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리퍼.
#5. 리퍼.
사실, 성직 계열과 주술계는 제법 성향이 잘 어울리는 면이 있었다.
도가나 불교처럼 주술사 유저들도 수양을 기반으로 스킬을 발동시키는 탓인데, 굳이 파헤치자면 성력으로 도력 및 법력을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같은 의미에서 본다면, 마법 계열과는 상성이 좀 안 맞는 면도 있었는데, 마력과 성력이 지닌 본질적인 거리감에 의한 문제로, 신성 마법과의 연동을 통한다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긴 했다.
어쨌든 그렇게 상성이 맞는 주술과의 결합으로 발동시킨 스킬이었다.
‘아니, 이 정도까지 효과를 기대한 건 아닌데.’
그래서 본연의 능력을 잘 끌어낼 수 있을 거라 여기긴 했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그런 예상을 아득히 웃돌고 있었다.
푸쉬쉭….
마치 타이어에 공기가 빠지듯, 부풀었던 리퍼의 육신이 상당 부분 줄어든 것이 보였다. 최초의 왜소한 체격 수준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정 부분 힘이 빠진 것 같은 모습은 분명했다.
‘회복력만 저하시키려고 한 건데.’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남다른 스탯으로 개발된 그의 두뇌가 열심히 일을 했고, 거기서 가장 최근의 정보들이 되새겨졌다.
프링쿨스와 이반나에게 간단히 전해 들었던 4인의 랭커에 대한 정보로, 그중 리퍼와 관련된 내용들이 머릿속으로 재생되며, 지금 이 상황을 파헤쳤다.
[아무래도 그림리퍼는 암살 계열이다 보니, 뱀파이어 퀸처럼 제 능력을 드러내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대충 죽음과 관련된 능력인 건 확실해. 괴상한 낫을 들고 설치는데, 그게 딱 봐도 사신의 낫처럼 생겼거든.]
[어떤 영적인 힘을 사용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등등의 이야기가 오갔는데, 거기서 대충 견적이 나왔다.
사신, 죽음, 부적, 영….
‘복권이 터진 건가.’
비록 진언의 일부라 할지언정, 주술계의 전용 스킬 중 하나인 만큼, 스킬 자체의 완성도 역시 높은 편이었고, 부적 역시 이름난 도사를 통해 제작한 것이 아니던가.
‘초 럭키~!’
언제 구겨졌었냐는 듯, 마루의 얼굴이 활짝 펴지더니 입가에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이제는 리퍼의 표정이 구겨진 듯 보였는데, 가면 너머 서늘해진 눈빛만 봐도 그의 표정을 읽어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갑자기 줄어 버린 몸뚱이를 봤을 때, 그가 지닌 멀티 스킬도 어떤 영적인 연결 고리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
아니나 다를까.
쿠웅!
한 차례 힘과 힘의 격돌이 이어지는데, 앞서의 말도 안 되는 괴력이 더는 전해지지 않았다.
‘할 만한데!’
물론, 여전히 감당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인간적’이란 느낌이 물씬 풍기는 수준이었다.
그림리퍼는 급격히 상황이 안 좋아지는 걸 느꼈다. 남다른 재주를 지녔다지만 앞서도 언급한 바 있듯, 그는 사기의 충전이 이뤄지기 전에는 능력치가 일부분 반감되는 면이 있었다.
굳이 암살 계열 쪽에 몸담고 있는 것 역시 그런 이유가 아니던가.
정면으로 들이받기엔 초반의 준비 과정이 좀 복잡하기 때문에, 설계를 따를 수 있는 암살에 더 특화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스킬적인 특징도 있긴 하나, 어쨌든 현 상황은 그에게 좋지 않았다.
‘몇 장이었지?’
자신의 몸에 스며든 부적의 숫자를 헤아리는데, 몸 곳곳에 일렁이는 문양들을 통해, 대충 견적을 낼 수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이렇게 많은 터치를 하고 갔을 줄이야.’
스물가량의 문양들이 전신에서 일렁이고 있는데, 마치 실지렁이처럼 서로 얽혔다 떨어지는 모양새가 묘하게 혐오스러운 느낌을 줬다.
개별적인 문양이 사기에 주는 영향은 많지 않았지만, 이 많은 숫자가 한 번에 효과를 내니, 사기가 쭉 빠져나간 것이다.
‘단번에 3분의 2가량은 빠져나간 것 같은데.’
가장 많은 사기를 차지하던 오우거의 괴력은 아직 유지 중이지만, 다른 몇몇 스킬들은 더 이상 발동되지 않는 걸 느꼈다.
재생력은 겨우겨우 유지가 되고 있었는데, 반쯤은 억지로 연결 중이다 보니, 그로 인해 유달리 포스 소모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 한다면, 사기를 끌어들이는 건 그의 육신이 아닌, 사신의 낫으로 이뤄지는 행위인지라, 기회만 주어진다면 빠져나간 만큼 채워 넣을 수 있단 점이었다.
