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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만우절!

실버 박사와의 만남 이후, 그와 다시 재회하는 걸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 때마다 매번 관련한 생각을 하곤 했다.

그렇게 꿈을 꿨다.

물론, 실버 박사의 꿈은 아니었다. 아득하게 먼 유년기 시절의 꿈, 아니 기억이었다.

어느 날이었던가.

부친을 따라 친구 모임을 따라간 적이 있었다. 거기에는 비슷하게 다른 어른들의 아이들도 여럿 있어서, 덕분에 심심하지 않게 어울리며 뛰어놀았다.

그러다가 조금 늦게 도착한 친구 분이 아이를 소개시켜 주는데, 거기서 보고 말았다.

‘천사다!’

백설기마냥 하얀 피부를 지닌 또래의 소녀의 등장에, 입을 헤 벌린 채로 바라만 보다, 이내 그 아이를 졸졸졸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나...나는 마루라고 해.”

자신을 소개하며 꼬마 마루는 열심히 자신을 어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거 맛있어. 먹을래? 이건 더 맛있어. 이건 더더 맛있어. 이건 더더 더덕...”

아이 생각에는 맛있는 것만큼 좋은 게 없었던 모양이었다. 소녀는 말수가 별로 없었는데, 그래서인지 다른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질 못했고, 덕분에 꼬마 마루는 천사소녀와 더욱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아이는 친해졌다.

이날 이후, 꼬마 마루는 수시로 부친에게 물었다.

“아빠, 모임은 언제야?”

“또 안 모여?”

“놀러 안 가?”

하지만 기껏해야 1년에 한두 번 있는 모임이었고, 때론 소녀의 부친 혼자서 나오는 경우가 많았던 터라, 그렇게 소녀와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 아이는 성장했고, 어느 틈엔가 소녀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져갔다.

이후 철없던 꼬마 마루의 모습이 좀 더 이어지고, 이내 꿈은 마루의 고교 시절로 빠르게 넘어갔다.

거기서 볼 수 있었다.

유년기의 천사소녀!

‘딱 거기서 깼지.’

지난 꿈을 상기하며 마루가 입을 열었다.

“내 첫사랑은 유년기에 있더라.”

뜬금없는 이야기에 하나는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올렸다. 그녀가 알기로 그의 첫사랑은 고교시절 첫 연인이었던 걸로 기억했다.

그것도 무려 자신이 직접 소개해줬던 친구였고, 오랜 시간 사귀는 걸 보기도 했었다.

대체, 이런 기이한 소릴 하는 이유가 뭘까?

“어렸을 때 아저씨들 모임 기억나?”

그러면서 그윽한 눈빛으로 마루가 쳐다보는데, 강하나는 저도 모르게 한 마디 해버렸다.

“눈깔, 확!”

찔끔한 마루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속으로 낭만이니 로맨스니 투덜거리는 것도 잠시, 애써 표정을 수습하며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너한테 첫눈에 뿅 갔잖아.”

“표현 참, 저렴하다.”

“......”

분위기 잡으면 잡는다고 뭐라 하고, 그렇다고 풀면 또 푼다고 뭐라 하고,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한단 말인가.

허나, 마루는 이를 크게 지적하진 않았다.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빨갛게 달궈진 얼굴을 보라.

‘부끄러워 하긴.’

한 차례 더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껄떡대던 사내놈들도 그 때문에 줄행랑을 치지 않았던가. 그만큼 강렬한 폭발이었다.

‘뒤통수가 아직도 뜨끈한데, 안면까지 델 순 없지.’

현재, 강하나는 최선을 다해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 중이었고, 그 때문에 평소보다 더 틱틱 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분위기를 잡기가 쉽지 않을 듯싶어, 뒷머리를 긁적이던 마루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래. 빙빙 돌려서 말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지.”

마루가 양 팔을 활짝 벌리며 말했다.

“Come here?”

“미친놈.”

그 거친 언사와 달리, 그녀는 어느새 마루의 품에 폭 안겨들고 있었다.

그녀가 품 안에서 물었다.

“이거 장난 아니지?”

“왜? 오늘이 만우절이라서?”

대답은 없었다. 이에 마루가 실소하며 말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

마루가 그리 말하며 그녀를 꼬옥 끌어안았다.

“사실, 좀 겁났거든.”

품 안에서 그녀가 물었다.

“왜?”

그에 대한 마루의 대답이 의외였다.

“널 너무 잘 아니까.”

하지만 그 때문에 이해되기도 했다. 그녀도 그를 너무 잘 알기에, 그만큼 더 두려워하지 않았던가.

너무 잘 알기에, 그래서 또 전혀 모르는 것 같단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친구와 연인 사이의 간극일까?

그래서 두려움도 더 커진 것이다.

“멍청하긴.”

강하나는 그리 말하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바디 블로.

뻐억!

“컥!”

마루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뱉으며 무너져 내렸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강하나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이건, 그동안 맘고생 시킨 벌이야.”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콰앙!

