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파이널.
#20. 파이널.
황당한 상황이었다.
‘그냥… 그렇게 갔다고?’
갑작스러운 반전에 이선희와 이선이 벙쪄 있는 사이, 발록 혼자 멋대로 주절대는가 싶더니, 그대로 훌쩍 날아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당장의 포인트는 하나였다.
전투는 끝났다.
이선희의 등장으로 주변 온도가 대폭 감소하긴 했지만, 여전히 군데군데 남아 있는 불길과 연기로 인해, 시야가 흐리고 분위기가 어지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연인들은 정확히 서로를 향해 시선을 날려 보냈다.
타닥… 타닥….
곳곳에서 불똥이 튀며 그들의 어색한 침묵에 작은 사운드를 집어넣는 가운데, 문득 이선희가 발길을 돌렸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이선이 외쳤다.
“희야!”
너무도 오랜만에 듣는 그리운 음성과 그리운 호칭이었다. 그녀가 입술을 짓씹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병신같이… 처맞고 다니기나 하고.”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뒷모습만 보여 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선은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의 부름에 응해 줬기 때문이다.
거칠지만 저 걱정 어린 내용을 보라, 콩깍지가 씌었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마치 천상의 하모니가 들려오는 듯, 너무도 감미로운 음성이었다.
게다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야?”
가는 날까지 묻고 있었다.
“파… 팔이 다 나으면.”
그제야 한 번 돌아보는가 싶던 그녀가 그의 오른팔을 한차례 살피더니, 이내 휙 고개를 돌리며 그대로 멀어져 갔다.
이번에는 이선도 막지 못했다.
짧은 대화를 통해 이게 끝이 아님을 직감한 까닭이리라. 가슴을 두드리는 이 기묘한 두근거림이란, 아마도 ‘희망’이라 불리는 녀석이 아닐까?
* * *
슬슬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더는 안 돼!’
불청객들은 짙은 패배감 속에 더는 나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고, 인정해야만 했다.
‘졌다!’
그러며 떠오르는 건 하나뿐이었다.
‘도망쳐야 돼.’
후퇴라는 단어만이 그들 머릿속을 가득 두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죽음의 골짜기가 깊어짐을 알았기에, 이제는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몇 명의 동료가 살아남았는지, 더는 살필 수도 없었다. 실제로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 명확한 판단을 내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저 두려움 속에 몸부림만 치다 결국 뒷걸음질을 치고, 등을 보이더니 이 휘황찬란한 빛무리 속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멀리 더 멀리,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마루는 그들을 굳이 저격하진 않았다.
“죽인다!”
“으아아아!”
그를 덮쳐드는 여러 불청객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어느 정도는 살아 나가서 소문을 퍼트릴 스피커가 필요했다.
생생한 현장감을 고스란히 전파하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는 살려 보내야 하는 것이다.
저들이 느꼈을 공포심은 오늘의 사건을 배로 뻥튀기시키며, 그의 존재감이나 무게감 등을 크게 부풀릴 터였다.
“폭스, 이 교활한 놈!”
“가만두지 않겠다. 이 비열한 머글 새끼!”
게다가 이제는 그도 맘 놓고 저격하기가 어려워진 상황이기도 했다.
꾸역꾸역 올라와 지금까지 버티고 남은 이들의 경우, 하나같이 A급의 최정예들이었고, 그런 만큼 한눈을 팔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들의 메인 이벤트는 지금부터였다.
* * *
피닉스와 발록의 대결이 흥미진진하긴 하나, 수많은 랭커들은 마냥 그 격전에만 집중하진 않았다.
때론 그 둘의 대치 기간도 이어졌고, 한편으론 의미 없는 추격전도 빈번히 발생하다 보니, 틈틈이 또 다른 흥미 요소로 시선을 돌리고는 했는데, 그게 바로 마루의 건가드였다.
“저 솜씨는 정말 미쳤다는 말밖에 안 나오는군.”
그들과 같은 랭커들에게도 감탄을 불러오는 수준이었다.
“정말, B급이 맞나?”
“몸놀림을 봐선, 등급은 맞는 것 같네.”
“아무래도 몸뚱이는 B급이지만, 대가리는 A급은 넘어 뵈는데.”
“각성한 지 이제 1년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포스양이 부족해서 승급을 못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흠… 확실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네.”
때때로 그런 이들이 존재하긴 했다.
남다른 깨달음을 얻어 포스 활용법은 자신의 등급을 넘어서건만, 포스 축적량의 한계로 인해 벽을 넘지는 못하는 이들로, 자격증에 찍힌 등급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재주는 일찍부터 있었잖아.”
