까닭이었다. 겨우겨우 버티는 수준이던 그들이건만, 결국 한계가 찾아온 듯, 하나둘 무릎 꿇는 이들이 발생했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남은 이들이 더욱 무리를 하니, 그들의 방진이 무너지는 것도 머지않은 듯싶었다.
이들만 제압한다면?
‘여제도 잡을 수 있다!’
그 같은 희망으로 이선희와 차륜전을 펼치는 한편, 집요하게 특수 1팀을 몰아붙이는데, 이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변수는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걸.
“동작 그만!”
마치, 천둥성이 치는 듯, 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는 음성과 함께, 유성처럼 떨어져 내린 존재가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등장과 함께 땅거죽을 한바탕 뒤집으며 흙먼지를 잔뜩 만드는데, 이면의 문제아들은 흙먼지 사이로 솟아오른 뿔을 보며 전율했다.
‘죽었다!’
‘Holy Shit!’
‘fuck….’
‘Oh my gosh!’
일제히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성난 뿔곰 이반나!
그 이명을 연상시키듯, 머리 위로 한껏 성난 뿔들이 솟아 있는 게 보였다.
이선희 한 명 때문에 골머리가 깨질 지경이건만, 거기에 한층 더 사나운 초월자가 합류한다?
툭… 쿵… 쿠웅… 탱그렁….
병장기를 내던지며 백기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등을 보이며 달아나는 이들도 상당했는데, 이반나는 이들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전력을 발휘하자, 마치 한겨울 서리라도 맞은 듯 코끝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데, 이는 그녀의 스킬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스킬 : 루돌프 사슴코]
좀 웃기는 이름이지만 이마저도 진화를 거쳐 이뤄진 스킬명이었다. 이전의 스킬명이 [꽃사슴]이라는 점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게 함정이긴 했다.
“후아….”
그녀의 등장 덕분일까?
김연희를 비롯한 특수 1팀의 팀원들이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바닥에 너부러졌다. 그 곁으로 이선희가 다가와 자세를 잡으니, 만에 하나의 사태마저도 완벽히 차단할 수 있었다.
항복을 하면서도 ‘혹시?’ 하는 기회를 노리던 몇몇 이면의 주민들이 있었지만, 이선희의 싸늘한 눈빛에 직격당한 뒤, 조용히 눈을 내리깔아야만 했다.
잠시 후, 뒷정리를 마치고 온 이반나가 이들을 완벽히 격침시키는 이야기마저 꺼내 드는데, 그 내용이 실로 놀라웠다.
“존슨이 먼저 왔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다른 방향으로 샜나 보네.”
이면 주민들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됐다.
‘제로 원까지 왔다고?’
‘키홀은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뭐가 이렇게 엉망인데?’
‘빌어먹을!’
망했다는 생각만 가득 들 뿐이었다.
“그나저나… 저쪽은 아주 화려한데?”
슬쩍 말끝을 흐린 이반나가 조심스레 이선희의 눈치를 봤다. 저 멀리 여전히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불길을 본 까닭이었다.
‘결국 앞으로 나섰구나.’
그녀는 이선의 방한을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이선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와의 관계는 정리를 끝낸 그녀와 달리, 이선희는 여전히 뒷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못한 상황이 아니던가.
특히, 어중간하게 썸만 타던 그녀와 달리, 이선과 이선희는 분명히 서로의 마음을 내비치며 썸 그 이상의 관계로까지 발을 내디뎠던 것으로 기억했다.
‘유령처럼 왔다가 귀신처럼 갈 줄 알았더니.’
괜히 눈치가 보인 탓인지, 이반나는 이선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조용히 속으로 욕설만 퍼부어 줄 뿐이었다.
‘그나저나… 이 작자는 어딜 간 거야?’
이반나는 존슨을 떠올리다가 이내 특수 1팀에 없는 얼굴들을 상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던지 뭔지, 그놈 때문에 샛길로 빠진 건가.’
정확히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어느 방향에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좀 전, 초인의 감각을 쑤시며 날아들었던 아찔한 파동을 느꼈고, 그 안에 깃들어있는 존슨의 향수를 맡았기 때문이다.
