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스토어!
늦은 밤, 깊어가는 어둠 속에 점멸하는 거리의 불빛 때문일까?
아님, 점점이 떨어지며 불빛과 함께 흩어지는 눈송이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새롭게 시작되는 연인의 풋풋한 로맨스 때문일까?
새하얀 거리 풍경 사이사이 낭만이 넘쳐흘렀다.
짙은 어둠이 깔려가는 거리였건만, 은은히 남아있는 몇몇 불빛과 이를 받고 떨어지는 눈송이가 운치를 더해주니, 별다른 대화 없이 걷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잔잔한 분위기가 깔리며 적막을 무드로 탈바꿈시켜줬다.
마루와 강하나는 그렇게 별빛처럼 쏟아지는 눈송이를 축복의 꽃가루처럼 맞으며, 점멸하는 거리를 조용히 걸었다.
뽀드득...뽀득...
새 단장을 한 눈길 위, 새롭게 남기는 발자국이 흥겨운 사운드를 남기며 그들을 뒤따랐다.
새로 시작하는 연인의 설렘일까?
자동차 극장에서 바로 귀가하지 않고, 좀 더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차를 놓고 올 겨울 마지막 인사말 위를 거닐었다.
오늘 하루 뜻밖의 이벤트가 발생한 까닭인지, 밤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군데군데 거리 위 낭만을 즐기는 인기척들을 살필 수 있었다.
문득, 마루는 손가에 스며드는 온기를 느꼈다.
조금은 어색한 몸짓으로, 강하나가 손을 뻗어 온 것인데, 하얀 입김 사이로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려는 듯, 괜히 거친 숨결을 내뱉는 게 묘한 귀여움을 품고 있었다.
실소가 나오려는 걸 참아내며, 그녀의 손을 꽈악 움켜쥔 채 주머니에 담았다.
작은 공간 속 두 개의 온기가 꿈틀거리며 교차되더니, 이내 하나처럼 꼭 같은 온도로 서로를 휘감는 게 느껴졌다.
별달리 대화가 필요하진 않았다.
서로 그렇게 작은 온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마냥 즐거운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연인이 되어버린 서로가 아직은 조금 낯설지만, 이렇게 작은 부분부터 조금씩 온도차를 조절해 나가는 게, 새로운 일상의 즐거움이리라.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유독 인적이 드문 장소가 나오고, 주변의 인기척이 전부 사라지며 그들의 발자국 소리만 뒤를 따르는 공간에 다다랐다.
뽀드득...뽀득...
점차 늦춰지는 걸음 속에서, 문득 마루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그러더니 이내 시선을 보내오는데, 진지한 그의 눈빛에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공간이 만들어졌고 분위기도 잡혔다.
두근...두근...
슬그머니 고개를 숙여 입술을 침으로 적셔보는 가운데, 돌연 마루가 그녀의 어깨를 잡는가 싶더니만, 그대로 돌려서 정면으로 세우는 것이 아닌가.
아이 컨택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가 물었다.
“나 믿지?”
두근, 심장이 널뛰며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지고 있었다.
스르륵 눈이 감기려는 찰나,
“운동 하나만 배우자.”
뜬금없는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뭐?”
감기던 눈이 활짝 커졌다.
“포스를 단단하게 잡아주는 운동을 하나 알고 있거든.”
“......”
벙찐 와중에 마루의 진지한 눈빛을 보며, 지금 이 상황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화르륵,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지는 가운데, 문득 마루의 눈매가 초승달마냥 휘어졌다.
그러더니,
쪽!
대뜸 다가와 입술을 훔치고 가는 것이 아닌가.
“왜? 이런 거, 기대한 거야?”
그렇잖아도 붉어졌던 얼굴이 이젠 홍시마냥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마루의 입가에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그려지고, 그 모습에 강하나의 눈 꼬리가 올라갔다.
퍼억!
그리고 이어지는 니킥!
“꺼...어헉...”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기습에 마루의 허리가 기역자로 꺾이는데, 무너지기 전에 그의 뒷덜미를 잡아 세우는 억센 손길이 있었다.
“장난친 벌이야!”
그 말과 함께 덜미를 잡은 강하나가 연달아 멱살을 휘감아 올리더니, 공기를 들이키려 활짝 벌어진 그의 입술을 덮쳤다.
“으읍...”
뜻밖의 마우스 투 마우스의 에어 프레셔가 작동되는 가운데, 또 다시 작은 공간 속으로 두 개의 열기가 어지러이 교차되며, 마치 하나처럼 휘감겼다.
