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그인 더 헌터-123화 (123/325)

#23. 팀.

이선!

광호에게 있어 그 이름이란, 그야말로 감추고 싶은 오욕의 역사 그 자체였다.

특히 길드장인 강만기에게 있어서 더욱 그랬다.

직계와 방계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재능의 격차를 내세우며 그를 좌절하게 만들었던 굴욕스런 과거란, 상상만으로도 열불이 날 정도의 시간이었다.

만약 이선이 계속 한국에 남아있었고, 태호 그룹의 지시를 착실히 이행했더라면, 방계라는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광호의 길드장 자리는 이선의 것이 됐을 것이다.

초기 길드장의 경우는 그룹 차원에서 내세운 임시직이었던 만큼, 여러모로 역할의 부족함이 많았고, 그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더더욱 이선의 존재감이 빛을 발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스스로 거꾸러져 버렸고, 그렇게 차선이나 다름없는 흐름으로 강만기가 선택되어, 조금은 급조하듯 길드장의 자리를 맡게 된 것이다.

‘멍청한 놈, 겨우 계집년 하나 때문에.’

강만기의 머릿속으로 이선희의 모습이 잠시 스쳐갔다. 생각해보면 그녀 덕분에 기회를 얻은 것이고, 이 부분은 또 다른 의미로써 굴욕적기기도 했다.

그는 태호 그룹의 직계로 태어나, 평생에 걸쳐 엘리트 코스만 밟아왔던 존재였다.

헌데, 차선으로 쓰인 것이다.

순수하게 인간적인 능력이라면 분명 이선을 압도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하지만 헌터 업계라는 건, 스킬이라는 재능이 우선시되는 세상이었다.

분명 그는 이선에게 부족했다.

솔직한 말로 차선으로 쓰이기에도 모자람이 있을 거라는 게 주변의 평가였다.

그래서인지 길드를 맡던 초창기, 이런저런 말이 많이 나오기도 했었다. 실제로 부족한 모습도 여럿 보여준 적도 있었다.

향간에선 그 역시 ‘임시’라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꾸역꾸역 버텨냈고, 기어지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물론, 순수하게 그의 능력만 발휘된 건 아니었다.

태호!

헌터로써는 이선에게 부족할지 모르나, 경영을 비롯한 제왕학을 익힌 사내로써, 그는 그룹 차원의 지원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았다.

-재능이 부족하면 잔재주라도 부리는 거지.

-하긴, 그것도 능력은 능력이니까.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더니.

-이선이라면 어땠을까?

지금도 혈족 상당수가 이를 가지고 입방아를 찧고는 했고, 그 때문에 더더욱 이선의 존재란 강만기에게 있어 금기와도 같았다.

헌데, 최근 들어 그 금기와 관련된 소식이 자꾸 날아들며 귀지를 쌓아올리는 것이 아닌가.

“후...어떻게 됐어?”

강만기가 무거운 한숨과 함께 구정국을 향해 물었다. 이에 구정국이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선이 들어온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핌프를 막은 것도 이선의 짓으로 보입니다.”

그저 혜성 측에서 흘린 정보만 두고 판단하기 보단, 직접 확실한 정보를 구하고자, 혜성이 관리하는 감옥까지 파헤쳤다.

그 안에서 사람을 빼내긴 어려울지 모르나, 목소리를 주고받는 정도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이를 통해서 당시 상황에 대한 현장요원들의 정보를 수집했고, 한편으로는 미국 측의 정보원을 움직여서, 그쪽의 세부 사정까지 끌어 모았다.

그렇게 모인 정보를 조합한 뒤에 내린 결론이었다.

“아직 미국으로 복귀하지 않은 듯 보이는데, 아무래도 핌프와의 전투 후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걸로 추정됩니다.”

“확실해?”

“혜성 감식반의 현장 정보를 입수한 결과, 높은 확률로 치명상 일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면서 추가로 설명했다.

“상대가 무려 핌프였습니다. 그는 과거 교황청의 대대적인 공세 속에서도 살아남은 실력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일으켰던 사건사고들을 언급하며, 핌프의 남다른 실력을 강조했다.

“상대가 핌프라는 걸 가정해 봤을 때, 분명히 정상일 리가 없습니다. 저희 정보부는 피닉스가 복귀를 미룬 것도 심각한 부상으로 인해, 복귀를 할 수 없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상태가 안 좋다?”

강만기의 두 눈 위로 섬뜩한 안광이 번뜩였다.

“잡아야겠군.”

그의 중얼거림에 구정국이 흠칫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에 강만기가 물었다.

“왜? 미국 놈들 제재가 겁나?”

구정국은 선뜻 대답하지 못한 채, 마른침만 꼴깍거렸다. 그 모습에 강만기가 실소하며 답했다.

“우리가 직접 움직일 필요 있나.”

현재 한국에 들어와 있는 랭커가 무려 10명이 넘어갔다.

