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오빠 믿지?
#14. 오빠 믿지?
간만에 보는 스승의 모습인 탓인지, 임시안은 환한 모습으로 반갑게 달려갔고, 그대로 꿀밤을 먹어야만 했다.
“사내자식이 안기는 거 싫어해.”
그러며 마루는 좀 전까지 임시안이 바라보던 트랩을 가리켰다.
“아직도 못 풀었냐?”
“솔직히 저기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에 마루가 실소하며 말했다.
“그렇게 고개 처박고 있으니 뭐가 보이냐?”
“날이 너무 어두워서.”
임시안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말처럼 밤중이다 보니 자세히 살피려다 보면 고개를 들이밀 수밖에 없었다.
“어휴~! 아직 포인트도 못 잡았네.”
제자가 살피던 구역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략적인 포인트를 말해 주긴 했지만, 상세 포인트까지 집어 준 건 아니었다. 대충 ‘여기 어디쯤이다.’ 이런 식으로만 알려 준 것이고, 그게 임시안을 더욱 골치 아프게 하는 듯싶었다.
“가까이서 안 보이면 멀리서 살펴. 전체 그림을 보는 게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잖아.”
그 말에 임시안이 슬금슬금 물러나는데, 역시나 어두운 밤거리인 탓인지 제대로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이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노라니 마루가 입을 열었다.
“전체를 보라니까. 괜히 한곳에 집중하려 하지 마. 쓸데없이 눈깔에 힘주지 말고, 어깨에도 힘 좀 빼고.”
그러면서 마치 지휘하듯 마루가 검지를 휘저었다. 자연히 그 손길을 따라 시선이 따라가는데, 넓게 또 넓게 반복적으로 전체 포인트를 훑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
뭔가 걸리는 게 있었음일까?
임시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에 마루가 작게 실소했다.
‘둔하기는.’
아주 미묘하지만 주변 풍경과 색감이 다른 부분이 있었다. 언뜻 그늘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부분은 그늘이 져선 안 된다. 저건 결국 진짜 명암비가 아닌, 색상의 조절을 통한 거짓 음영이었다.
“와….”
임시안은 뒤늦게 그 같은 사실을 깨닫고는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며 지금껏 그가 헤집었던 구역을 살폈다.
사실, 그 부분도 위장이었다.
가짜를 미끼로 둔 채 진짜는 숨기는 수법으로서, 마치 여기에 트랩이 있다고 유혹하듯, 미묘하게 색채를 덧씌워 놓는 것이다.
뒤늦게 이를 깨달은 임시안이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마루를 돌아봤다.
그 모습에 마루가 실소하며 말했다.
“트랩도 건가드와 마찬가지야. 작은 부분이 아니라, 크게 보고 설계를 하는 거니까. 항상 넓게 봐야 돼. 전체를 보는 습관을 들여.”
제자는 스승의 조언을 뇌리 깊숙이 박아 넣었다.
“가장 기본적인 트랩부터 이렇게 막혀서야. 앞날이 깜깜하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사실 마루가 깔아 놓은 함정들은 상당히 높은 퀄리티를 자랑하는 작품들이었다.
어지간한 헌터들도 눈을 동그랗게 뜰 정도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처럼 이야기하며 타박하는 건, 현재 마루의 눈높이가 그만큼 높아진 것도 있지만, 임시안의 기준점 자체도 높여 두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일단, 제자라고 들여놨으니. 사람 구실은 하게 만들어 놔야지.’
그리 생각하며 혹독히 채찍질을 하려는 찰나였다.
꼬르르륵….
문득, 임시안의 배 속에서 슬픈 알람이 울렸다.
“…밥 안 먹었냐?”
“먹긴 먹었는데.”
대답이 영 찜찜했다. PP에서 임지안에게 들었던 내용이 떠올랐다.
“너 또 김밥이나 라면으로 대충 때웠지?”
“헤헤….”
“젊을 때 관리 잘해라. 나중에 훅 간다.”
경험에서 나오는 진실된 충고였다.
실제로 마루는 30대가 넘어가던 무렵에 위장 쪽으로 상당한 고생을 했었다. 지금이야 신체 변화를 통해 전부 해결됐지만, 한때는 품에 휴지 한 세트는 꼭 챙겨 다녔었다.
꼬르륵….
한 차례 울리기 시작하며 봉인이 풀리기라도 한 듯, 임시안의 배 속에서 연신 알람이 울려 댔다.
이에 마루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가자. 헌터는 밥심이다.”
외치는 와중에 요 근래 깃털처럼 가벼워진 주머니 사정이 떠올랐다.
