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계획대로….
이선은 발록의 등장을 알아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여전하군!’
저 멀리서부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다가오는데, 어찌 몰라볼 수가 있겠는가.
일반인을 비롯하여 어지간한 헌터까지 포함해서, 감히 감지하기도 어려울 만큼 은밀하게 스며드는 기세가 있었다.
오직 초인급의 실력자만이 눈치챌 수 있도록, 실로 절묘하게 포스를 살포하며 다가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게 웬일?
그에 맞춰 움직이던 마루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제대로 반응했단 말이지.’
마루가 보이는 것 이상의 실력자라는 건 알았다. 그래서 A급까지 상정하고 있기도 했는데, 발록의 등장을 기점으로 생각을 달리하게 됐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며, 애써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경계에 닿아 있는 건가.’
혹은 벽이라고도 부르는 영역, 랭커가 되기 위한 문턱에 발을 디디고 있다 여겼다. 발록의 기세를 느끼고 움직였다는 게 명백한 증거였다.
‘하긴, A급도 말이 안 되긴 하지.’
당장 그의 자격증에 표시된 B등급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발돋움을 하느냐에 따라, 잠시나마 그 너머 초인의 영역을 감상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했다.
‘1년 차 헌터가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새삼 존슨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실버 박사의 꿈을 이뤄 줄 녀석이야.
분명히 그가 남긴 유산을 통해, 아주 특별한 무언가를 얻었을 거라 여겼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짧은 기간 만에 저만한 성장이 가능할 턱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박사의 유산이 대체 뭐기에, 저런 성장이 가능한 거지?’
정말, 실버 박사의 유산만으로 가능한 성장인 걸까?
그 역시 나름대로 조사를 한 바가 있건만, 그가 아는 것들은 그저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았던 걸까?
한편에선 특별한 아티팩트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었는데, 그 역시 나름의 정보 루트를 통해 이를 전해 들었고, 곁에서 지켜본 결과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 여겼다.
‘실버 박사의 유산에 특별한 아티팩트라….’
그것들이 절묘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면?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답은 나오질 않았다.
‘으음… 여러모로 비밀이 많은 놈이야.’
개중 하나가 바로 루미와 초롱이였다.
‘그 둘도 보통 애들이 아닌 것 같던데.’
황당하게도 이제 겨우 3~5살이나 될 법한 애들에게서 이능의 향기를 맡았다.
특히, 초롱이와 함께할 때면 유독 심신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는데, 놀라운 건 묘하게 회복력까지 올라간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그의 팔 상태가 예정보다 더 빠르게 회복되는 중이기도 했다. 존슨이 건넨 최상급 포션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으로서, 이는 결코 일반적인 현상이라 여길 수가 없었다.
루미에게선 아직 이렇다 할 특별함을 인지하지 못했지만, 초롱이와 어울리는 모습을 통해, 뭔가 비밀이 있다는 예감을 받았다.
‘세계 최연소 각성자가, 13살이었지.’
비공식이지만 11살짜리 각성자가 있긴 했는데, 그 경우에는 불법 연구소에서 몹쓸 실험을 당해 탄생한 것이다 보니, 제대로 공표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실험실도 발록이 박살 냈었지.’
위의 두 예시만 봐도 알 수 있듯, 아무리 빠른 각성자라 할지라도 10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만약, 루미와 초롱이가 정말 능력자라면?
세계 기록 경신만이 아니라, 수많은 시선들이 아이들에게 쏠리면서, 불법 연구소 같은 몹쓸 놈들이 달려들 확률이 높았다.
‘마루가 애들 케어를 잘해야 할 텐데.’
쏴아아아….
막 화장실을 나오던 마루가 그의 시선을 느낀 듯,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똥 마려워? 소변만 본 거라, 바로 들어가서 싸도 돼.”
“에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에 고개를 갸웃거린 마루는 침대로 몸을 던졌다. 뜻밖의 인물의 등장하면서 과거의 악몽이 떠오른 까닭인지, 오늘은 좀 일찍 잠자리에 들고 싶어졌다.
혹시나 싶어 엔트라넷을 열어 컨디션을 확인해 보니, 발록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7점이었던 점수가 6점대로 떨어진 것이 아닌가.
비각성 헌터 시절에 온몸으로 맞아야 했던 랭커의 기세란,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어 뇌리에 박힐 만한 위력이 있었다.
컨디션이 떨어진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어우… 소름 끼쳐!’
마루가 그렇게 몸서리를 치며 뒤척이길 수차례, 오래지 않아 그 몸짓이 줄어드는가 싶더니, 이내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를 흘낏 건너보던 이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간이 커튼을 친 뒤, TV의 재방송 프로그램으로 채널을 돌렸다.
거기선 최근 최고의 화제가 됐던 다큐멘터리, 초인의 탄생 편이 주구장창 방영 중이었다.
마치 홀리기라도 한 듯, 오늘도 그렇게 영상에 빠져들었다.
* * *
신세계를 경험하는 느낌이랄까?
