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시리다.
#19. 시리다.
관전자들은 일제히 같은 의견을 내놨다.
“끝났네.”
“저건 답 없어.”
“피닉스의 패배인가.”
“게임 오버!”
아직 승부가 난 건 아니었지만, 일찌감치 발록의 승리로 결론을 내리기 시작했다.
일발 역전의 기회라는 걸 노리기엔, 상황 자체가 너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발록은 한 차례 정신이 흔들렸던 것 외에 별다른 타격이 없지만, 그와 달리 이선의 경우에는 꾸준히 체력과 포스가 소모되는 중이었다.
그저 가만히 숨 쉬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이지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오른팔 부상이 생각보다 심하네.”
“한 번 뜯겼던 것 같은데, 아닌가?”
“저런 팔뚝으로 무리를 했으니.”
“쯧! 포스를 너무 퍼부었어. 그러니 역으로 포스가 혈관을 헤집어 버린 게지.”
“회복하려고 포스를 붓고 있긴 한데, 지금 상황에선 저것도 결국 역효과지.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고 내버려 둬야 하는데.”
“아니면 급속 냉동이라도 시키거나.”
그 순간이었다.
쩌저저적….
전장에 이변이 발생했다.
* * *
뜨거운 열기가 혈관을 불사르며 끊임없이 핏물을 뽑아내는 걸 느꼈다. 포스만 끌어다 지혈을 하고 있지만, 앞서 뿜어냈던 불길의 잔재가 너무 깊이 박혀 버렸다.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으으음….”
고통 속에서 신음성이 깊어 가고, 이런 모습이 안타까웠음일까?
“최대한 빨리 끝내 주지.”
발록이 한껏 악마의 갑주를 키워 내더니, 성큼성큼 다가들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이변이 발생했다.
쩌저저적….
두 초인의 중간 지점부터 시작해서 서리가 깔리는가 싶더니, 돌연 주변 일대가 급속도로 얼어붙기 시작한 것이다.
뜻밖의 상황에 두 랭커 모두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데, 특히 이선의 감정 변화가 더 격렬했다.
‘이건….’
냉기 속에서 느껴지는 그리운 향기에 울컥, 가슴이 들썩였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까지.”
익숙한 음성이 한기를 가득 머금은 채 울려 퍼지고, 그와 동시에 전장 한가운데로 떨어져 내리는 여인이 있었다.
얼음여제 이선희!
새로운 랭커의 난입이었다.
* * *
나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가 어떤 약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결코 나설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
저도 모르게 무대에 올라 버렸고, 판을 뒤집는 행패까지 부려 버렸다.
‘멍청하긴….’
이선희는 스스로를 질책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며 ‘그’의 모습을 살폈다. 과한 출혈로 인해 피가 부족한 탓인지, 하얗게 질린 몰골이 실로 가관이었다.
‘…멍청하긴!’
그의 모습이 너무도 한심하고 또 한심해, 울컥 눈시울이 붉어져 버렸다.
쩌저저저저적….
이 같은 감정을 토해 내듯 사방으로 쏟아 냈고, 주변 일대는 순식간에 빙하지대로 탈바꿈됐다.
마치 무인도처럼, 유일하게 타오르고 있는 존재.
발록!
그녀는 한 차례 그를 노려본 뒤, 이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더니 그의 오른팔에 손을 뻗었다.
사아아아….
차가운 한기가 스며들며, 타오르던 혈관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이에 이선은 옛 추억이 새록새록 솟구치는 걸 느꼈다.
‘예전에도 이랬지.’
그가 폭주하면 그녀가 냉기로 식혀 줬었다.
서로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걸까?
그들은 꼭 닮은 눈빛으로, 마치 울 것 같은 표정을 서로에게 내비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발록이 조용히 한마디 했다.
“어으… 시리다.”
주변의 냉기 때문일까?
괜히 옆구리가 시렸다.
* * *
차라락, 차각, 착….
쌍권총이 만들어 내는 현란한 춤사위가 시야를 어지럽히며, 두서없이 달려드는 불청객들의 동선에 혼선을 낳았다.
‘왼쪽?’
방향을 잡고 움직이면, 이미 그쪽으로 총구가 향하고 있었고, 급히 발목을 비틀며 반전하는 순간, 반대편에서도 총구가 번뜩이고 있었다.
새삼 쌍권총의 까다로움을 상기하는 찰나, 총성이 울려 퍼지며 가드를 바짝 세우게 만들었다.
퍼엉….
양팔을 흔드는 충격과 함께 쭈욱 밀려나는 가운데, 팀원들의 날렵한 움직임이 이어지는 연사를 커버해 줬다.
‘이게 말이 돼?’
마츠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전방을 바라봤다.
‘저게 정말 B급 헌터라고?’
과거의 악연을 쫓아왔다지만, 사실 일찌감치 기억의 뒤편으로 밀어내 버린 얼굴이었다.