‘아차….’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스승과의 식사에 기뻐하는 제자의 모습에 결국 걸음을 식당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김밥 헤븐!
마루가 호쾌하게 외쳤다.
“맘껏 시켜.”
제자의 눈빛이 짜게 식은 듯 보이는 건, 분명 착각이리라.
* * *
발록의 등장은 여러모로 상황을 시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일단 그는 이면의 랭커가 아니던가. 게다가 실력도 손에 꼽히는 수준이었다.
데스워치가 그러했듯, 그 역시 이면을 살아가면서 그곳 주민들을 헤집어 놓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멀쩡히 살아 숨 쉰다는 건, 발록의 강함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예시라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이면에서도 손꼽히는 강자가 등장한 만큼, 한국에 머물고 있는 여러 랭커들이 하나둘, 이번 사건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화제성이 남달랐다.
“피닉스 대 발록이라, 기대되는군.”
“지금까지 몇 번 격돌이 있긴 했지만, 승부가 난 적은 없으니까.”
발록과 마찬가지로 이면의 랭커로 불리는 존재, 가네샤와 멀록이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현재, 그들은 최근 핫 플레이스가 되고 있는 장소의 한 카페였다.
“사장이 특수부대 출신인가 보군.”
가네샤가 슬쩍 카페 사장을 바라보며 의문을 내비쳤다. 군복에 베레모를 쓴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언뜻 탄탄해 뵈는 신체로 봤을 때, 일반적인 민간인은 아닌 듯 보였다.
“이 나라는 군대가 필수니까.”
멀록이 그리 답하며 한차례 카페 내부를 살폈다. 각종 군용 물품이 군데군데 박혀 있어, 일반적인 카페와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는데, 그게 또 묘한 매력이 있어 보였다.
“커피 맛도 괜찮고. 동네에 단골깨나 있겠어. 마루라는 녀석도 여기 단골이라고 하던데. 그럴 만하네.”
그렇게 이야기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보내더니, 옅은 실소를 흘렸다.
“발록이 발길을 돌렸다기에 왜 그런가 했더니, 이 동네 생각보다 재밌어.”
그 말에 가네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마루, 트랩 솜씨가 제법인 모양이더군.”
“겨우 그 정도가 아니야. 좀 돌아보니까. 이건 뭐 그쪽 방면의 전문가라고 해도 될 정도더라고.”
“흠….”
둘이 연신 탄성을 뱉어 내고 있을 때였다.
“칙칙한 사내놈 둘이서 무슨 수다를 그렇게 열심히 떨고 있어?”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얼굴을 꽁꽁 감춘 여인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이에 가네샤와 멀록이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오랜만이군. 이반나.”
“연애를 해서 그런가? 얼굴이 폈어.”
마스크의 여인, 이반나가 살짝 선글라스를 내리며 말했다.
“이렇게 꽁꽁 싸맸는데, 뭐가 보인다고 평가질이야?”
“하하! 여전하군.”
멀론이 폭소하며 자리를 내어 줬다.
“내조라도 하러 온 건가?”
“그래. 웬 거지 같은 놈들이 내 남자 동생을 귀찮게 한다기에, 꼬라지들 좀 보려고 왔다.”
원래는 뒷짐만 지고 있을 생각이었지만, 발록의 등장을 시작으로 눈앞의 두 랭커들처럼, 수많은 실력자들이 근방을 얼씬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때문에 결국 그녀도 한 걸음 더 다가온 것이다.
“하하! 문제를 일으킬 생각은 없으니까. 진정하라고. 우리도 제로 원은 무서우니까.”
과묵한 편인 가네샤를 대신해, 멀록이 꾸준히 그녀에게 응수해 줬다.
“그냥 구경만 할 거야. 레이디도 알다시피, 피닉스와 발록의 격돌은 이 바닥에서 손꼽히는 관심사 중 하나라고.”
수차례 맞부딪친 역사가 있지만, 어느 한 번도 제대로 결판이 난 적은 없기에, 그들 두 랭커의 승부에 관심도가 높아지는 건 당연했다.
“돈이라도 걸었나?”
이반나의 물음에 멀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발록?”
“그것도 당연하고.”
현재 이선은 환자라고 알려져 있었다. 당연히 판세가 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선에게 판돈을 거는 이들도 상당했는데, 그가 미국의 세 번째 영웅이라 불리지만, 실제 실력은 1순위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만큼, 변수가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한 방 대박을 노리며 이선에게 판돈을 거는 것이다.