임지현과 임수현 쌍둥이 남매는 연신 감탄성을 터트리며 주변을 돌아봤다.
“와~! 미쳤다.”
“이게 혜성 클라스… 꿀꺽!”
뜻밖의 추천으로 지원하게 된 혜성 특수 1팀이었다.
가장 걱정했던 면접도 문제없이 통과하면서, 그들은 이제 혜성 길드의 일원이 되었는데, 출근 첫날부터 두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저게 기본 장비라고?”
“게다가 공짜래.”
하나같이 장인의 손으로 빚어낸 명품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양산형이라 밝혀진 것 역시도 장인의 검수를 받은 제품들이었다.
이전 길드인 볼트의 경우, 이보다 낮은 물품도 돈을 받고 대여해 준 뒤, 별도 수리비까지 꼬박꼬박 챙겨 가고는 했었다.
‘수전노 같은 영감탱이!’
‘구두쇠!’
쌍둥이는 마치 텔레파시라도 하는 듯, 동시에 속으로 욕설을 쏟아 내는 한편, 새롭게 열린 그들의 미래를 한껏 만끽하며 감상했다.
“와… 씨… 이건, 내가 쓰는 것보다 좋아 보이는데.”
임지현의 말에 임수현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쌍둥이는 유독 이런 부분들을 반겼는데,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들은 막 A급으로 승급을 한 터라, 기존 장비의 의미가 크게 떨어진 상태가 아니던가.
새로 장비를 구입해야 하는데, 혜성의 지원을 받는다면 전보다 좋은 무구를 공짜로 사용 가능하기 때문이다.
혜성과 연결된 대장간을 이용할 경우, 할인 혜택도 적용됐다. 그게 아니더라도 혜성 자체적으로 얼마간의 지원금이 나오는데, 과연 ‘대’ 길드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대목이었다.
“햐~! 때깔이 다르다. 때깔이 달라.”
“이걸로도 어지간한 던전은 그냥 돌겠는데.”
물론, 결국 전용 장비를 따로 맞추긴 해야겠지만, 승급으로 변화한 신체에 적응하기까진, 양산형으로 몸을 푸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여겼다.
신세계가 열린 감동 때문일까?
“아트님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요즘 바쁜지, 접속도 통 뜸하니.”
아이언슈트, 마루를 향한 콩깍지는 오늘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면접에 합격하고 혜성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마루는 그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그저 짧은 메시지만 남겼을 뿐이다.
―정마루를 서포트해라.
체격도 다르고 스킬이나 전투 방식도 전혀 다른 만큼, 쌍둥이는 마루가 아이언슈트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치… 합격하면 맨얼굴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게.”
임지현과 임수현은 아쉬움이 컸지만, 장비실 가득 펼쳐진 무구들의 광채 덕분인지, 생각보다 쉽게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이런 그들을 한구석에서 훔쳐보는 시선이 하나 있었다.
‘확실히 성격들이 좋아서 그런지, 잘 적응하겠네.’
바로 마루였다.
원래는 레베카까지 세 명이 함께해야 할 것이나, 그녀가 곧 다가올 사건까지는 가드로서 커버한 뒤에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일단 쌍둥이들만 먼저 혜성에 들어온 것이다.
그는 쌍둥이들에게 일부러 얼굴을 감췄는데, 거기에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아이언슈트와 그의 전투법이 다른 것부터 시작해서, 자격증과 급수가 다른 실력, 1년 만에 말도 안 되는 성장도를 보여 줬다는 점 등등, 여러모로 걸리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들은 아이언슈트에 대한 환상을 가득 품고 있다 보니, 그의 진실한 정체를 알고 나면 실망할까 두렵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일단 시간을 두고 ‘헌터 정마루’에 대해 알리면서, 그 충격의 폭을 완화할 생각이었다.
‘제대로 내 사람으로 만들려면, 이 정도 수고는 해야지.’
이를 위해서 여러 준비를 했다.
그중 하나는?
“오늘 하루 호위를 맡게 된 임지현이라고 합니다.”
“임수현입니다.”
한 팀으로 움직이는 거였는데, 명분도 확실했다.
합류 첫 사냥부터 현장을 뛰기보단, 한 걸음 물러난 위치에서 특수 1팀의 전체적인 사냥을 관찰하며, 그 연계의 흐름을 이해하는 예비 포지션을 나눠 준 것인데, 그게 바로 저격수의 호위였다.
혼자서 A급 실력자를 둘이나 차지한다는 게 과하긴 했지만, 이선희의 배려 덕분에 그 부분은 해결할 수 있었다.
사실, 쌍둥이가 호위로 붙었다고는 하나, 마루의 뒤를 따르는 건 그들 남매만이 아니었다.
화랑담배 길드!
현재 사냥 중인 던전의 관리자로서, 일종의 인수인계 작업의 일환으로 함께 사냥을 뛰는 것인데, 마루의 경우엔 거의 ‘참관’ 느낌이 강했다.
“오늘도 한 수 제대로 보여 주겠지?”
“솔직히 나는 아무리 해도 저 솜씨는 못 따라갈 것 같다.”