발을 크게 구르자 땅거죽이 뒤집히며 거대한 구덩이가 생기는데, 그 깊이를 확인한 마루가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너 파견 중에 뭐 하고 돌아다녔는지 다 알아.”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오나 싶었는데, 이어진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바람 피다 걸리면 뒤진다!”

마루의 고개가 힘차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파견 중, 교관 일을 하다 보면 신입들이 자주 달려들고는 했는데, 개중에는 남성들도 여럿 있어서 골치였다는 게 함정이었다.

“오늘부터 1일인가?”

마루가 분위기도 전환할 겸 슬며시 묻는데, 눈살을 찌푸리는 강하나의 모습으로 봐선, 크게 효과는 없어보였다.

“하필 오늘 같은 날, 이게 뭐야?”

그녀의 불만에 마루가 뒷머리를 긁었다.

4월 1일, 만우절!

온 세상이 거짓으로 물드는 날, 그렇게 그들은 진심을 나눴다.

마루가 기적과 조우하고, 1년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 * *

개리와 포더는 멀리 보이는 혜성 길드의 건물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더 파고드는 건 무리 같지?”

개리의 이야기에 포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선 손에 꼽히는 길드라더니, 확실히 문턱이 높긴 하네. 좀 더 파고들어도 될 것 같긴 한데...”

말끝을 흐린 포더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얼굴을 떠올렸다.

얼음여제 이선희!

감히 초인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용기는 나질 않았다. 개리와 포더, 그들이 힘을 모은다면 한 판 붙어볼 만도 할 거라 생각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랭커라고 하지만 수준 여부는 명확히 판별할 수 없고, 게다가 상대의 전투 타입이나 능력치 상성 등, 여러모로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추가적으로 이곳은 키홀의 본거지가 아닌 만큼, 랭커를 상대로는 적당히 몸을 사릴 필요가 있었다.

“그럼, 혜성 길드 조사는 이쯤에서 정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야겠네.”

개리가 이야기하며 대기 중인 수하를 바라봤다. 이에 기다렸다는 듯 보고가 시작됐다.

“현재, 인터넷상에 올라오고 있는 이반나와 존슨의 데이트 사진을 지난 기사들과 비교 분석한 결과, 세이브 파일이라는 걸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한국에 존슨이 없다는 건가?”

개리의 묻고 수하가 답했다.

“다른 정보부에 협조를 요청하고, 타 단체와도 딜을 해서 구한 정보로는, 멀리 브라질의 산타카타리나 방면에서 그와 닮은 이를 봤다고 합니다.”

“브라질이면...거의 지구 반대편 아닌가?”

거기까진 또 무슨 일로 간 것일까?

의문을 느끼는 것도 잠시, 저 멀리 있는 랭커에게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휘휘 저으며 존슨의 자료를 뒤로 밀어버렸다.

“제로원이 없어도, 쉽진 않아.”

포더의 말에 개리가 앞서 마주쳤던 기세를 떠올렸다.

“존슨 말고도 초인이 더 있단 말이지.”

과연, 그게 누구일까?

혜성을 조사하는 틈틈이 관련한 의견을 나눴고, 그 결과가 실로 놀라웠다.

“아무래도 피닉스일 확률이 높겠지?”

“그가 지난 사건에 개입했다고 했으니까. 게다가 이반나와 피닉스의 관계를 생각하면, 존슨과도 연결되는 건 이상할 일이 아니야.”

“쯧! 피닉스에 대한 정보를 광호에서 싹 커트해 놔서, 쓸데없이 시간 소모가 많았어.”

피닉스와 관련된 정보야 많지만, 이는 전부 이민 이후의 정보들로써, 그가 모국에서 살던 정보들의 경우, 태호 그룹에 의해 대부분 삭제된 상황이었다.

지난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는 만큼, 광호 길드의 구정국과도 만남을 가졌는데, 그 무렵 이선에 대한 정보를 요청하며 전체적인 구도를 확실히 그려낼 수 있었다.

“만약 피닉스가 맞다면, 광호에서 제대로 나설 것 같으니까. 그 부분까지만 파악해서 정보를 흘리면 돼.”

포더의 이야기에 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잠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제퍼드님에 대한 행방...놈은 알고 있을까?”

지난 사건에는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나, 그 중 가장 커다란 변수라면 역시 피닉스의 개입이기에, 자연히 드는 의문이었다.

그의 어둔 모습에 포더가 뒤통수를 치며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 그분이 어떤 분인데, 괜히 불길한 상상 하지 말고, 그 시간에 조사나 더 해. 술만 퍼마시지 말고.”

말을 그리 하고 있지만, 포더 역시 부정적인 생각이 뇌리를 가득 채우는 중이었다.

‘그냥, 부상이 심각해서 못 움직이시는 거겠지?’

