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1000.
#15. 1000.
당혹스러운 정보였다.
“발록?”
태호 그룹의 회장 강용호는 기겁해야만 했다.
‘유럽에 있어야 할 작자가 왜?’
그는 일종의 재해와도 같은 존재로서, 국가 권력 따윈 개나 줘 버리는 인사였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버킹엄에 들어가서 깽판 친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대체, 어떻게?’
한편으로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허… 랭커를 끌어들이다니.’
막내아들의 능력이 자신의 예상을 웃돈다는 생각에, 상황의 심각성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실소가 나와 버렸다.
발록을 끌어들인 이상 판을 뒤집기는 어려웠다.
‘이젠 내버려 둘 수밖에 없나.’
차라리 지원을 하며 빠르게 무대의 종막을 끌어낼까도 싶었지만, 자칫 그룹 전체가 끌려들어 갈 수 있단 생각에, 아예 발을 빼기로 결정했다.
물론, 그의 은밀한 경고를 무시하며, 기어이 판을 휘저어 버린 아들에 대해선, 이번 일이 끝나고 합당한 처벌을 해 줄 생각이었다.
‘실수를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강용호는 짧게 혀를 차며 아들을 향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 * *
뜻밖의 물건이 배달되어 왔다.
“후….”
이선은 자신 앞으로 배달된 박스를 열어 본 뒤, 어두운 얼굴이 돼야만 했다.
거기에는 사람의 손이 담겨 있었는데, 그는 이 손의 주인에 대해 너무나 잘 알았다. 남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었다.
유난히 짧고 뭉툭한 엄지, 거기에 중지에 새겨진 제트 모양의 상흔, 손날 부근에 있는 진한 얼룩까지.
‘정국아….’
한 때, 자신과 같은 고아원에서 동고동락하던 동생, 구정국의 손이 꼭 이와 같이 생겼었다. 저 상흔이나 상처가 생길 때 직접 약을 발라 주며, 회복기도 함께했던 만큼, 모를 수가 없었다.
―형아~!
환청처럼 들려오는 어린 구정국의 음성이 귓전을 두드렸다.
으득….
이 택배가 누구에게서 왔는지, 그걸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강만기!’
그에 대한 분노가 치미는 한편, 구정국에 대한 안타까움이 뒤따랐다. 어째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몇몇 짐작 가는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멍청하긴… 나를 떠났으면 철저히 무시하고 살았어야지.’
아마도 그에 대한 감정을 들켜 버렸으리라.
과거, 배신을 통해 그를 떠나보내게 만들었던 동료들 중, 상당수가 비슷한 모습들을 보여 주고 있음을 알았다.
여전히 연락하고 지내는 몇몇 방계의 친우들을 통해, 관련한 소식들을 종종 들은 까닭인데, 이런 흐름을 그려 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억지로 꼬투리를 잡아서 내게 시비를 거는 걸지도….’
강만기의 성격상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여겼다. 구정국은 특히 그와 가까웠던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맘 같아선 당장 쳐들어가고 싶었지만, 이래저래 걸리는 게 많아서 주먹만 쥔 채 부르르 떨 뿐이었다.
특히, 몸 상태가 만전이 아니라는 것도 문제였다.
‘아직도 회복하려면 한참 남았으니.’
한 번 뜯겨 나갔던 팔뚝이었다. 존슨 덕분에 붙여 놓긴 했지만, 겨우 한두 달로 회복될 만한 부상이 아니었다.
발록의 등장을 알아 버린 이상, 더더욱 숨을 고르며 조금이라도 더 만전을 기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판국이 아니던가.
거기까지 생각하던 그가 슬쩍 침대를 바라봤다. 마루가 그곳에 누워 있었는데, 잠을 자는 건 아니었다.
VR 기기를 쓰고 있었는데, PP를 하며 게임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평소에도 간간이 게임을 즐기기는 했지만, 요 며칠 사이 유독 더 게임에 빠져든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보통은 이를 보면서 그냥 게임이나 즐기고 있겠거니 싶겠지만, 이선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실버 박사….’
그의 꿈을 이뤄 줄 존재라고 했다.
‘PP야말로 박사의 유지가 담겨 있는 공간이지.’
이 중요한 시국에 게임에 심취하는 모습에서, 더더욱 저 모습을 평범하게 볼 수 없었다.
아마 마루도 그 나름대로 만전을 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발록의 등장으로 인해, 불청객들의 동선이 일부 꼬인 듯 보였지만, 결국 더 깊이 다가올 것임을 알기에, 매 호흡을 가다듬으며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 * *
최소한의 준비는 갖췄다.
