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랜덤 박스.
#3. 랜덤 박스.
워리어 팀과 프링쿨스 팀!
그들 전투는 상당 부분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워리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주변을 돌아봤다. 한껏 헐떡이는 팀원들이 보였다.
밀리고 있는 것이다.
무려 랭커 4인의 팀 중에서도 최정예만 모인 파티가 아니던가. 상대 역시 정예 중의 정예인 프링쿨스 팀이라지만, 이 정도로 격차가 날 거란 생각은 못 했다.
하물며 여기는 랭커까지 끼어 있지 않던가.
‘토비!’
그의 시선이 상대편의 리더에게 닿았다. 마침 그쪽도 눈길을 보내오는 터라, 둘의 시야가 허공중에 어지러이 얽혔다 떨어졌다.
언뜻 눈가에 스쳐 가는 비웃음이, 그를 발끈하게 만들었지만, 애써 화를 억눌러야만 했다.
현재 중심을 잡아 줄 수 있는 건 그밖에 없었다.
분명히 대단한 팀의 팀원들이 모인 건 맞지만, 각자 개성이 너무 강한 게 탈이라고 해야 할까?
각 팀의 리더가 있을 땐 모르겠지만,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각각의 개성이 맞부딪치며 점차적으로 불협화음을 이끌어 내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프링쿨스 팀의 경우, 개개인이 실력자인 것도 확실하지만, 오랜 시간 마굴의 심처를 돌며 합을 맞춰 온 만큼 손발이 딱딱 맞았다.
숫자는 이쪽이 월등하건만, 팀의 단합력에 의해 조금씩 뒷걸음질 횟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느낌이 왔다.
‘이러다간 지겠네.’
일선에 나서야 한단 생각이 들었다.
그가 지휘에서 손을 놓는다면 이 오합지졸들은 더더욱 멋대로 날뛸 게 분명하지만,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면, 그래도 나름대로 손발을 맞추는 노력 정도는 할 거라 믿었다.
특히, 그의 팀원들에게는 강렬한 눈빛으로 경고를 보내 주며, 좀 더 노력하라 무언의 압박을 넣어 줬다.
‘우리 애들이 손해를 보더라도, 여기선 맞춰 주는 게 맞지.’
그러며 성큼 전진하는데, 이에 반응하듯 프링쿨스 팀 역시 변화를 보였다. 토비를 비롯한 몇몇이 함께 나서고 있었다.
워리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느낌이 안 좋은데.’
자신만만해 보이는 저들 눈빛에서, 이마저도 쉽지 않을 거란 예감이 스쳐 가는 가운데, 기왕 내친걸음 더더욱 과감히 전진하다가, 이내 화살처럼 신형을 쏘아 보냈다.
* * *
기간트와 이반나는 둘 다 강화계의 신체 변형 능력자다 보니, 이능계의 전투처럼 화려한 맛은 떨어졌다.
하지만 그 이상의 박진감은 넘쳐 났는데, 매 순간 전력으로 부딪치는 그들의 격전이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주먹을 움켜쥐게 만드는 짜릿한 맛이 있었다.
콰앙! 쾅… 콰아아앙!
힘 대 힘의 격돌이 연달아 이어지는 와중에 이반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쳇! 무식한 새끼.’
그녀 본인도 힘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건만, 아무래도 기간트에게는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면에서 괴력은 역시 기간트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듯,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결국, 일부분 태세 전환을 하며, 평소와는 다른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그녀가 좀 더 저돌적으로 달려들었겠지만, 이번만큼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이. 반. 나! 도망. 겁쟁이!”
기간트의 도발에 발끈해서 다시금 전진할 뻔했지만, 노련한 그녀의 경험치는 흥분하는 와중에도 알아서 간격을 조절해 줬다.
마치 인파이터와 아웃복서를 보듯, 둘 사이의 대결 양상에 변화가 발생했다.