물론,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이나 다름없다 보니, 포스의 소비량도 그만큼 뻥튀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즈음부터 리퍼는 자신이 조금씩 밀리는 걸 느껴야만 했다.
‘하… 황당하군.’
겨우 B급 A형 헌터에게 뒷걸음질을 치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상상 못 한 일이었다. 물론, 상대가 보이는 것 이상의 실력자며, 멀티 스킬까지 지닌 특수 개체라는 점이 나름의 변명거리긴 했다.
파파파팡….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타격 거리를 꾸준히 유지한 채 쫓아 드는데, 다행스러운 부분이라면 더 이상의 부적은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이즈음 리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파라라락….
마치 그의 전신이 재차 부푸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며, 입고 있던 후드가 넓게 펼쳐졌다.
아티팩트!
사기가 빠져 버려 기존 멀티 스킬의 효율은 바닥을 치고 있지만, 아티팩트와는 무관한 이야기였다. 지니고 있는 아티팩트를 전부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림자 사슬]
언뜻 후드로 보였던 그건, 사실 형태가 없이 그림자에 스며드는 아티팩트로서, 평소에는 리퍼의 포스를 먹고 후드를 비롯한 여러 모양을 갖추고 있을 뿐이었다.
오로지 죽음을 통해서만이 소유권이 양도되는 아주 독특한 물건이었다.
파파파팍!
너무 가까운 거리에 붙어 있던 까닭일까?
마루는 이리저리 쳐 내며 반항해 봤지만, 결국 수십 갈래로 뻗어져 들어오는 그림자 사슬에 결국 손발이 묶이고야 말았다.
한껏 기운을 끌어 올리며 끊어 내려 노력해 보지만, 리퍼의 포스를 먹고 유지되는 아티팩트다 보니, 쉬이 끊어지려 하질 않았다.
그즈음 리퍼가 사신의 낫을 높이 드는 게 보였다.
우우우웅….
눈에 선명히 드러날 만큼 강대한 포스의 이동이 보였다. 리퍼의 전신을 타고 올라간 기운이 사신의 낫에 빨려들고, 점차적으로 사신의 낫이 거대화했다.
“장난은 슬슬 끝내도록 하죠.”
리퍼가 서늘한 음성으로 입을 열며 마지막을 예고했다.
‘젠장!’
다급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기를 둘렀다.
[사신 변환 ― 현무]
그 순간이었다.
촤르륵… 촤륵…!
마루 그리고 리퍼가 동시에 경악성을 터트렸다.
“헉!”
“이게, 무슨….”
그림자 사슬이 재차 펼쳐지며 마루를 덮쳐든 것인데, 당혹스러운 건 그게 조금 전처럼 고통스럽지 않다는 점이었다.
마치, 그를 감싸 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와는 반대로 리퍼는 묘한 박탈감을 속에 사슬이 떨어져 나가는 걸 느끼는 중이었다.
‘크흐으읍!’
그 흔들림이 포스의 유동에도 영향을 미쳤고, 거대화했던 사신의 낫이 급속도로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더욱 당혹스러운 건, 그렇게 떨어져 나가는 와중에 자신의 포스까지 긁어 간다는 점이었다.
“이… 이게… 으득….”
쫘아아악!
급히 그림자 사슬과의 연결을 끊어 내며 물러나는데, 이미 그즈음에는 상당량의 포스가 갈취당한 뒤였다.
부적에 의한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연달아 들어온 내부 타격이 그의 심력을 크게 소모시키며, 체력까지 크게 깎아 놓았다.
“후웁… 훅… 후우우웁!”
거칠어진 호흡을 정리하는 한편, 전방의 기현상에 주목하는데, 그에게서 떨어져 나간 그림자 사슬이 마치 마루를 보호하기라도 하듯, 그의 전신을 갑옷처럼 에워싸는 게 보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리퍼와 달리, 마루는 조금씩 이 상황을 이해하며 받아들이고 있었다.
‘현무의 기운 때문이구나!’
스킬, [사신 변환 ― 현무]의 흐름에 맞춰, 그림자 사슬의 내부가 일렁이는 걸 느꼈다. 뿐만 아니라 그림자 사슬을 통해 스며드는 기이한 기운이 그의 활력을 채워 주니, 마치 잠력계 스킬을 발동한 듯, 기력이 차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좀 뜬금없긴 하지만….’
마루는 전방을 바라봤다. 비록 가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을 살핀 순 없지만, 들썩이는 가슴과 처진 어깨를 통해, 리퍼가 지쳤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기회였다.
강한 탈력감에 흔들릴 때, 정신없이 몰아붙여야 하는 것이다.
파아앙….