[레벨 : 129]
[힘 : 195+5(+25)] [지능 : 200(+35)]
[체력 : 198+2(+35)] [정신력 : 195+5(+35)]
[민첩 : 195+5(+35)]
[스탯 : 0]
마루는 PP를 통해 자신의 스탯 총합이 드디어 1000을 찍었음을 확인했다.
현실 속 깨달음과 사냥을 통해 약 10레벨가량의 스탯을 획득했고, 게임 속에서 10레벨의 성장 스탯을 더해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그간 PP에 전념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놀라운 성장 속도였다.
‘이 정도라면….’
만에 하나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자신의 몸 하나는 충분히 지켜 낼 수 있다 생각하며 밖으로 향했다.
그는 한 사내를 만나러 움직였다. 멀리 목적지가 보이고, 찾고자 하는 인물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남대문!
그곳 풍경을 감상하며 관광을 하고 있는 한 외국인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접근을 알아챈 걸까?
사내의 시선이 그를 향하고, 불꽃 같은 붉은빛 눈동자가 뜨겁게 쏘아져 왔다.
머리카락부터 눈썹과 눈동자까지, 전부 붉은빛 일색인 사나이.
발록!
마루는 그의 시선에 옛 악몽이 떠오르며, 잠시 다리가 굳어 버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하며, 애써 그에게로 걸어갈 수 있었다.
기어이 다가오는 모습에 발록이 물었다.
“죽고 싶은 건가?”
그 물음에 마루는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걸 느껴야만 했다. 일종의 트라우마 비슷한 존재다 보니, 표정에 드러내지 않는 건 무리였다.
언뜻 하얗게 질린 안색에서, 그의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루는 꾸역꾸역 다가가 입을 열었다.
“쉽진 않을 겁니다.”
“건방지군.”
“…제퍼드도 그런 소릴 했죠.”
그 모습에 발록의 눈가에 이채가 스쳐 갔다. 마루의 대답에 수많은 정보가 녹아 있던 까닭이었다. 잠시 생각하는 듯싶던 그가 물었다.
“적어도 죽지 않을 자신은 있다는 거군.”
슬쩍 기세를 쏘아 내는데, 지척에서 받아 내는 기운은 새삼 옛 트라우마를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그 때문일까?
“무슨 일로 찾아왔지?”
그의 물음에,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헛소리를 뱉어 버렸다.
“…….”
“…….”
서로가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듯, 멍청하니 상대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동시에 의미를 깨닫고, 발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걸 보며 마루가 다급히 외쳤다.
“오… 오해입니다.”
발록의 주먹이 가슴께까지 올라온 걸 보며, 급히 상황을 설명했다.
“따님분을 제게 맡겨 주십시오. 치료해 보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었던 듯, 발록의 미간에 주름이 꿈틀꿈틀 올라왔다.
“…어디서 들었지?”
잠깐 고민하던 마루가 바로 이야기를 이었다.
“이반나님께 들었습니다. 정보는 멀록이란 분과 거래를 했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존슨이란 매개체 덕분인지, 마루와 이반나는 간간이 연락 정도는 하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서 발록의 정보도 전달된 것이다.
‘멀록… 으득!’
이면에서 알아주는 마당발로서, 발록 그와도 몇 차례 마주친 바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 친한 건 아니지만, 적당히 선은 지켜 주는 사이였건만, 산드라의 정보를 멋대로 조사하고 풀었다는 부분에서, 발록의 분노를 사기에는 충분했다.
그 모습에 마루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조금 전 실수는 그럭저럭 넘어간 듯 보였기 때문이다.
발록이 물어 왔다.
“딸아이를 치료할 수 있다는 건 무슨 소리지?”
일단, 시급한 문제는 이거였다. 멀록이나 정보 여부는 차후에 다시 알아보면 될 일이었다.
마루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도 확신하진 못합니다.”
그 순간 발록의 미간에 주름이 더해졌다. 당황한 마루가 급히 말을 더했다.
“하… 하지만 그래도 따님의 문제를 어느 정도는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합니다.”
“확신은 못 하는데, 자신은 한다? 말이 앞뒤가 안 맞는군.”
‘빌어먹을!’
마루도 인정하는 바였다. 옛 트라우마나 다름없는 상대다 보니, 자꾸만 평정에 문제가 생기는 듯싶었다.
한 차례 호흡을 고른 뒤, 다시금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능성이 있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게 대단한 거라는 걸 자신합니다. 단지… 따님께서 첫 사례가 될 거라서 확신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감히!”