마루의 눈이 살짝 뒤집힌 건, 황홀감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호흡이 가쁜 까닭일까?
실로, 숨 막히는 입맞춤이었다.
* * *
오늘은 초롱이가 자고 가는 날이다 보니, 이선이 직접 동화책까지 읽어주며 꿈나라로 안내를 해 줬다. 오래지 않아 고롱거리며 잠드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조심스레 간이 커텐을 쳤다.
그리고는 조용히 오늘의 하이라이트에 접속했다.
초인의 탄생!
이선희의 다큐멘터리 방송이 시작되고, 그의 시선이 영상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킬콩이 등장했을 땐, 저도 모를 긴장감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그녀가 과감한 근접전을 펼칠 땐, 입술을 질끈 깨물어야 했다.
분명 그녀가 압도하는 그림이었음에도,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녀의 전투이기에, 매 순간순간 안심하기가 어려웠던 걸지도 몰랐다.
안도의 한숨이 나온 건, 그녀가 킬콩을 상대로 승리를 가져가는 장면이 펼쳐진 이후였다. 그 무렵에도 불끈 쥔 주먹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너무 꽉 쥐고 있었던지, 그대로 굳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승급 심사!
화면 한편에 Live라는 단어가 떠오른 게 보였다. 놀랍게도 그건 생방송이었다.
그 말인 즉, 지금 이 순간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그녀의 승급 심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영상 속으로 심사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가 외쳤다.
-엔트라 스토어(Entra Store) 오픈!
게임에서나 볼 법한 아이템 상점을 현실에서 불러오는 것으로써, 그 순간 허공중에 뿅 하고 나타나는 자그마한 요정이 있었다.
그건 제대로 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새하얀 광채로만 반짝이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대략적인 윤곽 정도는 살펴졌기에, 자그마한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정도까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형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건 오직 한 사람, 스토어를 오픈한 랭커만이 가능했는데, 이들의 입을 통해서 요정이란 결론이 나온 것이다.
영상 속, 이선희가 스토어의 요정과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요정이 빛으로 화하는 장면이 펼쳐지고, 뒤이어 그 빛 무리가 그녀의 손 위에서 새로운 형태로써 뭉쳐들기 시작했다.
‘포션인가.’
이선은 좋은 선택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토어를 이용하기 위해선 엔트라 데스크의 활동으로 쌓은 데스크 포인트가 필요한데, 생각보다 모으기가 쉽지 않은 만큼, 승급 심사에 과한 포인트를 사용해선 안 됐다.
몇몇 과시하기 좋은 이들이 심사에서 포인트를 낭비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대부분 크게 후회하는 경우가 많았다.
포션의 경우 엔트라 스토어에서 구입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저렴한 것으로써, 스토어의 물품은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다는 제약과 유통기한 등이 걸려있는 만큼, 정해진 시일 내에 사용하는 게 좋았다.
시일이 지날수록 효능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스토어라고 하지만 사실 그리 다양한 기능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제법 실속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영상에 등장한 포션과 같은 물약이 대표적이었다.
데스크의 포인트를 얼마나 소모하느냐에 따라, 수준급 포션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위급 상황에서나 사용할 뿐, 대다수의 랭커는 스토어에서 포션을 구입하지 않는다. 현실에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물약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주로 구입하는 건 뭘까?
[정화제]
바로 사념폐해를 씻어내 주는 가루약이었다.
랭커가 된다는 것, 그건 그만큼 높은 수준의 오염물질과 가까워진다는 의미이기도 했기에, 상당수의 랭커가 수시로 정화제를 구입해서 복용하는 것이다.
승급 심사에서 정화제를 꺼내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사념폐해가 선을 넘었을 때 사용하는 게 베스트지.’
그런 이유로 승급전엔 포션 선택이 딱 이었다.
이 외에도 장비 물품도 있는데, 역시나 그리 인기 있는 상품은 아니었다.
이유인 즉,
‘1회용 장비에 포인트 낭비하긴 좀...’
물건 자체의 성능은 좋았지만, 이 역시 현실에서 충분히 대처 가능했기에, 구입되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옆길로 샜던 것도 잠시, 이선은 다시금 방송에 집중했고, 이내 이선의 자격증에 S급이란 문자가 새겨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와아아아아아~!
우와아아아!
사방이 난리가 났다.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며 이선희의 이름을 연호하는데, 그 여파가 엉뚱한 방향에서 덮쳐들었다.