“복잡하게 생각할 거 있나. C급부터 대가리가 깨어 있던 모양이지.”
“그건 그것대로 골 때리네.”
“뭐가 됐건, 대단한 놈인 건 확실해.”
“존슨이 아무하고 어울리진 않잖아.”
“하긴….”
“저놈, 크게 될 놈이야.”
이어지는 전투도 놀랄 거리가 넘쳐났다.
“허… 시야 좀 보게. 뭐가 저렇게 넓어?”
“눈깔이 따로 놀기라고 하는 건가? 아니, 눈앞에 닥친 놈들 살피기도 정신없을 텐데, 저 와중에 저격 타이밍까지 쟀다고?”
“와… 미친놈인가?”
“저게 B급이면, 우리 팀 저격수는 폐급이겠네.”
“동감!”
“인정!”
랭커들이 새로운 파이널을 즐기는 것과 달리, 멀록은 앞서 발록이 사라져 간 하늘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어디로 갔으려나?’
정보 계열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탓인지, 자꾸만 그의 뒷모습을 쫓게 되는 것이다.
몰래 뒤를 추격할까도 싶었지만, 이 타이밍에 갑자기 빠졌다간 괜한 눈길을 끌 수도 있던 터라, 적당히 어울리기로 했다.
‘뭐, 차분히 확인하면 되겠지.’
대충 예상되는 목적지가 있었다. 게다가 갑자기 발을 뺀 이유도 짐작 가는 터라, 여러모로 급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멀록 역시 또 다른 파이널 무대로 시선을 돌리는데, 마침 분위기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오~! 저거 탄창 치기 아닌가?”
“허… 저걸 실전에 쓰는 놈이 다 있네.”
“진짜 건가드가 아니라 건어택이다.”
탄창 치기 혹은 매거진 샷으로도 불리는 그건, 말 그대로 탄창으로 적을 공격하는 것으로, 탄창을 교체할 때 몸의 회전력과 손목의 스냅, 반동 등으로 쏘아 내는 기술이었다.
건가드로 이름깨나 날리는 달인들도 실전에선 불가능하다 이야기한 기술로서, 그들 역시 가만히 서 있는 허수아비를 상대로 보여 준 정도가 전부였다.
“하나도 아니고, 두 개를 동시에 친다고?”
“와… 진짜, 미친놈이네.”
달인들도 양손으로 하나의 탄창 치기를 보이는 게 전부였건만, 마루는 손목의 비틀림과 절묘한 양손의 교차 반동을 통해, 두 개의 탄창을 탄환처럼 쏘아 낸 것이다.
그 때문에 탄창 교체 타이밍을 노리며 달려들던 습격자들도 한 방씩 맞으며, 일제히 바닥을 뒹굴어야만 했다.
“저게 가능한 거였냐?”
“와… 건가드가 저렇게 멋진 기술이었나?”
“자꾸 배우고 싶게 만드누?”
“한번 교관으로 초빙하고 싶네.”
관전자들은 이면과 외부의 랭커들이 두루 섞여 있는 상황이었다. 그 말인즉, 마루는 세계의 안팎으로 알차게 명성을 새겨 넣고 있단 의미이기도 했다.
“건가드가 전부는 아닌 것 같은데.”
“격투기도 전문가 이상이야.”
“온몸이 무기네.”
마지막 탄성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온몸에서 무기가 솟구치기에 나온 말이었다.
발목을 비틀어 차는 기이한 모습에 의문을 품는 순간, 발끝에서 칼날이 솟구치며 비수처럼 파고들었고, 거미인간 영화처럼 손목을 꺾을 땐, 손목에서 장침이 발사되는 등, 전신에 다양한 무기를 골고루 착용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1년 전까진 비각성자였지.”
랭커들은 새삼 깨달았다.
그의 전투 곳곳에서 비각성자의 고뇌가 담겨 있었고, 그만큼 신선한 풍경을 그들에게 선사해 줬다.
여러모로 마루의 이름값이 높아져 가는 가운데, 어느새 파이널 무대도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 * *
1000스탯 효과라고 해야 할까?
마루는 S급으로 승급을 한 건 아니었지만, 미묘한 벽 하나가 깨지는 걸 느꼈다.
덕분에 신체 감각이 한층 예리해지기도 했는데, 감각계 스킬을 발동하지 않았음에도, 오감이 예리하게 날을 세우는 걸 느낄 정도였다.
그의 감각권 안이라면, 굳이 [삼시새끼] 스킬을 발동할 필요도 없이, 360도 모든 영역에 걸쳐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집중하면 심장 박동 소리마저 들릴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이를 통해서 꾸준히 상대의 호흡을 읽고, 들숨과 날숨을 절묘하게 이용해가며 타이밍을 빼앗는 건 일도 아니었다.