‘대체 얼마만큼 괴물이 된 건지.’
새삼스레 기쁘면서도 우울한, 그런 복잡한 감정이 어지럽게 교차됐다.
* * *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하… 당신은 정말… 어디까지 괴물인 겁니까?”
제퍼드는 허탈한 음성으로 전방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에 존슨이 특유의 호쾌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주변에서 세계 최강이니 뭐니 말이 많던데, 솔직히 요즘은 나도 좀 그런 느낌이긴 해. 하하!”
그 모습에 제퍼드는 결국 고개를 저어 버렸다.
“따라잡았다고 여겼는데, 여전히 아득했을 줄이야.”
그러며 고개를 돌려 마루를 바라봤다.
“당신도 그렇고 저 동생이란 자도, 죄다 괴물이었네요.”
“마이 브라더잖아.”
존슨의 대답에 제퍼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대지의 기운으로 겨우 형상을 유지하고 있지만, 점차 그 흐름이 끊기면서 한계가 가까워졌다.
이에 그가 쓰게 웃는가 싶더니, 마지막 힘을 모아 유언을 남겼다.
“Fuck…!”
가운데 손가락을 세운 채, 그렇게 먼지가 되어 흩어져 버리는 모습에, 존슨이 멍한 모습으로 마루를 돌아봤다.
“나 지금 엿 먹은 거냐?”
이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찐하게 묵었네. 이건 반사도 불가능한데. 막타 오졌다.”
“이런, 씨발!”
노발대발하는 존슨을 뒤로한 채, 마루는 그제야 벌러덩 드러누우며 완전히 긴장을 풀 수 있었다.
한참 욕으로 랩을 하던 존슨이 슬쩍 그의 모습을 돌아봤다.
‘괴물이라….’
제퍼드가 했던 마지막 말이 떠오른 것이다.
그도 동감하는 바였다.
바르다 길드의 요원들을 통해 혜성의 사냥터를 알아냈고, 그렇게 목적지에 다다를 즈음, 예리하게 감각의 날을 세우며 제퍼드의 흔적을 쫓았다.
어렵사리 그 기척을 잡아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도망만 잘 쳐도 충분하겠다 싶었더니, 역으로 도망을 시킬 줄이야.’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대련 중에 적어도 90% 이상은 끌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 와중에도 2~30%의 여력을 남겨두고 있던 건가.’
물론, 마루 입장에서는 전력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지 ‘근접 박투’에 제한을 뒀을 때의 전력이라는 게 함정이었지만, 어쨌든 존슨이 9할 전력이라 착각할 만한 상황이기는 했다.
‘이제 겨우 1년인가.’
마루의 각성 시기가 대략 그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더더욱 놀랍기만 할 따름이었다.
‘1년 뒤에는 또 어떤 모습일까?’
기대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핌프와 피닉스!
그 둘의 격돌도 어느새 막바지에 이르렀다.
“허억… 헉… 허억….”
트라비오는 한껏 지친 몰골로 바닥에 한쪽 무릎을 찍어 버린 채, 여전히 화려한 불꽃을 피워 내는 이선을 바라봤다.
그 역시 상당히 지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 그보다는 여력이 남아 있어 보였다.
‘젠장!’
일찌감치 패배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가 싶더니, 결국 이런 상황까지 다다른 것이다.
‘미국의 히어로 순위는 세 번째지만, 실력은 첫 번째일 거란 말이 많더니. 그게 헛소리가 아니었나.’
그가 순수 미국계 혈통이 아니라서, 그 순번이 밀린다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손에 꼽힌다는 점에서, 그 실력을 이미 증명한 거나 마찬가지긴 했다.
‘하… 굴욕적이군.’
이를 악물며 구겨진 무릎을 펴 보는데, 이미 바닥을 드러낸 체력 때문인지 바르르 떨리면서, 더욱 굴욕적인 느낌을 배가시켰다.
선택의 순간임을 알았다.
짧은 갈등 끝에, 그가 이선을 향해 제안했다.
“오늘은 이쯤해서 그만하는 게 어때? 솔직히 내 패배가 확실한 거 같지만, 끝까지 가면 그냥 죽어 줄 생각은 없거든. 적어도 팔이나 다리 하나쯤은 확실히 뜯어 갈 생각인데, 서로 적당히 양보하는 게 좋지 않겠어?”