“흑...흐윽...히이이잉...”
커텐 너머로 아이의 울먹임이 들려왔다. 갑작스런 고함에 깜짝 놀라서 깬 모양이었다.
‘아차!’
다급히 안으로 들어가 보니, 다행히 완전히 깬 건 아닌 모양인 듯, 알 수 없는 옹알이를 하며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한껏 포스를 일으켜 주변 사운드를 차단한 뒤, 아이를 안아들어 열심히 다독여줬다.
“자장...자장...”
그러면서도 시선이 TV에 고정되는 건, 클로즈업 된 그녀의 모습이 여전히 아름답기 때문이리라.
초인의 탄생!
다큐멘터리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 * *
마루의 일상은 변함없이 흘러갔다.
다큐멘터리로 인해 유명세라는 것이 재차 상승했다지만, 어차피 이는 외국에서 발생한 현상이다 보니, 자국 내에서의 체감 변화는 그리 크지 않았다.
게다가 애인이 생겼다고는 하나, 둘 다 워낙 바쁜 나날을 보내는 터라, 실질적으로 만나는 시간은 적었고, 그런 이유로 일상 자체에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다.
물론, 시간 나는 틈틈이 문자를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리는 터라, 주변 팀원들의 반응이 좀 더 다채로워지긴 했다.
유부남들의 경우,
“깨가 쏟아지는 구나.”
“좋을 때다.”
“저 때가 좋지.”
“라떼는 말이야...”
그와 달리 솔로의 경우,
“염장지르냐?”
“싸우자!”
“혹시, 친구 분은 없으시냐?”
“대나무 좀 꺾어 와라.”
“죽창 만들게?”
이렇게 반응하며 연신 엄지를 뒤집고는 했다.
“우우...”
“우~...”
게다가 화랑담배 길드와의 연계로 인해, 일상에 좀 더 여유가 생기면서 PP의 접속 횟수도 증가하게 됐고, 슬슬 제대로 된 경험치 작업도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까진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가 어려웠던 터라, 루미와 초롱이에게 현무의 신물을 제공하는 게 주된 접속 이유긴 했다.
그러는 틈틈이 연공법에 대한 조사도 놓치지 않았는데, 여동생 문제만이 아니라, 최근 강하나를 위해 따로 연공루트를 계획하고 있다 보니, 그 방면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화랑담배 길드 덕분에 일말의 여유가 생겼지만, 이처럼 스스로 빡빡한 일정을 계획하며, 변함없이 바쁜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던 찰나, 뜻밖의 변수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그만이 아니라 이선의 일상까지 뒤집어버릴 만큼 커다란 사건이었다.
* * *
이선은 여느 때처럼 아이와 보낼 일과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간단히 도시락을 싸고 있었다.
문득, 자신의 이런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웃음이 나왔다. 스스로도 이 같은 생활이 싫지만은 않다는 게 더욱 재밌는 부분이었다.
그러다 살짝 표정이 어두워지는 건, 지금 이 일상에 ‘그녀’가 함께하고 있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맴도는 까닭이리라.
‘오늘은 좀 오래 걸리네.’
한 손으로 능숙하게 도시락을 준비한 그가,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건네며 의문을 내비쳤다.
마루가 초롱이를 데리러 간다며 나간 뒤, 제법 시간이 흘렀건만 여전히 도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데리고 들어오더니, 오늘따라 유독 시간이 걸렸다.
그에 대해 의문을 내비치려는 찰나,
삑. 삑. 삑. 삑...
현관문 번호 키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왔구나.’
그리 생각하며 아이를 위한 스마일을 지어보였다.
끼이이익...
과연, 곧 문이 열리고 아이가 들어오는데, 어찌된 일인지 마루는 보이지 않고 초롱이 혼자였다.
“들어와.”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여는 초롱이의 모습에, 일순 의아해하는 찰나 아이의 뒤로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루인가 싶었지만, 그 그림자가 너무 작았다. 초롱이 또래의 아이였다.
‘...누구?’
의문을 내치비고 있을 때, 새로 등장한 아이가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이 아닌가.
“루미라고 합니다. 헤헤!”
그러며 방끗 웃는데, 그 순간 창밖으로 들려오는 외침이 있었다.
“잘 부탁해~!”
급히 내다보니 저 멀리, 마치 화살처럼 내달리며 줄행랑을 치는 마루의 뒷모습이 보였다.
‘What...’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마루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the fu...’
골이 띵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