“피닉스라고 하며 치를 떠는 놈들이 상당하니까. 정보만 날라줘도 충분할 거다.”

광호의 브레인이라는 구정국이 그 방법을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측에서 작정하고 조사에 들어가면, 결국 그들이 걸릴 수밖에 없을 것이기에, 합죽이가 되어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가능성이 낮진 않지만, 견적 자체가 좋지 못했다.

그렇다고 반대의견을 내세우기도 어려운 게, 강만기의 최측근으로써 이선을 향한 원한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를 어쩐다...’

구정국은 일단 뜻을 따르는 구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끊임없이 상황 타개를 위한 실마리를 더듬어가고 있었다.

* * *

“누가 내 이야길 하나?”

이선은 연신 귀를 후비며 창밖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초롱이가 물었다.

“삼촌 아파?”

걱정스런 물음에 실소가 나와 버렸다. 계속 귀를 후벼대고 있으니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나 보다. 이에 아이를 들어 비행기를 태워주며 말했다.

“아니야. 그냥 잠깐 간지러워서 그랬어. 어이구, 우리 꼬물이가 삼촌이 걱정돼쪄요? 그랬쪄요? 하하! 그나저나 오늘 영화관 갈 건데, 가서 얌전히 앉아있을 수 있지?”

“응! 응!”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 모습이 귀여워 재차 웃음이 나왔다.

이를 보던 마루는 헛웃음을 흘려버렸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듯, 얼굴 목소리 분위기 등, 과하게 묵직한 공기를 두르고 있던 사내였건만, 요 근래 이어졌던 뜻밖의 보모 노릇 때문일까?

‘와...저 형님이 저 목소리로 애교까지 부릴 줄이야.’

상상도 못한 광경이었다.

만약, 그를 아는 이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기만 했다.

짐작건대 턱이 쏙 빠지지 않을까?

상당히 낯선 광경이긴 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집안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 지니, 매번 귀갓길이 제법 기대되는 느낌이 있었다.

특히, 요 근래 들어서 훌쩍 뛰어버린 인지도 때문일까?

‘피곤해. 피곤해...’

주변에서 들어오는 시기 질투의 기색들이 그의 일상을 배는 피로하게 만들고는 했다.

특히, 일반 팀이나 경계 팀 등, 중간 계층의 헌터들이 유독 더 눈빛이 좋지 않았는데, 애초에 마루는 낙하산 인사 취급을 받던 하급 헌터가 아니던가.

밑으로 보던 이가 하루아침에 머리 꼭대기에 올랐으니, 그들 입장에선 곱게 보기 어려운 게 당연했다.

이런 분위기는 특수팀 내에서도 이뤄지고 있었는데, 다행이라 한다면 특수 1팀에서는 그런 경향이 덜하다는 점이었다.

‘아무렇게나 뽑은 인원이 아니니까.’

김연희가 직접 고르고 고른 인원들로써, 마냥 재능만 보고 뽑은 팀이 아니었다.

인성을 비롯해서 자체적으로 이런저런 심사가 시행된 이후에야 스카웃에 들어갔던 것이다.

물론, 마루의 경우에는 남다른 특수성으로 인해, 그 허들이 상당히 낮기는 했다. 게다가 김연희가 아닌 이선희가 직접 손을 내밀지 않았던가.

이래저래 특수 케이스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중간계층 이상의 공기와 달리, 하급 헌터들의 분위기는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저분이야 말로 우리의 롤 모델이다.

-혹시, 우리도...

-가능하지 않을까?

몇몇 포기하고 있던 이들은 그를 보며 희망을 품게 되었고, 이제 막 시작하는 이들은 그를 목표로 삼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극심한 온도차가 그를 피로하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했다.

너무 긍정적이어도 또 너무 부정적이어도 피곤한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양 극단의 분위기가 주변을 맴 돌고 있으니, 두 배로 스트레스가 쌓이는 게 당연한 것이다.

‘이 와중에 팀장 준비까지 해야 하는 건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문득 품 안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핸드폰이 부르르 떤 것인데, 확인해보니 레베카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살짝 긴장하며 확인했다. 그녀가 이처럼 연락을 취하는 건 대부분 불청객이 찾아오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라 해야 할까?

그쪽 소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루의 표정이 풀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욱 굳어지고 있었다.

레베카가 보낸 문자는 성녀 레아와 관련된 것으로써, 첨부파일에는 성녀의 SNS에 올라와있는 영상 컷이 담겨있었다.

‘다큐멘터리?’

두통이 밀려왔다.

* * *

화면 가득 반가운 얼굴이 나왔지만, 기쁘진 않았다.

‘아직 준비가 부족하실 텐데.’

성녀 레아는 걱정스런 얼굴로 영상을 보고, 관련 반응들을 살폈다.