“어때? 레이디도 좀 걸어 보겠어?”
멀록이 그리 이야기하며 손가락을 비벼 댔다. 이반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도박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게다가 불법 도박이 아니던가.
“하하! 그나저나 피닉스는 얼마나 심각한 거야?”
“공짜로 정보를 챙기려고 드네.”
“이런, 들켜 버렸나? 그럼, 서로 하나씩 딜을 하는 건 어때?”
멀록의 이야기에 이반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러는지 파악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에 멀록이 결백하다는 듯 양손을 활짝 벌리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발록이 여기까지 온 이유면 어때?”
그 부분은 이반나도 제법 관심이 갔다. 그녀가 슬쩍 가네샤를 바라보는데, 너무도 태연한 모습에서 그 역시 정보를 알고 있단 느낌이 들었다.
‘하긴, 이 두 놈이 붙어 다니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니.’
일찌감치 정보 공유가 끝났을 거라 여겼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말했다.
“먼저 불어 봐.”
결국 가네샤와 공유될 것이기에, 그를 쫓아내지도 않았다.
“하하! 화끈해서 좋네. 발록이 넘어온 이유는 화염석 때문이야.”
그러면서 관련한 정보를 풀어 주는데, 실로 놀라운 이야기가 연속됐고, 결국 이반나가 경악성을 터트렸다.
“뮤턴트 프로젝트가 아직도 진행 중이었어?”
과거, 발록에게 시행됐던 불법 실험의 정체이기도 했다. 멀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워낙 방대한 자료니까. 발록이 관련 자료를 열심히 소각하긴 했는데, 남아 있는 게 제법 됐던 모양이야.”
이반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너무 자세히 아는데?”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언가 의심하는 눈초리에 멀록이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연구소를 운영하겠어. 도박장이라면 또 모를까. 뭐, 그 방면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좀 알긴 하지만.”
“쯧!”
이반나가 맘에 안 든다는 듯 멀록을 바라봤다. 제법 신사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결국 가네샤나 멀록은 이면의 주민이었다.
“자, 내 패는 전부 깠고, 이제는 레이디 차례 아닌가?”
멀록의 물음에 이반나가 혀를 차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오랜만에 임시안을 가르치며, 제법 스승다운 모습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며 제자의 절실함을 보고 느꼈다.
‘나는 어땠더라?’
옛 기억을 상기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모습들로, 그렇잖아도 복잡한 머리를 더욱 헝클어트리며 상념이 깊어지게 만들었다.
그 때문일까?
‘으음….’
가드&어택 사이트에 대한 생각이 뇌리를 두드렸고, 실버 박사의 잔상 역시 시야를 어지럽히는 기분이었다.
“후….”
마루는 고심 끝에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에잇, 젠장! 알았다. 알았어. 가르쳐 주면 되잖아!”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 모를, 그런 혼잣말 같지 않은 외침을 사방팔방 터트리길 한참, 그가 레베카에게 문자를 남겼다.
* * *
조금은 뜬금없는 내용이었다.
“리튜브에 계정을 파 달라고?”
레베카는 의아하단 얼굴로 마루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 일단 사이트 이름만으로도 마루가 하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사냥 영상이라도 올리시려는 걸까?’
단지, 그의 목적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뿐이었다. 그래도 일단 부탁을 받았기에, 그녀 나름의 루트를 통해 추적이 어려운 계정을 몇 개 만들어 냈다.
이 방면의 전문가를 통한다면, 단시간에 수십 개의 계정을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네트워크상에서 제작되는 신분증의 특징이라 할 것이다.
그걸 가지고 갔을 때, 황당한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헌터 육성 채널이요?”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키우기라도 할 생각인 걸까?
의아한 마음이 드는 가운데, 연달아 뜬금없는 내용들이 튀어나왔다.
“실버 박사의 유지를 이어 보려고.”
벙쪄서 보고 있노라니 마루가 웃으며 말했다.
“황당하지? 나도 황당한데, 상황이 좀 그래. 웃어도 돼. 하….”
그러며 이야기한다.
“너도 좀 배웠으면 하는 게 있어.”
“…예?”
당혹감을 드러내고 있노라니, 마루가 이야기했다.
“실버 박사가 가르쳐 주는 거야.”
생각해 보면 PP의 모든 공부는 실버 박사에 의해 이식된 것들이기에, 그의 가르침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예?”
물론, 레베카는 여전히 따라잡기 힘든 이야기 앞에 두 눈 가득 물음표만 띄울 뿐이었다.
“오빠 믿지?”
마루의 연공법 전수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