화르르륵….
발록의 불같은 기세가 마루를 뒤덮었다.
“내 딸을 실험체로 삼겠다고?”
그와 산드라 모두 연구소의 피해자가 아니던가. 한데 또 ‘실험’이라는 굴레로 끌어들인다?
마루의 이야기는 그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과 같았다.
이 자리에서 멱을 따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위기라고 여긴 듯, 거기서 마루는 준비해 왔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시… 실버 박사의 유산입니다.”
너무나 뜻밖의 이름이 튀어나왔던 탓일까?
사르르륵….
불같던 발록의 기세가 거짓말처럼 사그라지며 호흡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평소라면 존슨의 이름을 파는 정도로 충분했겠지만, 상대가 상대다 보니 그 연령대에서 남다른 인지도를 지닌 인물을 입에 담은 것이다.
물론, 존슨의 이름값도 거들었다.
“제로 원께서 저 같은 하급 헌터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가 뭘 것 같습니까?”
지금이야 B급의 중급 헌터지만, 존슨이 관심을 가졌을 때는 갓 C급에 오르며, 하급 딱지를 겨우 떼어 내던 시절이 아니던가.
말하고 보니 마루도 새삼 의문을 느꼈다.
‘설마….’
하지만 거기에 깊이 빠져들 시간은 없었다. 당장 눈앞의 발록을 납득시키는 데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믿어 달란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 이걸 보여 드리고 싶군요.”
마루는 그리 말하며 준비해 온 파일을 꺼낸 뒤 건넸다.
이를 받아든 발록이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그 내용물을 살피기 시작하는데, 뒤이어 얼굴이 붉어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언뜻 분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나 그것은 마루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마루는 이를 보며 슬그머니 발을 뺐다.
‘어우, 쫄려서 못 버티겠네.’
정중히 예를 갖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발록께서 비록 이면을 살아가시지만, 많은 헌터들에게 귀감이 되고 계심을 상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후다닥 발을 빼는데, 그러다가 주변을 살피고는 내심 놀라야만 했다.
좀 전의 그 거친 기세로 봤을 때, 비상이 걸렸어도 이상하지 않건만, 남대문의 풍경 어디에도 긴장감은 흐르고 있지 않았다.
인근의 피해 없이, 오직 그에게만 기세를 집중시켰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새삼 발록의 능력에 감탄하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그로 하여금 줄행랑을 치게 만드는 풍경이기도 했다.
* * *
발록은 마루가 건넨 보고서를 확인한 뒤, 주체하기 어려운 분노를 느꼈다.
‘광호 길드… 으득!’
하지만 이내 나직한 한숨과 함께 이를 가라앉혀야만 했다. 상황이 그의 분노를 허락하지 않음이었다.
파일을 구겨서 품에 넣은 뒤, 마루가 떠난 자리를 바라봤다.
“제법 잘 컸군.”
어렴풋이 옛 기억이 떠올랐다.
불법 실험의 순작용이라 해야 할지, 그는 남다른 두뇌를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마루에 대해서도 제법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그의 손아귀에서 살아남은 이면의 주민이 몇 없기도 해서, 기억하기 쉬운 편이기도 했다.
‘동료를 구하려고 몸을 던진 멍청한 놈.’
실상은 혼자 죽기 싫어서 같이 죽자며 던진 것이지만, 그는 여전히 착각하며 오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같은 기억으로 인해, 좀 전에도 마루에게 폭발하기 보단, 좀 더 이야기를 들어 주는 인내를 발휘할 수 있었다.
‘그 동료라는 놈과 다르게, 저놈은 바로 이면에서 발을 뺐지.’
당시 마루와 함께 살아났던 동료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자신이 살려 준 이들을 한동안 지켜보며 관리하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놈은 여전히 이면에 남아 엉망인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직접 숨을 거둬 줬지.’
마루는 그냥 이면에서 마찰이 발생해 죽었다고 알지만, 진실은 발록의 재방문에 의한 사망이었다.
옛 생각에 빠졌던 것도 잠시, 발록은 좀 전 마루가 했던 이야기를 상기했다.
“실버 박사라고?”
헛소리라 여기면서도 마냥 무시할 수 없는 건, 존슨의 이름값이 뒤에 함께하기 때문이리라. 마루의 의도가 정확히 들어 먹힌 것이다.
“후….”
갈등이 깊어진 까닭일까?
미간 깊이 박혀 버린 주름은 쉬이 사라질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