“인정! 스킬이 특수한 줄 알았더니, 그냥 인간 자체가 영점 조준기야.”
“스킬은 거들 뿐.”
“CT헌터는 건가드보다 저격이 알짠데.”
화랑담배 길드의 저격수들이 마루의 저격을 감상하며, 그들 나름의 성장 발판을 마련하는 것인데, 저격수 특유의 종잇장 맷집이라 할 수 있는 만큼, 참관 그 이상의 역할을 하긴 어려웠다.
이 참관을 위해서 별도 요금이 추가되었고, 마루에게도 떨어지는 금액이 있는 만큼, 저들의 시선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화랑담배 요원들은 목소릴 죽여 가며 그들끼리 속닥이려 노력했지만, 마루는 남다른 스탯으로 청각이 극도로 발달한 탓에, 저들의 속삭임을 전부 캐치하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이번엔 제대로 한 방 보여 줘야겠네.’
오늘 하루는 저들 기대에 부응해 줄 생각이었다.
사실, 평소처럼 화랑담배 길드만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오늘은 새로운 환상을 심어 줘야 할 쌍둥이들이 함께하는 중이다 보니, 조금 특별할 필요가 있었다.
철컥, 차각, 차르르륵….
괜스레 멋지게 총기도 한번 돌려 봤다.
‘군대 제식이 각 하나는 제대로지.’
특히, 몬스터 특수부대의 제식은 유독 더 특출났다.
‘사체 처리 말고는 할 게 없으니.’
겉멋이라도 한껏 부려 보는 것이다.
그렇게 각 잡고 자세를 취한 뒤, 멀리 보이는 목표물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투투투투투퉁….
마치 기관총을 쏘듯, 한순간 탄창을 비워 내는 고속 연사가 이어지고, 그 모든 탄환이 저 먼 거리의 몬스터들을 정확히 저격했다.
B급 승급 심사에서 트라굴을 상대로 보여 준 뒤, 저격수들 사이에선 전설처럼 되어 버린 명장면, 그 환상적인 장면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탄환의 수도 정확히 아홉이다 보니, 심사장을 그대로 옮겨 온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
“….”
말문이 턱 막힌 듯, 쌍둥이들을 비롯하여 참관 중이던 화랑담배 길드의 요원들까지, 일제히 입을 쩍 벌린 채 마루를 바라봤다.
그들의 환호성이 터질 듯 말 듯, 들숨과 날숨이 격해지며 간질거리는 타이밍에, 마루는 쉴 틈 없이 탄창을 교체하며 또다시 고속 연사를 선보였다.
투투투투투퉁…
앞서 승급 심사 당시에 보여 줬던 것보다 한층 발전한 덕분일까?
당시에는 한 번에 아홉을 저격하고 나면, 잠시간 호흡이 무거워지며 몸이 굳어 버렸지만, 지금은 짧은 숨 고르기만으로도 회복이 끝난 뒤, 연속 속사가 가능해졌다.
이는 심사 이후로도 꾸준히 연습을 한 덕분이었는데, 아홉 그 이상까지 숫자를 늘릴 순 없었지만, 일종의 쿨타임이라 할 만한 뇌의 과부하는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었다.
투투투투투퉁….
투투퉁….
그렇게 연달아 탄창을 비워 대며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하니, 몇몇 화랑담배 요원들은 눈물까지 흘려 대기 시작했다.
저들 저격수에게 있어선, 너무도 꿈같은 장면인 탓도 있지만, 마루를 방해하면 안 되는 탓에, 입을 틀어막고 벅차오르는 감동을 억제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눈물샘이 역류해 버린 것이다.
참관이나 다름없는 포지션이니 만큼, 숨죽이며 잡음을 줄이는 건 최소한의 예의였다.
이미 이 정도로도 충분히 많은 걸 보여 준 것이지만, 마루는 쌍둥이들에게 첫인상을 확실히 박아 놓기 위해, 좀 더 과한 설정을 준비해 놓은 상황이었다.
‘언제쯤 오려나.’
그의 두 눈은 저격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두 귀는 열심히 쫑긋대며 인근 일대의 모든 소음들을 주워 담는 중이었다.
쿠….
문득, 그의 청각을 자극하는 묘한 잡음이 있었다. 반가운 마음이 들어 그에 집중하고 있노라니, 밀착한 지면을 타고 올라오는 희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왔구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쿠우… 쿵… 쿠우우웅….
오래지 않아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이변을 알아챌 만큼, 커다란 울림과 굉음들이 다가들기 시작했다.
“안전지대로.”
“포지션 잡아요.”
임지현과 임수현이 화들짝 놀라면서도, 착실히 제 역할을 하며 화랑담배의 요원들을 모으고, 마루에게도 손짓을 하는데 이에 장비를 챙기며 일어난 마루가 히쭉 웃으며 한 방향을 바라봤다.
‘계획대로….’
몬스터들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우워어어어어!
워어어어!
‘계획….’
개미 떼처럼 바글바글했다.
‘…어라? 좀 과한데.’
등허리가 축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