그 말에 이선은 더욱 불길을 키우며 말했다.
“불가!”
이선은 결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팔 하나? 그래. 주마!’
각오를 다진 그의 눈빛에 트라비오는 깊은 절망감을 맛봤다. 정말 이 자리가 자신의 최후가 될 수 있다는 걸 느낀 것이다.
‘빌어먹을….’
잠시 후,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이선의 불길이 그를 덮쳤고, 이면 최악의 난봉꾼이라 불리던 사내, 트라비오는 그렇게 생의 마지막을 잿더미 속에서 맞아야만 했다.
* * *
카일리는 상황이 더럽게 꼬였음을 직감했다.
‘존슨과 이반나가 던전으로 들어갔다고?’
깜짝 놀라서 황급히 제퍼드를 찾아가 보고를 올린 뒤, 차후 상황에 대해 이런저런 의논을 하던 와중이었다.
문득, 제퍼드의 모습이 변화하는 걸 발견했고, 이내 기겁하며 외쳐야 했다.
“카멜레온?”
제퍼드의 자리에 있어선 안 될 얼굴이 있던 것이다. 몇 차례 얼굴을 맞댄 경험 때문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충격 속에 턱을 떨치는 카일리를 무시한 채, 카멜레온이 제 모습을 이리저리 살피는가 싶더니, 이내 쓰게 웃으며 카일리에게 말했다.
“판이 뒤집혔네. 빨리 튀는 게 좋을 거야.”
그 무슨 말인지 의아해하는 그를 향해, 카멜레온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도 이유는 모르겠는데, 키메라가 죽은 것 같다.”
카일리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이 무슨 개소리냐고 한마디 쏘아 주고 싶었지만 카멜레온은 그럴 시간도 없다는 듯 재촉하며 말했다.
“자세한 건 설명해 줄 수 없고, 어쨌든 키메라가 죽었다는 건 확실해. 이것도 그간 인연 생각해서 알려 주는 거야. 그러니까 한시라도 빨리 방 빼는 게 좋을걸.”
그러더니 마치 허공에 녹아들 듯 모습을 감춰 버리는 것이 아닌가.
“카멜레온? 카멜레온!”
연신 그를 불러 보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미 자취를 감췄다는 의미였다. 홀로 남았음을 깨달은 카일리는 급히 머리를 굴리며 상황을 분석했다.
‘제퍼드 님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카멜레온이 있다는 건… 현장에 직접 나가셨구나!’
브레인 역할을 맡을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만큼, 빠르게 모든 흐름이 그려지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드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그가… 죽었다고?’
제퍼드의 사망 소식이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던 것인데, 그러다 던전을 감시하던 요원의 보고가 떠올랐다.
‘이반나와 존슨!’
그 둘이 투입되었다면 확실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일단 정보의 진위 여부를 따져야겠으나, 정말 제퍼드가 죽었고 계획이 실패했다면?
말도 안 된다고 여기면서도, 마냥 무시하기가 어려워졌다. 게다가 카멜레온이 비록 이면을 살아간다지만, 신뢰도가 높은 주민이지 않던가.
헛소리를 할 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혹시 모르니까.’
좀 더 안전한 장소로 옮기기로 결정하며, 급히 바깥으로 나서는데, 그러다 기겁하고야 말았다.
‘어느새?’
그들 거처 주변으로 쭈욱 포위망이 형성되어 있던 것인데, 그들 사이에 세워진 깃발과 이들이 달고 있는 완장이나 복장 등을 보며, 무릎에 힘이 쭉 빠지는 걸 느껴야만 했다.
‘혜성!’
카멜레온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판이 뒤집혔네.
그러며 했던 경고도 이어졌다.
―한시라도 빨리 방 빼는 게 좋을걸.
이건 빨라도 너무 빨랐다.
아니나 다를까.
“어째, 느낌이 싸하더라고.”
저 한편에서 카멜레온이 수갑을 찬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 족 됐어.”
심각한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가벼운 태도 때문일까?
이 모든 게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