이렇게 거리감을 두기 시작하니, 자연스레 그들의 전장도 범위를 넓힐 수밖에 없었고, 이즈음부터는 작정하고 주변 일대를 폭풍처럼 몰아치며 박살 내기 시작했다.
파팡… 파파파팡!
무겁게 전직하는 기간트와 가벼운 풋워크를 써 가며 그 주위를 빙빙 도는 이반나의 격돌 속에서, 산타카타리나의 마굴 한 구역이 통째로 망가지고 있었다.
* * *
사실, 그림리퍼는 온전한 멀티 스킬 각성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반쪽짜리지.’
존슨을 통해 처절한 패배를 겪은 뒤, 매일 밤 그의 악몽을 꾸게 된 탓일까?
그의 그림자를 걷어 내기 위해 수련을 거듭했다.
더 강해진다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그를 폐관으로 이끈 것이다.
하지만 이미 초인의 경지를 이뤘던 상황이다 보니, 새로운 도약이란 게 쉽지 않았고, 하루하루 피 말리는 고행의 시간이 계속될 뿐이었다.
그러다가 뜻밖의 성과를 얻었다.
‘스킬의 진화를 노렸던 건데.’
그게 의외의 결과로 이어졌다.
바라던 진화를 이룬 건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스킬에 숨겨져 있던, 그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새로운 기능을 깨닫게 됐다.
바로 모방이었다.
사신의 낫으로 흡수한 사기, 망자들의 기운을 통해, 그 기운의 본체가 생전에 지니고 있던 능력을 일정 부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능력의 발현이 가능한 건 아니었다. 흡수된 사기의 농도가 얼마나 짙고, 또 거기에 담긴 본체의 기억이 얼마만큼 남아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현재 그의 육신을 변화시킨 건 오우거의 괴력으로, 이 근방에서 가장 진하게 남아 있던 사기의 형태였다.
만약, 본신을 고스란히 따라 했더라면, 기간트의 거인화처럼 3~4미터의 거구가 됐겠지만, 능력 자체가 일부분만 흉내 내는 것이다 보니, 왜소했던 체구가 레슬러처럼 부푼 정도에서 그친 것이다.
하지만 그 능력은 상당 부분 따라잡아, 말도 안 되는 괴력을 발휘하는 게 가능했다.
‘이런, 미친!’
마루는 바위를 공깃돌처럼 던져 대는 그림리퍼의 모습에 기겁하며 이리저리 몸을 날렸다.
쿠웅… 쿵… 쿠우우웅….
그가 머물던 자리로 떨어지는 집채만 한 바위들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등골이 오싹해질 지경이었다.
맘 같아선 완전히 물러나서, 저 말도 안 되는 공깃돌의 사거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주변 가득 일렁이고 있는 검은 불길 때문에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일종의 결계로 보였는데, 작정하고 힘을 쓴다면 부수고 나갈 수 있겠지만, 그림리퍼가 이를 보고만 있진 않았다.
드득… 드드득….
‘젠장!’
발밑에서 전해지는 진동에 마루가 급히 신형을 솟구쳐 올렸다.
파파파팍!
그와 동시에 지면을 뚫고 올라온 가시덩굴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멀티 능력자라는 것도 놀랍건만, 그림리퍼는 실로 다채로운 능력을 발휘하며 그를 괴롭히려 들었다.
공중에 부유하는 시간이 길면 위험했다.
“후웁!”
몸을 비틀어 튕기는 순간, 그가 있던 자리로 사신의 불길이 지나갔다.
‘어쩔 수 없나.’
더 이상 피하기만 해선 답이 없다는 결론 아래, 마루가 착지와 동시에 자세를 가다듬었다.
기세가 돌변하는 가운데, 공기가 변했음을 읽은 것일까?
그림리퍼 역시 한 차례 호흡을 정돈하는 게 보였다. 그러며 슬쩍 시선을 던져 오는데, 마루는 급히 이를 피했다.