분명 A급으로 이뤄진 최정예들의 연수합격이건만, 그리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합지졸들.’
개개인의 실력이 뛰어난 사실이다.
하지만 저들은 각기 따로 행동해야 빛을 발하는 이들이었다. 맞지 않는 기호들을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으니, 층층이 부실하게 쌓인 테트리스처럼, 듬성듬성 빈틈이 넘쳐 났다.
상대의 호흡까지 읽어 내는 상황에, 그 같은 불협화음을 놓칠 이유가 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습격자 둘의 동선이 꼬인 듯, 동시에 들어오다 주춤하며 한 호흡씩 서로에게 미루는 게 보였다.
‘옳지!’
마루는 바로 그 같은 타이밍을 노리며, 그 둘 사이로 정확히 파고들었다.
이에 습격자들이 깜짝 놀라며 각기 손발을 놀리지만, 서로를 의식하고 있는 탓인지, 둘 사이로 미묘한 간격이 남아 있었다.
‘길을 열어 주네.’
그 사이로 쏙 빠져나가며 쌍권총을 갈겼다.
타타탕….
그래도 A급 실력자라고, 각기 포스를 끌어 올리며 방어하는데, 급히 끌어 올린 포스의 여파로 내부가 진탕되는 듯,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이처럼 듬성듬성 드러난 빈틈을 공략하니, 판세를 휘어잡는 건 일도 아니었다.
‘차라리 한 명씩 달려드는 게 더 위협적이겠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저들의 합은 엉망이었다.
최정예의 실력자들을 상대로 B급의 제약을 걸고서도 이런 우위를 보일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나름대로 경력자들이다 보니, 차분히 내버려 두면 손발이 제대로 섞여 들겠지만, 마루가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투웅… 퉁….
쌍권총이 쉼 없이 불을 뿜었다.
‘어쭈? 어디서 감히 손발을 맞추려고.’
꾸준히 끼어들며 저들의 호흡을 흔들어 놨다.
이를 위해서 사용한 방법도 다양했는데, 만약 저들이 건가드에 적응하는 기색을 보인다면?
‘단검술도 있다 이거야.’
과감히 무기를 바꿔 들며 겨우 맞춰 놓은 간격을 재조정했다. 물론, B급 몸놀림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보니, 이 타이밍에 들어오는 타격이 상당했다.
퍼퍽! 퍽! 퍼억….
하지만 이 역시 완충제가 버티고 있었다.
[+3 드래고니안]
무려 강화석 7개를 투자한 강하나의 걸작이 그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몽크 특유의 강건한 육체 덕분인지, 신체 본연의 방어력도 남달랐던 터라, 실제 대미지는 얼마 되지 않아서, 억지로 아픈 연기를 해야 할 정도였다.
“으윽… 읍… 크흡!”
그의 신음성에 옳다구나 싶어 달려드는 놈들의 경우, 기다렸다는 듯이 땅거죽을 뒤집어 줬다.
파아아악….
“으악! 이 비겁한 놈. 치사하게 흙을… 크윽!”
발광하는 놈에게 어느새 빼든 쌍권총으로 깔끔한 헤드샷을 먹여 준 뒤, 다시금 건가드 액션으로 턴을 전환했다.
게다가 건가드 자체적으로도 변화가 다양했다.
차각, 착, 처거덕!
간단히 총기를 만져 주니, 권총이던 물건이 어느새 소총이 돼선 간격을 새롭게 조작했고, 달려들던 이들로 하여금 거리감에 대한 오류를 발생시켰다.
“이런, 젠장!”
“무슨 저따위 총이 다 있어.”
건가드는 권총에 특화된 스킬이니 만큼,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상황이 또 그렇지만도 않았다.
“저거, 설마 칼이냐?”
“총에 날붙이라고?”
사실, 이는 기존에는 없던 기능으로서, 결전을 대비해 강하나에게 따로 부탁한 거였다.
덕분에 소총이면서 검의 형태마저 취하고 있었다.
쌍권총에서 쌍검으로 변화하는 모습에, 습격자들의 당혹감도 한층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쥔 채, 검도 유단자의 솜씨를 한껏 선보이다가도, 다시 쌍권총으로 돌아와 건가드 달인의 면모를 보여 주니, 습격자들도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도통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렇게 마루가 짜 놓은 시나리오에 맞춰,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이, 점차적으로 포위망이 옅어졌고, 그렇게 무대는 종막을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