일찌감치 각성하며 밑바닥 생활을 전부 청산한 까닭인데, 재능과 재주도 남달랐던 터라, 헌팅마다 승승장구하며 빠르게 A급에도 올랐고 그럴싸한 팀까지 꾸렸다.
경력에 어울리는 경험과 재능까지, 삼박자를 두루 갖춘 실력파 헌터건만, 그의 모든 동선이 읽히며 농락당하고 있었다.
더욱 충격적인 건, 그 와중에 자신의 팀원들까지 상대하고 있단 점이었다.
‘말도 안 돼!’
접근만 하면 게임 끝이라고 여겼건만, 벽을 넘으니 더 큰 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봤다.
‘이 파괴력은 또 뭐고?’
A급 헌터의 가드를 뚫고 이만큼의 충격을 전달하는 파괴력이라니, 저 총기도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저런 걸 저렇게 자유롭게 부린다고?’
반동이 어마어마할 것이건만, 저 매끄러운 움직임은 뭐란 말인가.
마루가 무희처럼 춤추며 그의 팀원들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고 또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그러다가 한 번씩 방아쇠를 당기면?
투웅… 퉁….
퍼퍽….
핏물이 비산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게 이런 걸까?
간격 조절도 능숙했는데, 건가드의 총기 액션이라 무조건 거리를 벌릴 거란 예상을 뒤집듯, 수시로 반전하며 달려드는데, 그 타이밍도 실로 절묘해서 당혹감에 호흡을 뺏기며, 수시로 카운터를 내주고는 했다.
게다가 근접전을 활용하는 방법도 알았다.
“죽어!”
팀원 중 한 명이 폭발하듯 일격을 내지르는데, 훌쩍 파고든 마루가 이를 잡고 비튼 뒤, 마치 방패처럼 그를 휘감고 빙그르 돌며 주변을 경계했다.
그 때문에 한 차례 팀원들의 진입이 가로막히고, 이를 통해 간격들을 확인하는 한편, 잡고 있던 팀원을 꾸준히 비틀고 뒤집어 가며, 관절을 박살 내 놨다.
뿌득, 빡… 뻐걱!
“끄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올 즈음, 마무리로 권총이 불을 뿜고, 이에 발끈하는 팀원들을 향해 고기 방패처럼 내던져 버린다.
거기에 흥분하면 안 되건만, 더욱 열을 내는 팀원들이 두서없이 달려들고, 앞서 상황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맙소사….’
마츠루는 언덕 가득 너부러진 시체를 확인했다. 과할 만큼 많은 죽음의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그의 팀원만이 아니라 다른 팀원들도 하나둘 올라오고 있었건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더욱 속 터지는 건 마루의 태도였다.
퉁… 투웅… 투우우웅….
연달아 터지는 저 총격은 그들에게 쏟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불청객 한 명을 인질처럼 잡은 채 빙그르르 한 바퀴 도는 건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시야에 담기는 건 달랐다.
주변 근거리가 아닌, 언덕 아래의 원거리를 살피며 저격 포인트를 캐치한 뒤, 인질의 어깨를 지지대 삼아 총기를 세우고, 그대로 연사를 쏟아 버리는 것이다.
여러 영상에서도 확인한 바 있는 놀라운 명중률은, 그 엉성한 지지대를 앞세우고도 엄청난 정확도를 보여 줬다.
근거리와 원거리, 둘 모두를 컨트롤하면서도 판을 휘어잡고 있었다.
‘저게 B급이라고?’
A급이라 해도 믿을 것이건만, 골 때리는 건 분명 모든 움직임들이 그의 기준점보다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막막하기만 한 이유가 뭘까?
‘설계….’
건가드의 핵심을 새삼 떠올렸다.
그를 비롯한 수많은 불청객들이 죄다 마루의 꼭두각시가 되어 놀아나고 있다는 의미였다. 자존심이 팍팍 깎여 나가는 소리였다.
결국, 참지 못한 그가 울분을 터트리듯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타앙…….
* * *
모든 게스트가 깜짝 놀랐다.
“얼음여제?”
“이선희라고?”
“어디서 온 거야?”
“분명, 위에서 떨어졌는데.”
수많은 랭커들이 그 날카로운 안력으로 밤하늘을 살피는 가운데, 누군가가 탄성을 뱉으며 손을 뻗었다.
“엇! 저거….”
그제야 발견할 수 있었다.
“드론?”
“허… 저렇게 높은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건가.”
“재주도 좋군. 그리 커 보이지도 않은데.”
“저 작은 걸 타고 있었다니. 포스 운용 능력이 상당한 모양이네.”
“섬세한 작업은 내 스타일이 아니라 그런지, 좀 부럽네.”
연달아 터져 나오는 감탄의 물결 사이, 은밀한 눈치 싸움이 이어졌다.