저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경직 현상이 발동하는 걸 수차례 겪은 까닭이었다.
‘멀티 능력자는 까다롭네.’
이래저래 신경 써야 할 게 많다는 생각에 눈살을 찌푸리는데, 사실 이는 스킬이 아닌 ‘아티팩트’의 능력이었다.
그림리퍼가 착용 중인 가면이 지닌 특수 효과로서, 사기 충전이 이뤄지기 전까진 본신 능력이 일부분 반감되는 탓에, 이런저런 물품들로 초반의 불리함을 채워 넣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가면만이 아니라, 후드티를 비롯하여 착용 중인 복장 대부분이 숨겨진 아티팩트들이었다.
마루는 이를 멀티 스킬의 일부로 오해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이 다양한 아티팩트로 인해 멀티 스킬에 대한 의심을 지워 버리고는 했다.
그림리퍼가 맘 놓고 능력을 보일 수 있는 이유였다.
물론,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탓에, 마루는 한층 신중한 모습으로 그림리퍼를 관찰하며, 돌격을 준비했다.
잠시간 이어진 침묵에 의해 공기가 무거워질 즈음, 마루가 움직였다.
[발진]
가속의 상위 스킬과 함께 신형을 쭈욱 쏘아 보냈다. 간격을 재고 있던 그림리퍼가 사신의 낫을 휘둘렀다.
그 순간 마루가 재차 가속했다.
[급발진]
발진의 변형 스킬이었다.
사악!
사신의 낫이 그를 베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는 잔상이었고, 마루의 본체는 단숨에 거리를 좁혀 그림리퍼의 품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파박! 팍, 파바바박!
어지러운 타격전이 이어졌다.
간격을 허락한 순간 그림리퍼는 낫을 던지며 양손으로 응수하는데, 짧게 이어진 공방 속에서 마루는 좀 더 깊이 파고들 필요성을 느꼈다.
상대가 박투술에도 조예가 깊다 여긴 것인데, 손발을 섞으며 전해 받은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딱 타격까지구나!’
제로 거리의 질척한 근접전을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때문에 그는 조금이라도 더 파고들려 노력했고, 그림리퍼는 이를 막으며 밀어내려 노력했다.
[잠력][철골][가속]
급발진 스킬로 인해 발진 스킬의 쿨타임이 늘어져 버린 터라, 하위 버전인 가속으로 신형을 쭈욱 당기는 한편, 잠력을 폭발시키며 가속에 힘을 실었다.
그 와중에 이어지는 단단한 몸통 박치기가 포탄처럼 쏘아지니, 결국 단단한 가드를 뚫고 그림리퍼의 품 안으로 안겨들 수 있었다.
쿵!
묵직한 충격이 어깨를 타고 넘어오는 와중에, 마루는 깜짝 놀라야만 했다. 마치 바위에 몸을 던진 것 같은 충격이 밀려든 까닭이었다.
그림리퍼가 오우거의 괴력만이 아니라 단단함까지 훔쳐 온 탓에, 그의 몸뚱이는 그 자체로 병기나 다름없던 것이다.
이를 알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루는 오우거를 상대하던 기억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그 흐름을 상기하듯, 온몸으로 관절을 압박하며 조르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격렬한 관절 브레이킹!
빠각! 빡! 뿌드득….
“크흐으읍!”
그림리퍼의 신음성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문득 마루는 등줄기를 관통하는 섬뜩한 예감을 받았다.
파악!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림리퍼를 놓고 바닥을 구르며 물러나는데,
서걱!
등허리가 뜨끔해지며 아찔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커헉!”
사신의 낫이 쭈욱 날아와 등판을 크게 베고 지나간 것이다. 마루는 이해할 수 없단 얼굴로 그림리퍼를 바라봤다.