한 걸음에 거리를 좁히는 가운데, 발을 빼는 리퍼의 움직임이 둔해진 게 느껴졌다.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게 확실히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거리가 확 좁혀지는 찰나, 사신의 낫이 급격히 작아지더니 근접전에 어울리는 크기로 줄어드는데, 줄어들며 분열을 하는 것인지, 어느새 양손에 낫을 들고 휘두르고 있었다.
카캉… 카카카캉….
그 크기에 따라 위력도 줄어드는 것일까?
현무와 그림자 사슬 그리고 강화된 드래고니안의 3중첩 방벽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다.
이에 몇몇 공격은 무시하며 과감히 밀어붙였고, 다시금 제로 거리를 잡을 수 있었다.
“큭!”
가면 너머로 당혹감이 깃든 리퍼의 눈빛이 보였다. 앞서 그 여유 넘치던 동공이 불안감으로 떨리는 모습에, 짜릿한 쾌감이 밀려들며 마루의 권격에 힘을 실어 줬다.
파파파팍… 파파팡… 빠바박!
앞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지키며 마루의 거리 조절에 응해 주던 리퍼였지만, 지금은 쉴 새 없이 뒷걸음질을 치며 밀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숨 쉴 틈 없는 공방이 이어졌다.
정말 말 그대로 둘은 한 호흡도 입 밖에 내질 않은 채, 치열하게 부딪치는 중이었다.
그리고 먼저 숨결을 토해 낸 건,
“커허어억….”
리퍼였다.
‘잡았다!’
그 순간 마루가 안광을 빛냈다. 호흡이 빠지는 순간 빈틈이 크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스킬을 확 끌어내며 달려들었다.
[잠력] [철골]….
거기서 한 차례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그림자 사슬이 그의 잠력 스킬에 호응하며 기운을 더해 준 것이다.
화아아악!
기세가 껑충 뛰어오르며 마루의 등을 떠밀었다.
‘이 미친….’
리퍼는 마루의 움직임 속에서 그의 포스를 느꼈다. 좀 전 갈취당한 기운이리라. 왠지 모를 억울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완벽히 파고든 상태에서, 마루의 필살기라 할 수 있는 스킬이 발동됐다.
[필살 ― 약점 검색]
급소만이 아니라 별도 취약점까지 찾아내는 스킬이 그의 손길을 유도하고, 이를 쫓아서 움직이며 현란한 관절 기술이 펼쳐졌다.
뿌득! 빡… 우드득!
이 순간 리퍼는 크게 후회했다.
‘쓸데없이 여유를 부려서….’
멀티 스킬 각성자를 만났다는 사실이 반가워 흥분해 버린 게 실수였다.
그 때문이리라.
서걱….
자신의 목이 떨어져 나가는 건,
툭… 데구르르….
죽음이 수마가 밀려들며 어둠 속에 잠들기 전, 리퍼가 마지막으로 본 건, 자신의 낫을 들고 서 있는 마루의 모습이었다.
‘하….’
헛웃음 속에 그렇게 시야가 암전됐다.
* * *
뱀파이어 퀸, 다이애나의 환각은 한번 깨부수고 나면, 이후로는 그 효과가 반감되는 경향이 있었다.
일종의 항체 작용을 하듯, 그녀의 스킬에 대한 저항력이 생기는 것인데, 바로 그 같은 부분이 승부를 갈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파파파파파팍….
안개로 만들어 낸 수많은 박쥐 떼들이 달려들며, 이리저리 공격을 해 들어오는데, 그 발톱과 이빨에 물리는 횟수만큼 정신 지배에 대한 위험도 역시 높아지고는 했다.
하지만 더 이상 악몽에 빠져들진 않았다.
다이애나가 스스로 환각을 깨트린 것이긴 하나, 어쨌든 한 차례 그녀의 마수에서 벗어난 덕분에, 작게나마 저항력이 생긴 것이다.
거기에 기존의 정신방벽까지 더해지니, 그녀의 스킬은 제 위력을 내기가 어려웠다.
차후 일정 시간이 흐른다면, 이런 저항력도 사라질 테지만, 당장은 통용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 때문일까?
점차적으로 승부의 추는 한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오래지 않아 그 결과를 맞이할 수 있었다.
“후욱… 훅… 후우욱….”
거칠게 호흡을 게워 내면서도, 기어이 두 다리로 버티고 선 프링쿨스.
이와 반대로 지친 몰골로 바닥에 누워 핏물을 게워 내는 다이애나.
그 같은 구도에서 승자를 짐작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네.’
프링쿨스는 승부를 가져갔지만, 이겼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가정일 뿐이지만, 만약 다이애나가 스스로 환각을 깨트리지 않았더라면, 과연 그가 이처럼 서 있을 수 있었을까?
지금과 정반대되는 구도만이 그려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승리는 승리, 야성의 본능이 그를 움직이며 목청을 한껏 키웠다.
워우우우우우~!
하울링이 터져 나왔다.