‘피닉스를 도우러 여제가 나왔으니, 발록의 지원군도 나서겠지?’
‘발록의 구원 타자가 누굴까?’
‘누구냐?’
‘자, 어서 나서라!’
모여 있는 무리들 중, 발록의 숨겨진 인맥이 발동하리란 기대감에 서로를 살피는 것이었다.
물론, 이 자리에 모든 랭커가 모여 있는 거라고 확신할 순 없었다. 당장 이선희만 하더라도 저 높은 하늘에서 드론을 타고 떨어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일말의 가능성은 남아 있기에, 서로를 향한 감시의 눈초리가 질척하게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저 멀리 전장의 분위기가 돌변하기 시작했다.
* * *
이선희는 냉기를 뿜어 이선을 응급조치한 뒤, 사납게 기세를 일으키며 발록을 돌아봤다.
그의 상처를 보고 있노라니, 괜히 더 가슴이 답답해지며 발록을 박살 내고 싶은 열기가 들끓었던 것이다.
이 모습에 발록이 입맛을 다시는가 싶더니, 기세를 한껏 일으켰다.
“하… 외로운 솔로몬의 분노를 자극하는군.”
멀리 게스트들이 이곳 전장을 살피는 걸 알았는데, 그곳에 끼어 있을 몰래 온 친우에게 수신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대기.
피닉스로 인해 제법 지치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 포스 잔량은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격돌!
쿠우우웅….
불과 얼음, 그 두 가지 기운이 어울리며 뒷산을 새롭게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문득, 발록의 눈가에 이채가 스쳤다.
이선희가 거리를 두기보단 오히려 달려들며 근접전을 시도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하! 감히, 날 상대로?’
악마의 갑주가 한층 흉흉한 형상으로 타오르며 이선희를 공격해 들어갔다.
양팔과 양다리만이 아니라, 날개와 꼬리 때론 날카로운 뿔을 이용한 박치기까지, 발록의 공격 패턴은 실로 다양했다.
하지만 이선희 역시 만만치는 않았다.
그녀 역시 근접전의 스페셜리스트를 상대로 단련된 몸이었다.
이반나와 김연희!
특히, 신체 변형 능력자인 이반나로 인해, 뿔과 같은 이형의 공격에 대해서도 제법 통달해 있는바, 무리 없이 막고 쳐 내며 반격까지 이어 나갔다.
그 와중에 조금씩 그들의 격전지가 이동을 거듭하는데, 멀찍이서 지켜보던 관전자들은 단번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뜬금없이 웬 근접전인가 했더니, 피닉스 때문인가.”
“발록이 비겁하게 부상자나 치는 인사는 아닌데.”
“모르는 소리 한다.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라. 이런 거 안 배웠어? 비겁이니 뭐니 언급할 거면, 부상자를 상대로 판을 띄우면 안 됐지.”
“하긴… 그렇다 치더라도, 발록을 상대로 근접전이라니. 대담하군.”
“크으~! 저게 바로 사랑의 파워지.”
“지랄한다.”
그렇게 관전자들이 이런저런 의견을 내어놓는 가운데, 발록과 이선희의 결전에 급작스러운 반전이 발생했다.
“크아아압!”
발록이 크게 한 방 내지르는가 싶더니, 대뜸 거리를 두며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이에 가드와 함께 튕겨 났던 이선희가 급히 자세를 바로잡으며 재차 달려들 준비를 하는데, 발록이 손을 뻗어 외치며 그녀의 접근을 막았다.
“거기까지!”
무슨 뜻일까?
그 의도를 살피고자 이선희가 눈매를 얇게 띄우며 발록을 관찰하는데, 놀랍게도 그 시점에서 발록이 포스를 거둬 버렸다.
사르르륵….
불길이 사그라지고 악마의 갑주가 모습을 감췄다.
이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가운데, 발록이 입을 열었다.
“충분히 한 것 같네.”
뜬금없는 소리에 의문만 내비치는 가운데, 발록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 정도면 계약서는 충분히 이행한 것 같다고. 계약서는 피닉스만 정리하면 된다고 했는데, 랭커가 둘이나 튀어나오는 건, 계약에 없는 내용이야.”
그러며 이야기한다.
“피닉스도 작살내 놓은 것 같으니. 이 정도면 대충 계약 이행 아닌가?”
누구에게 묻는 건지 알 수 없는 질문 끝에, 발록의 어깨 위로 다시금 악마의 갑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개별 변형을 통해 날개만 뽑아낸 것인데, 그 거대한 날개가 크게 펄럭거리더니 발록의 육신을 띄웠다.
그렇게 허공중에 떠오른 발록이 이선희를 바라본 뒤, 멀리 경계 중인 이선까지 한눈에 담은 뒤, 입맛을 다시며 신형을 돌렸다.
“아… 시리다.”
왠지 옆구리가 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