그녀는 올해 초 무렵에 다시금 교황청으로 돌아온 상태였는데, 연달아 발생했던 승급 현상을 비롯하여 존슨의 등장 등, 꾸준히 발생했던 이런저런 사건 사고로 인해, 그녀의 귀국이 묻힌 경향이 있었다.

귀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베카를 통해 제퍼드와의 마찰이 예고되었을 때, 다시금 방한을 준비했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그녀의 뜻을 관철시킬 수 없었다.

짧은 기간에 이미 두 번이나 건너갔다 온데다가, 굳이 한국이 아니더라도 세계 각국에는 여러 기현상들이 즐비해 있기 때문이었다.

승급 현상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교황청 상부의 실리와 맞물리는 현상에도 집중해 줄 필요가 있었고, 그런 이유로 이런저런 행사를 비롯해, 몇몇 임무들을 착실히 수행하며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제로 원이 마루님께 좀 더 붙어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일단 피닉스가 함께하고 있으니, 차선 정도는 되는 건가.’

건가드 영상부터 시작해서, 이번 다큐멘터리까지 갑작스런 인지도 상승으로 인해, 마루에게 불필요한 수준의 관심이 쏟아질까 걱정됐다.

물론, 그와 별도로 기쁜 마음도 일부 있었다.

온전히 성녀로 각성하고 난 뒤 알게 된 사실로써, 그녀의 버프가 유독 잘 들어가는 이들의 경우, 하나같이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마루의 유명세는 그녀와의 상성에 플러스 작용을 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좀 더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 대략 7:3 정도로 걱정스런 마음이 더 큰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화살은 쏘아졌고, 판은 물릴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린 상황이었다.

레아는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쳐야 하지 않겠나.

이 날, 레아의 SNS계정에 한 편의 다큐멘터리 영상이 올라왔다.

#역경#도전#모험#드라마#좋아요

* * *

레베카의 주장은 이러했다.

“마루 오빠를 위해서 한 행동이에요.”

성녀의 이미지를 마루에게 걸어놓고자 SNS에 그의 영상을 올린 것이다.

존슨처럼 직접적인 관계가 언급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성녀가 그를 응원한다는 분위기를 내비친 것만으로도, 마루의 등 뒤로는 성녀의 가호가 따라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교황청에서 직접 관리하는 계정이라서, 아마 지금쯤이면 내부적으로 소란이 있긴 할 거예요.”

바로 그 부분이 포인트이기도 했다.

“성녀님 독단이었지만, 어쨌든 그로 인해서 교황청에선 오빠를 서포트 해야 하는 입장이 돼버렸으니까요.”

직접적으로 무언가 행동을 하진 않을 것이나, 그들 공식 홈페이지나 관련 사이트를 통해, 꾸준히 마루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들을 올리게 될 터였다.

특히, 성녀가 직접적으로 지지하는 언급을 하는 경우가 드물기에, 더더욱 그를 향한 긍정적 이미지가 더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프렌차이즈 스타니 뭐니 하지만, 그녀는 일단 당대의 성녀였고, 그 역할에 어울리는 일상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이번 행동으로 인해, 존슨이 씌워놓은 프레임이 한층 탄탄해지기에 충분했고, 시기 질투 불신의 눈빛을 일부나마 흐려지게 만들 만한 위력도 있을 터였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마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성녀님은 괜찮고?”

“...그냥 SNS니까요. 크게 문제 될 건 없습니다.”

말과 달리 성녀는 사고를 친 거나 마찬가지인 만큼, 행사 몇 개 정도는 더 참가해 줘야 할 터였다.

‘한참 투덜거리셨지.’

귓가가 얼얼할 만큼 불만을 토로하던 탓인지, 지금도 레아의 음성이 환청처럼 스쳐가는 느낌이긴 했다.

“그나저나 간만에 이렇게 얼굴 보고 이야기하니까 좋긴 하네.”

조심히 마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레베카는 내심 안도했다. 그의 음성이 크게 화난 것 같진 않아보인 탓이었다.

얼굴 좀 보자는 소리에 혹시 성녀 때문에 화나서 따지려는 건가 싶어, 이처럼 변명거리도 잔뜩 준비해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껏 보여진 모습으로 봐선, 그 때문에 찾은 것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다.

실제로도 그게 정답이긴 했다.

마루가 성녀의 SNS에 잠깐 표정이 굳어버리긴 했지만, 이내 그 반응들을 살피고 난 뒤, 레베카의 변명과 비슷한 흐름들을 유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를 위한 행동임을 알았기에,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레베카를 요청한 이유는 뭘까?

마루는 우선주제가 마무리 되는 걸 느끼면서, 슬슬 본론을 꺼낼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가 물었다.

“슬슬 밖으로 나올 생각 없어?”

“...예?”

레베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내비쳤고, 마루는 좀 더 직접적인 단어 선택과 함께 그녀에게 말했다.

“내 팀에 들어오지 않을래?”

그가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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