혹은 어딘가에 억류되어 있다는 등, 최악의 상황만큼은 어떻게든 부정하는 것, 당장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그나저나 오늘인가?”

문득, 개리가 화제를 전환하며 물었다.

“맞지? 다큐멘터리 방영 날?”

“어. 부제가 초인의 탄생이었을 걸.”

“기대되네.”

새로운 초인의 등장이었다. 게다가 관련 전투까지 촬영되어 올라오는 것이다. 랭커에 한 발씩 걸치고 있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놓칠 수 없는 영상이었다.

“만우절에 방영이라니. 누가 보며 장난인 줄 알겠네.”

“정말 농담이면 웃기긴 하겠다.”

개리와 포더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 * *

그토록 기대하고 기대하던 다큐멘터리 2부가 방영되었다.

영상은 1부 끝자락부터 시작됐다.

어둔 실루엣에 색감이 더해지고 불빛이 들어오며, 온전한 형상을 갖춰나가는가 싶더니, 모두가 예상했던 그 인물, 그 여인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얼음여제 이선희!

그녀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바바리를 걸친 모습이란, 그야말로 카리스마 그 자체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지난 1부 영상에 나온 사냥터에서 그녀가 하는 역할로 본 영상의 스타트를 끊는데, 일단 시작 부분은 아무래도 시시한 감이 있었다.

현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전체적인 무대를 컨트롤 하고 지휘하는 모습을 좀 더 보여준 까닭인데, 모두가 기대했던 화끈한 액션은 중후반으로 몰았다는 걸 예감할 수 있었다.

-시청률 뽕을 제대로 뽑는구나.

-LBC가 밀당 좀 하네.

-젠장!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다.

-초인의 탄생! 이 부제 보고도 나갈 순 없지.

-기저귀까지 찼다. 제발 지리게 해 주라.

-욕조에 물 받아놓고 보는 중, 그대로 싼다!

-더 럽(The Love)!

여러 포털 사이트의 반응이 뜨거웠다.

맘 같아선 중후반 타임을 계산해서 다른 채널을 구경하다 오고 싶은 이들이 태반일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리모컨을 들지 못하는 건, 혹시나 그 잠깐의 타임에 주요장면을 놓치고 지나갈까 싶은 불안감 때문이리라.

대한민국 최초의 초인 탄생, 그 역사적인 장면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니, 것보다 만우절에 이런 영상을 올리는 건 뭔데?

-LBC가 머리 잘 쓴 거지. 이런 것까지 화제가 돼서 시청률에 꽂히고 있잖아.

-그건 인정!

-혹시나 구라일까 봐, 살짝 쫄리긴 한다.

-쪼는 맛까지 준비하다니. LBC이 MSG같은 놈들!

-저 만우절 기획 때문에, 이선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리도 있었지.

그렇게 버티고 또 버틴 결과, 모두가 예상했던 그 지점, 중후반 타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드디어 기다리던 그녀의 액션씬이 등장했다.

두둥...둥...두우우웅...

장엄한 사운드와 함께 분위기는 급작스레 반전된다.

그 속에서 이선희의 눈과 얼굴 그리고 전신으로 조금씩 줌 아웃을 하더니, 이내 롱숏으로 장면 전체를 화면에 담아내는데, 거기서 그녀가 홀로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단독 사냥임을 직감하는 가운데,

쿠우우웅...쿵...쿠우웅...

장엄한 사운드와 박자를 맞추기라도 하듯, 거대한 땅울림이 다가들기 시작했다.

이내 화면이 그녀의 시선을 쫓아가며, 저 멀리 몬스터의 형상을 잡아냈다.

킬-콩(Kill-Kong)!

고릴라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몬스터로써, 그 덩치가 오우거 성체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놈이었다.

A급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최상위종의 몬스터가 바로 킬콩인 것이다.

당연하게도 레이드 클래스 몬스터로 분류되는데, 이놈이 무서운 건 강화계와 이능계의 특성을 전부가지고 있단 점이었다.

-아니, 너무 빡센 거 아닌가?

-오우거의 괴력에 초능력까지 더한 놈이라, 더럽게 까다롭긴 하지.

-C급 몬스터 불락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보면 될 걸.

-불락도 거지같은데, 킬콩이라니.

-와...저 놈으로 고르다니. 컨셉 잘 잡았네.

-그건, 인정!

불락이 언급되었던 것처럼, 놈의 이능계적인 특성은 흥분함에 따라서 전신이 불길에 휩싸인다는 점이었다.

불과 얼음!

이선희의 특성이 빙결이라는 걸 생각해 봤을 때, 보는 이들의 즐거움이 상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곧이어 킬콩이 이선희의 눈앞에까지 다다르고, 두 강자가 서로를 알아본 듯, 잠시간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바람 소리마저 숨을 죽인 듯,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으며 답답한 긴장감이 가슴을 옥죄던 찰나,

크워어어어어...

킬콩이 상위종 특유의 피어를 발산하며, 개전의 포효를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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