좀 전의 일격은 그뿐만이 아니라 그림리퍼 역시 상처를 남긴 탓인데, 흔히 말하는 같이 죽자의 동귀어진 형식의 공격이나 다름없었다.
복부의 관통상에다 관절기로 인해 망가져 버린 팔뚝까지, 분명 정상이 아닌 상태건만, 기이하게도 예감이 좋질 않았다.
가면 너머 초승달처럼 휘어져 있는 그림리퍼의 눈매 때문이리라.
우드득… 뚜둑… 뜨득!
아니나 다를까.
‘저건 또 뭐야?’
그림리퍼의 팔에서 불편한 소음들이 연달아 울려 퍼진다 싶더니, 이내 멋대로 꺾여 있던 팔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게 보였다.
놀라운 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상처까지?’
복부의 관통상에서 줄줄 새 나오던 피가 줄어드는가 싶더니, 이내 깔끔히 봉해지는 것이 아닌가.
‘허….’
황당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입이 쩍 벌어지는 가운데, 그림리퍼가 입을 열었다.
“후후! 이런 재주는 없나 보군요?”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는데, 실제로도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도 즐거웠다.
오직 그 혼자라 여겼던 다중 스킬 보유자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랭커임에도 불구하고 몸을 사려야 할 만큼 특수한 상황이다 보니, 이런저런 위장 속에서 어렵게 재주를 피울 뿐이었건만, 눈앞에 그와 같은 재주를 지닌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물론, 둘 사이의 차이가 분명하긴 했다.
마루의 경우에는 명확한 스킬이 정해져 있는 듯싶지만, 그는 주변 사기에 영향을 받는 만큼, 일종의 ‘랜덤 박스’ 같은 느낌이 강하다고 할까?
‘다양성으로 따지면 내가 윗줄이지. 후후!’
조금 전, 그의 육신을 원상 복구시킨 건 트롤의 재생력이었다.
이런 마굴에 들어올 경우, 가장 먼저 수집하는 게 바로 재생이나 회복 관련한 몬스터의 사기였다.
‘안정 장치 확보가 최우선!’
유통 기한이 명확하다 보니, 수시로 재수집이 필요하지만, 이를 잘 컨트롤한다면야 활용 폭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는 흥미롭단 얼굴로 마루를 관찰하며 입맛을 다셨다.
‘몇 가지 스킬을 보유하고 있으려나?’
지금껏 보여 준 것들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계산하는데, 그 모습이 실로 즐거워 보였다. 분명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기이할 만큼 표정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 때문일까?
반대로 마루의 표정은 한껏 구겨지고 있었다.
‘젠장! 기분 잡치게 하네.’
결국 손해를 봤을 뿐만 아니라, 상대에게 농락당한 기분까지 느낀 까닭인데, 새삼 제퍼드와 맞서던 때를 상기해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당시에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부었던 걸 떠올렸다.
‘…내가 미쳤었네. 랭커를 상대로 여력을 두려 했다니.’
그는 비장의 카드를 떠올리며 밑장을 뺐다.
사악….
조용히 소리 없이, 그의 ‘아공간’에서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저리 수풀 사이를 타고 넘으며 리퍼의 시야를 어지럽히는 사이사이, 아공간의 물건들이 바닥에 좌르륵 깔리기 시작했다.
제퍼드에게 한 방 제대로 먹여 줬던 수많은 화약물이 수풀 속에 지뢰처럼 깔려 가는 가운데, 그의 손에 색다른 물건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언뜻, 포스트잇처럼 보이는 종이 쪼가리였는데, 시야의 사각지대에 깔아 놓은 지뢰 더미는 사실 이를 위한 일종의 밑밥 작업이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가면 너머 리퍼의 눈가에 호기심이 짙어졌다.
‘이번엔 또 뭐를 보여 주려나.’
한껏 오른 기대감 때문일까?
최초의 목적은 잊어버린 채, 그는 이 상황을 즐기며 빠져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